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야 아무도 모를 일이지. 엘피도 공작은 알비야 공작을 끌어내리기 위해 카타리나 공작이 필요하고, 반대로 카타리나 공작은 무사히 성궁으로 돌아오기 위해 엘피도 공작의 조력이 절실하니까. 서로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떨어지는 모습이 뭇사람들의 눈에는 제법 돈독하게 보였을지 어찌 아나.”
엘피도 공작에 대한 의혹으로 들끓던 성도는 이제 그럴듯한 추측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청백회가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아무리 순례자들을 매수해도 별반 효과는 없었다.
성도 오스피나.
그곳은 본디 지나간 소문에 귀 기울여 주지 않는 매정한 땅이었다.
한편, 대낮에 벌인 싸움질로 치안대에 끌려갔던 용 기병대 단원 니체타는 며칠 뒤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추레한 모습으로 귀환했다.
“다녀왔습니, 아, 아야.”
무릎 꿇고 인사를 올리던 니체타가 찢어진 입가를 매만지며 앓는 소리를 냈다. 예후르가 가볍게 손짓했다.
“편히 앉아도 좋다.”
“감사합니다.”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소파를 깔고 앉은 니체타가 뜨거운 찻잔을 들고 후후 불어 가며 차를 마셨다. 성치 않은 얼굴을 걱정스럽게 뜯어보던 페기가 하녀를 눈짓하여 연고를 발라 주게 했다.
예후르가 물었다.
“크게 다친 곳은?”
“아휴. 오십 다 된 아저씨 주먹에 생채기나 좀 났을 뿐이죠.”
“그럼 휴가는 필요 없겠군.”
“아이고, 삭신이야! 저 죽겠습니다, 전하!”
발라당 소파에 드러누운 니체타가 허리를 붙잡고 뒹굴기 시작했다. 어쩔 수가 없다는 듯 예후르가 고개를 내둘렀다.
“상은 네 숙소로 전하마. 수고했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벌떡 일어선 니체타가 허리를 직각으로 숙여 보이곤 바람처럼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막시모가 다가와 고개를 조아렸다.
“전하와 이스파갈족을 엮은 헛소문은 며칠 새 잠잠해졌습니다.”
“조금의 틈이라도 보인다면 청백회가 죽은 소문을 다시 불러일으키겠지. 앞으로도 종종 연극을 해 줘야겠어.”
느른하게 턱을 괸 예후르가 페기에게 넌지시 눈길을 주었다. 페기는 고개를 돌려 석상처럼 문가를 지키고 서 있던 라만을 불렀다.
“가서 몬틸로 백작에게 전해요. 일은 잘 마무리되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알겠습니다.”
라만은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페기는 차를 마시는 척 예후르를 힐끗 훔쳐보았다. 라만을 호위로 둔 지 벌써 며칠째인데 그는 아직껏 별말이 없었다.
“왜?”
예후르는 귀신같이 훔쳐보는 시선을 눈치챘다. 페기가 조금 떨떠름한 기분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왜 아무런 말이 없나 해서.”
“무슨 말?”
“라만 말이야.”
예후르는 ‘아’ 하고 짧은 탄성만 내뱉을 뿐이었다. 기대하지 않은 심심한 반응에 페기는 잠시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놓았다.
“마샤는 라만이 걱정스러운가 봐. 때때로 나한테 불손한 시선을 보낸대.”
“다른 호위들도 있으니 괜찮을 거야.”
“…그게 끝이야?”
저도 모르게 불퉁한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턱을 괸 자세로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던 예후르가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원한 일이잖아.”
“…….
“이스파갈족을 보란 듯이 가까운 호위로 두어 그들을 네 세력으로 포섭했음을 알리고, 그로써 이스파갈족의 안심과 충성을 이끌어 내려는 거 아니었니?”
그야 맞았다. 다만 그 전제가 틀렸을 뿐.
“난 네가 그러길 원하는 줄 알았어.”
