소설리스트

221화 (221/328)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운 것은 성직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몇몇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경기장 외곽을 지키고 있던 경비대 소속 용 기병대 단원들을 불러 자초지종을 캐물었으나, 이 뜬금없는 상황이 당혹스럽기는 그들도 매한가지였다. 애당초 용이 알비야 공작의 얼굴을 핥은 것부터가 이상 행동이었다.

경기장 외곽을 점하고 있던 청백회가 단체로 벌떡 일어섰다.

“진정한 사도께서 용을 굴복시키셨다!”

야손의 선창을 기점으로 청백회 단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비올라를 칭송하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고요하던 경기장이 순식간에 길거리 장터처럼 시끄러워졌다.

“알비야 공작도 진정한 사도라고? 그럼 카타리나 공작 전하는?”

“저게 굴복시킨 거야?”

“이상한데….”

설왕설래가 오갔다. 광신적인 청백회는 논외로 두더라도, 방금 전의 상황을 성공으로 치기엔 무리라는 반응이 대다수의 중론이었다. 페기의 완벽한 성공을 바로 직전에 목격한 입장에서야 난데없는 용의 돌발 행동이 선뜻 이해될 리 없었다.

잠자코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예후르가 조용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군악대가 황급히 나팔을 불어 관객들을 주목시켰다. 침을 튀기며 설전을 벌이던 사람들이 예후르를 발견하곤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침묵은 파도처럼 번져 나갔다.

어느덧 경기장의 모든 이목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내가 첫 번째 시험 주제로 용을 꺼내 든 것은 짐승과 소통하는 사도 본연의 능력을 확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냉엄한 시선이 주저앉은 비올라에게로 떨어졌다.

“나는 저것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용은 굴복되었습니다.”

퀴테리아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살짝 턱을 치켜든 예후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것이 굴복입니까?”

여기저기서 그에 동조하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두 눈으로 목도한 결과가 너무나도 판이하니, 청백회를 제외하면 퀴테리아에게 찬동하는 세력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지그시 예후르를 노려보던 퀴테리아가 고개를 돌려 일렬로 착석한 원탁 추기경들을 보았다.

“그럼 이 자리에서 결정하도록 하지요. 보나벤투라 추기경, 그대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용은 굴복되었습니다. 알비야 공작 전하 역시 첫 시험을 통과하셨음이 분명합니다.”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보나벤투라가 선언했다. 우우, 야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가 눈 뜨고 봐 줄 수가 없군요.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펼쳐 보이신 그 경이로운 광경을 목격하고도 어찌 이리도 고집을 피우신단 말입니까?”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로 끼어든 클레멘스가 조롱하듯 눈웃음을 지었다.

“상식적인 사람으로서 반대할 수밖에 없군요.”

“…나 역시 반대에 표를 던지겠습니다.”

글리체리아가 바위처럼 굳은 얼굴로 일어섰다. 엉겁결에 그들을 따라 일어선 도미시오도 반대에 표를 던졌다.

이제 남은 이들은 넷이었다.

람베르토 추기경과 콘체사 추기경은 명목상 자신들을 거느린 솔란지아의 눈치만 살폈다. 깍지 낀 두 손 위에 이마를 얹고 오랫동안 고뇌하던 솔란지아가 마침내 침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퀴테리아 추기경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우우!”

사방에서 야유가 몰아닥쳤다. 냉큼 솔란지아를 따라 찬성에 표를 던진 람베르토와 콘체사의 목소리는 묻혀서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 정신없는 틈에 인파를 비집고 들어온 안드레아가 비어 있던 자리에 헐레벌떡 안착했다.

“난 반대! 무조건 반대!”

어찌나 다급하게 뛰어왔는지 한참이나 거칠게 숨을 몰아쉰 안드레아가 힘없이 의자에 너부러졌다.

“젠장, 투표할 계획이었으면 미리 언질을 주던가….”

“찬성이 다섯, 반대가 다섯이군요.”

클레멘스가 우아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원탁 추기경들을 비롯한 수만 관객들의 시선이 단 한 사람에게로 쏠렸다.

“성하. 이만 결정하셔야 합니다.”

클레멘스의 은근한 재촉에 레오폴트의 손끝이 움찔하며 움츠러들었다. 아직 표를 던지지 않은 유일한 사람. 그의 마지막 한 표가 결과를 가를 것이었다.

관객들은 숨을 죽이고 그의 결단을 기다렸다. 벌게진 얼굴로 퀴테리아 일파에게 야유를 보내던 시민들조차 레오폴트의 차례에선 순진하게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그들의 무한한 신뢰가 도리어 레오폴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러 왔다.

“성하….”

그의 곁에 선 고드릭이 근심스럽게 중얼거렸다. 레오폴트는 떨림이 멈추지 않는 손을 꽉 붙들고 속삭이듯 물었다.

“만약에 내가 기권을 던진다면….”

“재투표가 이루어지겠죠.”

대답은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넋 나간 비올라에게 시선을 꽂은 채로 예후르가 무미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선택해야 돼요.”

고드릭 역시 같은 의견인지 힘없이 고개만 조아렸다.

레오폴트는 가면 속에서 너덜너덜해진 입술을 짓씹고 또 씹었다. 늘 당연하게 여겼던 성좌의 무게가 불현듯 숨통을 무겁게 짓눌러 왔다. 예후르는 선택을 말했지만, 아무리 보아도 자신의 앞에는 외길뿐이었다.

레오폴트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페기.

너에겐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겠구나.

“용은 굴복되었다.”

두 눈을 내리감은 예후르가 곧 망토 자락을 펄럭이며 자리를 떴다. 관객 모두가 어리둥절한 가운데, 고드릭이 커다란 목소리로 레오폴트의 결정을 반복해 외쳤다.

