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9화 (219/328)

성 프리울리 경기장.

이는 천 년 전, 심연의 천사 이슬라의 현신이었던 샤를로망 프리울리의 이름을 딴 원형 경기장으로 앙겔리카 성궁, 에페소스 별궁과 함께 성도 오스피나를 상징하는 세 건축물 중 하나이다.

그 어떤 콧대 높은 사람도 겸손하게 만든다는 이 장엄한 경기장은 실로 천 년 전의 솜씨라곤 믿을 수 없는 정교한 건축과, 외벽을 장식하는 섬세한 조각들로 유명했다. 비록 엷은 잿빛이던 벽면은 누렇게 색이 바래고, 군데군데 무너지고 깨진 흔적이 있었으나 천 년의 세월을 짊어진 거대한 경기장은 지금도 변함없는 위용을 자랑했다.

그러나 경기장이란 명칭이 무색하게도, 성 프로울리 경기장이 실제 경기장으로 쓰였던 선례는 없었다. 샤를로망 프리울리 역시 탐욕과 주색에 빠져 있었던 뱀의 시대를 상징적으로 후세에 남기고자 경기장의 첫 주춧돌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애당초 금욕과 청빈을 목표하는 교회가 온 시민들을 피의 광란으로 내몰았던 뱀의 시대처럼 잔인한 격투 경기를 개최할 리 없었다.

따라서 지난 천 년간 성 프리울리 경기장은 집회장 혹은 사형장의 역할을 겸해 왔다. 종교 국가의 특성상 시민들이 대규모로 회동할 일이 드물기에 대개는 사형장으로 인식되었다. 천인공노할 중죄를 저지른 죄인들은 세상에 경각심을 주어야 한다는 미명으로 경기장 한복판에서 죽어 갔으며, 원형 좌석을 빼곡하게 메운 시민들은 그때마다 공포와 희열을 동시에 느끼곤 했다.

비일비재했던 공개 사형이 기피된 것은 레오폴트가 권력을 잡기 시작한 이후였다.

사도의 수가 급감하면서부터 원탁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던 이전의 교황들은 으레 자신들의 권위를 바로 세운다는 명목으로 지나치게 잦은 공개 사형을 자행하곤 했다. 오스피나 참극 이후 성도를 통제했던 라발 세력 역시 자신들에게 거대한 반감을 가진 시민들을 억누르기 위해 공개 사형을 빈번하게 악용했다.

그러나 어린 나이부터 끔찍한 피바람을 경험했던 레오폴트는 공식적으로 공개 사형을 금지하였으며, 시민들을 억압하는 수단이었던 종교 재판을 성직자에 한해 열리도록 제한했다. 정치적으로 그와 대척점에 서 있던 클레멘스 역시 다행히도 그 점에서는 뜻을 같이했다. 자연스레 성 프리울리 경기장은 전에 없던 고요한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그렇게 수십 년을 견뎠던 경기장의 평화가 오늘로써 막을 내렸다.

굳게 닫혀 있던 경기장의 문이 열리고, 수많은 인파가 우글대는 개미 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서로 밀고 밀리는 사람들, 특등석으로 안내되는 고위 성직자들과 타국의 귀족들, 파란 장미 브로치를 달고 단체로 움직이는 청백회, 마침내 하나둘씩 채워지는 원탁 추기경들의 자리.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된 근위대의 백색 갑옷이 번쩍이고, 속닥이며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한데 뒤섞여 안개처럼 부옇게 가라앉았다.

피아제 백작과 일별하고 원탁 추기경의 자리로 들어오던 클레멘스는 잠시 멈춰 서서 웅장하게 휘날리는 교회의 깃발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가을 하늘 아래, 깃발에 수놓아진 동심원이 격렬하게 물결치고 있었다.

“…저분은….”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클레멘스는 고개를 채 돌리기도 전에 엄습하는 목소리를 감지했다.

“성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마른 바람 냄새가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클레멘스는 자색 옷자락을 흩날리며 걸어가는 예후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 이곳으로 오고 계신다더군요.”