페기가 당황하여 대꾸하자, 예후르는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크게 뜨인 금안 위로 눈꺼풀이 두어 차례 덮이더니, 예후르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이스파갈족을 받아들이기로 한 건 네 결정이잖아. 나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만 알고….”
“네가 당연히 그래야 하는 일은 없어, 페기.”
예후르의 눈썹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녀를 안타까워하는 듯도 하고, 한편으론 답답해하는 것도 같았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중요하지 않아. 난 네 결정이라면 반박 없이 따를 테니까.”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해.”
페기는 가까스로 아연한 기분을 삼켰다. 정치는 예후르의 장기였다. 그녀는 충실히 그의 뒤만 따라가면 되었다.
“갑자기가 아니야. 원래부터 네가 안정되면 이럴 생각이었으니까.”
“…….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난 계속 내 의견을 말할 거야. 하지만 결정은 네 몫이야, 페기. 내 의견을 따르든,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추합하든 난 너의 결정을 따를 테니까.”
“대체 내가… 왜 그래야 해. 그냥 지금까지처럼 네가 결정하고 네가 이끌어 주면 되잖아.”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어. 너도 슬슬 경험해 봐야지.”
예후르가 실낱같은 미소를 지어 올렸다. 페기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래서 라만을 내 호위로 들인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아무 말 하지 않은 거야?”
“응.”
“그럼 말해 봐. 네 생각은 어떤지.”
“필요한 일이었어. 절벽으로 몰린 이스파갈족에게 신뢰를 보여야 했으니까.”
“네 기분은 어떤데.”
예후르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페기는 뚫어져라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질투하지 않는 사랑을 믿을 수 없었다. 당장 그녀만 하더라도 오랫동안 예후르의 약혼녀로 곁을 지켰던 세도파를 얼마나 미워하고, 또 그 어두운 감정에 얼마나 좌절하였던가.
“…라만이란 자가 너에게 불손한 감정을 품은 것 같기는 해.”
“그래. 그런 사람이 내 곁을 지켜.”
페기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 그의 입술을 주시했다.
열어.
열어서 무슨 말이라도 해 봐.
“…마음 같아선 너를 나만 볼 수 있는 곳에 종일 가두어 두고 싶어.”
속삭이듯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꿀처럼 다정한 말씨에 홀린 페기는 뒤늦게야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생각보다 과격한 언사에 어찌할 수 없는 당혹감이 치밀어 올랐다.
예후르가 시들어 가는 꽃처럼 힘없이 웃었다.
“해선 안 되는 짓이라는 걸 알아. 그저 내 마음의 문제일 뿐이지.”
“…….
“페기. 난 많은 것을 포기했고, 앞으로도 많은 것을 포기할 거야. 그러니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일쯤은 무던하게 넘길 수 있어.”
페기는 머뭇거리며 입술을 닫아 걸었다. 불현듯 눈앞의 그가 헤아릴 수 없이 까마득한 세월을 견딘 노인처럼 느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담담한 목소리로 포기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난 네 생각보다 너를 아주 많이 생각하고 있어.”
호박색 눈이 아름답게 휘어졌다.
“무의미한 걱정은 하지 마. 넌 완수해야 하는 일이 있잖아.”
물끄러미 그의 시선을 마주하던 페기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가로질러 그녀가 닿은 곳은 창가였다. 남쪽으로 트인 커다란 창문을 열어젖히자, 공터에 누워 따사로운 가을볕을 즐기던 백룡이 고개를 든다.
페기는 창밖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으로 와 닿는 서늘한 비늘을 훑자, 백룡이 재롱을 피우듯 고개를 기대 왔다.
페기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울어 줘, 코리.”
감겨 있던 백룡의 붉은 눈이 서서히 뜨였다. 스산하게 벌어지는 용의 입을 확인한 페기가 스르르 눈을 내리감았다. 곧 깨어질 정오의 정적이 위태로이 몸을 떤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 어느덧 첫 번째 시험 날이 도래했다.