퀴테리아와 보나벤투라가 손바닥을 마주치며 기뻐하고, 멀리서 청백회가 양팔을 펼쳐 들고 환호를 보냈다.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시민들이 대다수였지만, 차마 레오폴트의 결정에는 대놓고 야유를 보내지 못했다. 적어도 성도 오스피나에서 레오폴트의 위상은 변함없이 굳건했다.

시작은 찬란했되, 마무리는 모호했던 첫 번째 시험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수만의 인파가 빠져나가는 입구들은 마치 급류가 굽이치는 길목처럼 정신없었다. 안드레아는 예후르의 빈 의자에 떡하니 발을 올려놓곤 물끄러미 장내를 돌아보았다.

레오폴트가 부축을 받아 퇴장하기 무섭게 자리를 뜬 퀴테리아와 보나벤투라는 저 멀리 청백회 쪽으로 건너가 축배를 나누고 있었다. 솔란지아는 개미 떼처럼 몰려오는 성직자와 귀족들을 피해 황급히 경기장을 떠났고, 람베르토와 콘체사도 제각기 인파에 뒤섞여 모습을 감추었다.

“흐음….”

안드레아의 시선은 이제 텅 빈 경기장으로 내려갔다. 기절한 용은 경비대가 실어 갔고, 비올라는 경기장으로 난입한 청백회의 부축을 받아 사라졌다. 남은 건 모래밭에 흉측하게 찍힌 용의 발자국뿐인데, 이 수상쩍은 감각만은 좀체 가시질 않는다.

네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허벅지를 두드리던 안드레아가 불쑥 입을 열었다.

“가서 예후르 좀 찾아와요.”

“…저 보고 하신 말씀입니까?”

자리를 뜨려던 클레멘스가 의아하게 물었다.

“그럼 여기 댁 말고 또 누가 있나?”

“예에….”

“페기도 데려오고.”

클레멘스는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마저 떠나자, 안드레아는 코를 찡긋거리며 심각하게 입가를 감싸 쥐었다.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나만 알고 있으면 안 될 것 같단 말이지….”

***

페기는 일찌감치 예후르와 합류해 성도 밖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관객들이 본격적으로 퇴장하기 전에 경기장을 빠져나온 터라 마차는 휑뎅그렁하게 빈 거리를 신나게 질주했다.

“용이 비올라의 얼굴을 핥더니 갑자기 기절했다고?”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예후르는 간략하게 이전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페기는 잘 듣고도 이해가 되질 않아 연거푸 반문했다.

“분명 나랑 있을 때까진 멀쩡했는데… 그 짧은 사이 용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용은 줄곧 경비대가 관리해 왔어. 청백회가 용에게 접근했을 가능성은 낮아.”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비올라가 무슨 수를 쓴 거구나.”

예후르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페기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인적 없는 거리로 시선을 던졌다. 오랫동안 용에게 맞서 싸웠던 사막의 전사들도, 심지어는 예후르조차 몰랐던 방법을 그 애는 어떻게 안 걸까.

“…결과적으로는 너와 비올라가 다르다는 사실만 천하에 내보인 꼴이야. 네가 실패했었다면 모를까, 완벽하게 용을 복종시키는 모습을 보였으니 사람들은 비올라의 그 애매한 장면을 선뜻 인정하려 들지 않겠지.”

“그럼에도 비올라가 시험을 통과했다는 건 원탁의 개입이 있었다는 거구나.”

“…….

“이번에도 레오야?”

작금의 원탁은 페기와 비올라로 뚝 갈려 있다. 누구 하나가 변심하지 않는 이상 레오폴트에게 사실상 결정권이 주어져 있었다.

예후르는 말없이 고개를 틀었다. 창밖을 쏘아보는 옆얼굴이 닿으면 베일 듯이 서늘했다.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던 페기가 얌전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난 괜찮아. 걱정할 테니 미리 말해 둘게.”

“…어떻게 괜찮아. 레오가 그따위로 너를 저버렸는데.”

“정말이야. 아직은 괜찮아.”

페기는 엄지로 반대쪽 손등을 문질렀다. 한편으로 예상했던 일이기 때문일까, 그녀의 마음은 담담하기만 했다.

“전에 네가 했던 말대로 레오는 자기 손으로 딸을 벌주는 일, 절대 못 해. 지금은 더더욱 병적으로 그럴 거야. 4년 전 내 화형에 동의했던 것을 가장 큰 죄로 여기는 사람이니까.”

시험은 총 세 번이다.

만일 첫 번째 시험에서 승패를 가르지 못한다면, 무조건적으로 시험은 마지막까지 가게 된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하는 레오폴트로선 그것이 가장 절실했다. 페기와 비올라, 두 사람 모두 놓을 수 없는 그는 어떻게든 작금의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벗어날 묘책을 궁리해 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올라가 아닌, 나와 비올라를 동시에 선택한 것이라고 믿고 싶다.

“…혹시라도 네가 나중에 크게 실망할까 봐, 그게 두려워.”

예후르가 그늘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둡게 음영 진 눈가에서 지울 수 없는 근심이 읽혔다.

페기는 설핏 미소를 지어 올렸다.

“네가 옆에 있어 줄 거잖아.”

끝끝내 레오폴트가 비올라를 선택한다면 그녀는 몹시 슬퍼할 것이다. 어떻게든 부여잡고 있었던 부녀지간의 끈이 완전히 끊어질 테니까.

하지만 살면서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 어디 그거 하나뿐이겠는가. 페기는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제 곁에 있을 예후르를 떠올렸다. 그러면 어떤 고난도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치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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