“…어쩐지 산딜라 추기경께서 늦으신다 했습니다.”

클레멘스가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레오폴트가 제자리로 돌아온 이상, 그의 공석을 대체하던 산딜라는 더 이상 원탁에 앉을 자격이 없어진다.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며 드넓게 펼쳐진 관객석을 훑어보던 그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산딜라의 말간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클레멘스는 우아한 손길로 의자를 빼내어 자리에 앉았다. 예후르도 마찬가지였다. 원탁의 서열상 그들의 사이에는 교황 레오폴트와 안드레아, 비올라의 공석이 있었다.

클레멘스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선 어떠십니까?”

“잘 견디고 있습니다.”

“알비야 공작은 어떻게 나올는지요?”

“전혀 짐작이 안 되는군요.”

경기장 가득 들어찬 수만 인파가 내는 소음에 두 사람의 대화는 순식간에 묻혔다. 예후르도, 클레멘스도 단 한 번 서로를 돌아보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빈자리는 마치 외딴섬처럼 유리되어 있었다.

그때였다.

객석 입구를 지키던 근위대원들이 별안간 긴 창대로 ‘쿵!’ 바닥을 때렸다. 인근의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기웃대는 찰나에 입구에서 걸어 나온 군악대가 힘차게 나팔을 불었다.

부우우!

거대한 나팔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에 동조하듯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다른 군악대도 가슴이 부풀도록 나팔을 길게 불었다. 서로서로 공명하며 번지는 나팔 소리가 어느덧 광활한 원형 경기장 내부를 가득 메웠다. 승천할 것처럼 마구잡이로 솟구치던 소리가 잠잠해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입구에서 백색 갑옷을 입은 근위대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양쪽으로 나뉘어 길을 만들곤 긴 창대로 다시 한번 땅을 ‘쿵!’ 두들겼다.

만인의 이목이 그늘진 입구로 모였다. 정적으로 휘감긴 장내에 질질 끌리는 듯한 발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내리쬐는 볕 아래로 레오폴트가 느릿하게 걸어 나왔다.

온몸을 감싼 순백의 의복, 엄숙한 제식용 가면과 힘겹게 땅을 짚는 지팡이.

모두가 숨죽이고 그의 더딘 발걸음을 눈으로 쫓았다. 어느덧 자리에서 기립한 원탁 추기경들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성하.”

클레멘스가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맥없이 그를 스쳐 지나간 레오폴트가 고드릭의 부축을 받아 겨우 자리에 앉았다.

숨 막힐 듯한 적막이 단숨에 깨지며 장내가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어쩐 일로 퀴테리아가 늦는다 싶더니, 당신을 보필해 왔군요.”

레오폴트를 뒤따라 입장한 퀴테리아가 원탁의 서열에 따라 클레멘스의 옆자리에 착석하고 있었다.

예후르의 입가에 옅은 조소가 맺혔다.

“알 만해요. 당신이 어떤 심정으로 왔을지.”

레오폴트는 붉게 충혈된 눈을 그저 맥없이 껌벅거리기만 했다. 대화가 더 이어질 틈도 없이 군악대가 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둥둥둥!

둔탁한 북소리가 장내의 소음을 덮고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사람들이 입을 다문 사위에 힘차게 북을 때리는 소리만이 천둥처럼 진동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북소리가 끊어지고 나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양 경기장 서쪽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기수도 없이 홀로 걸어 나오는 인영은 작고 여위었다. 누군가 싶어 의아해하던 사람들이 곧 깨달음의 탄성을 내질렀다. 잠시 구름에 가렸던 해가 얼굴을 내밀며 장내로 눈부신 볕을 흩뿌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양지로 반전된 경기장에서 색조 옅은 은발이 별처럼 반짝였다.

카니나의 페기.