***
마차의 창밖으로 울긋불긋하게 물든 나뭇잎을 발견한 이시도르 피아제가 우수에 잠긴 얼굴로 한탄했다.
“벌써 가을이로군요.”
“안 그래도 지난달부터 가을이었지요.”
맞은편에 앉은 클레멘스가 매끄럽게 대꾸했다. 왈칵 미간을 찌푸린 이시도르가 불만에 가득 찬 기색으로 반박했다.
“그걸 제가 모르겠습니까?”
“청백회에게 고발당한 뒤로 저택에서 꼼짝도 못 하셨잖습니까. 모르시는 줄로만 알았지요.”
“허, 참….”
울컥한 이시도르가 겨우 감정을 다스리며 고개를 팩 돌렸다.
집필한 소설에 반종교적인 내용이 포함되었다는 얼토당토않은 고발을 받아 보름 가까이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던 그는 이제 청백회의 청 자만 들어도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수준에 등극했다.
명색이 라발의 대사이자 손꼽히는 명문가의 자제로서 콧대 높은 자존심에 금이 간 것도 있었지만,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성정에 고독한 감금 생활은 지나친 독이 되었다.
지난 마음고생을 드러내듯 까칠하게 상한 백작의 얼굴을 눈여겨본 클레멘스가 짐짓 다정한 목소리로 다독여 주었다.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난 것이 어딥니까. 광신적인 이단 심문관들에게 걸려서 고작 보름 만에 풀려난 건 아마 교회 역사상 최단 기록일 겝니다.”
“그게 어디 제가 훌륭한 탓이겠습니까. 전부 황제 폐하의 은덕이지요.”
자신이 직접 임명한 외교 대사가 이단 심문관들의 손에 구금되어 있다는 급보가 전해지자마자, 라발의 황제 요앙 오귀스트는 당장에 전서응을 날려 매서운 항의를 보내왔다. 들려오는 소문으론 황제의 친필 서한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과격한 수위였다고 한다.
“저는 오히려 이모님이 걱정입니다. 난데없이 탄핵안이라니…. 클레멘스 추기경께선 달리 들은 바가 없으십니까?”
“듣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중앙 교회는 지금 카타리나 공작 전하와 알비야 공작의 문제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일단 첫 번째 시험이 끝나야 뭐라도 진행이 될 겁니다.”
“하….”
“탄핵은 초반 소명에 실패하면 단시간에 끝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느긋하게 기다리십시오. 글리체리아 추기경이야 믿고 따르는 이들이 많으니, 성도의 여론도 청백회의 농간에 쉽게 휘둘리진 않을 겁니다.”
이시도르는 울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대 피아제 백작인 그의 어머니가 저질렀다는 비리는 사실이었다. 라발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발각되어 처벌이 끝난 일이나, 글리체리아 추기경이 그 일에 관여했다는 정황은 이번에 청백회가 새로이 밝혀낸 사실이다.
상당히 골치 아픈 상황이지만, 결국에 알비야 공작과 청백회가 몰락하면 조용히 마무리될 일이었다. 엘피도 공작이 성좌에 오른다면 그간의 공로를 참작 받아 글리체리아는 미약하게 처벌될 터.
반대로 알비야 공작이 끝끝내 살아남는다면, 자신의 승리를 과시하기 위해 가장 치욕적인 방식으로 글리체리아를 내칠 것이다. 이를테면 아나클레토가 당했던 것처럼 말이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잘 해내시겠지요?”
이시도르가 못내 불안하게 묻는 소리에 클레멘스는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한 줄로 이어지는 기나긴 마차의 행렬과 도로를 가득 메운 인파. 모두가 한 방향, 한 곳만을 바라보는 와중에 저 멀리로 원형 경기장의 장엄한 위용이 드러나고 있었다.
“잘 해내시길 기도하는 수밖에요.”
클레멘스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