사람들은 단박에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녀의 귀환을 막연히 소문으로만 들었던 대다수의 시민들이 참담한 심정으로 신음을 삼켰다. 특히 4년 전 그녀에게 돌을 던지고 저주를 퍼부었던 이들은 몰려오는 죄책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만인의 주목 속에 걸음을 옮기던 페기가 경기장 중앙에서 가만히 멈추어 섰다. 숨통을 옥죄는 긴장감이 장내를 꽉 에워쌌다. 혼란과 경악과 의심으로 얼룩진 시선들이 그녀에게로 무자비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발치를 응시하던 페기가 흘끗 눈을 들어 올렸다.

쇠창살을 살벌하게 박아 넣은 동쪽 문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찬 기운이 흘러나오는 저 어둠 속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두가 안다. 하지만 저것을 곧 직면해야 하는 그녀의 심정은 누가 알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음에도 살갗을 따갑게 찔러 오는 저 날것의 살기를.

문이 완전히 열리고도 어둠 속은 고요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겁먹은 태양은 다시금 구름 사이로 얼굴을 감추었다.

침침하게 그늘지는 경기장으로 스산한 바람이 지나갔다. 페기는 흩날리는 은빛 머리칼 사이로 문 속의 어둠을 주시했다.

곧이다.

…쿵.

둔중한 진동이 울려 왔다.

무언가 달라진 공기를 인지한 소수의 사람들이 허예진 얼굴을 감싸 쥐었다.

…쿵.

웅성거림이 번지는 가운데 페기만은 바닥에 뿌리내린 나무처럼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발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진동이 갈수록 거세어지고 있었다. 진동은 이내 바닥을 짓밟는 소리로, 더욱 빠르게, 더욱 거세게.

어둠 속에서 순식간에 용이 튀어나왔다.

사람들의 비명이 째지도록 솟구쳤다. 기저에서 흐르던 웅성거림이 폭발하고, 여기저기서 뒹굴고 넘어지는 소리가 잇따랐다. 그 모두가 갓 태어난 어린 용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가시 세운 고슴도치처럼 목을 움츠리고 다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검은 용이 흥분하여 홍채를 길게 찢었다.

예리한 송곳니를 드러낸 용이 삽시간에 날개를 펼쳤다. 또다시 관객석에선 숨넘어갈 듯한 비명이 울렸다. 용은 어떻게든 날아 보려 했지만, 날개를 옥죄는 쇠사슬이 자꾸만 움직임을 방해했다. 겁먹어 흥분한 용이 이리저리 고개를 휘저으며 눈알을 굴렸다.

닿을 수 없는 관객석의 수만 명. 그리고 가까이에 홀로 서 있는 페기.

목표를 발견한 용의 눈알이 확 초점을 좁혔다. 그대로 살벌한 눈빛이 오갔다. 페기는 용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주위를 빙빙 돌며 상대를 가늠하던 용이 별안간 폐부가 부풀어 오르도록 숨을 들이마셨다.

끼아아아악!

벼락처럼 용의 울음소리가 꽂혀 들었다. 페기는 순간 눈앞이 하얘지는 것을 경험했다. 한계를 뛰어넘은 고통이 머릿골을 파고들어 그녀의 뇌를 조각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누군가 양쪽 귓구멍으로 화살을 쑤셔 넣는 것처럼 극심한 통증이 몰아닥쳤다.

페기는 짧은 비명 한마디 내뱉지 못하고 철퍼덕 주저앉았다.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았으나 고통은 조금도 깎이질 않았다. 저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귓구멍으로 쑤셔 박히는 용의 울부짖음이 그대로 뇌를 관통하는 것만 같았다. 시시각각 그녀의 몸이 가루처럼 쪼개지고 있었다.

그때, 관객들이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위협적으로 목청만 낮게 울리던 용이 갑자기 페기에게 달려들 것처럼 뒷발로 땅을 구르기 시작한 것이다.

쿵쿵!

초조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던 클레멘스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힘없이 걸터앉아 있던 레오폴트가 경련하듯 온몸을 떨고, 입가를 감싸 쥔 예후르는 찌를 듯한 시선으로 페기를 주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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