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7화 (217/328)

카타리나 공작과 알비야 공작이 신성의 진위를 둘러싼 시험에 들 것이라는 기막힌 소식이 성도를 강타했다.

4년 전 죽었던 카타리나 공작이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조차 믿지 못하는 이들이 아직 부지기수였다. 엘피도 공작이 무슨 해괴한 수를 썼으리라 의심하던 사람들마저 지엄한 원탁의 결정을 듣고는 반신반의했다.

시험에 처한다는 것은 곧 원탁의 능력만으로는 두 사람의 진위를 가릴 수 없다는 뜻.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은 전례가 없는 기적이었다. 그렇다면 카타리나 공작은 여태 누구도 선보인 적 없는 기적을 일으켰을 정도로 거대한 신성을 지닌 사도인가. 그리 대단한 사도의 성화가 4년 전에는 어찌해 꺼졌던 것인가. 성 예리엘 대성당의 성화는 어째서 그녀의 귀환이 아닌 알비야 공작의 각성에 발맞추어 다시 타올랐나.

동시대 한 천사의 사도는 오직 하나.

억울하게 매도되었던 카타리나 공작이 실은 결백한 사도였다면, 알비야 공작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의혹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누구도 감히 예상하지 못했던 카타리나 공작의 등장으로 알비야 공작은 지대한 타격을 입었으며, 그녀를 주축으로 한 청백회의 세력은 자연스레 움츠러들었다. 자경대를 자처하여 성도의 온 시가지를 휘젓고 다니던 이들이 죽은 듯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나 청백회가 고작 한 차례의 타격으로 와해될 세력은 아니었다. 외부 세력을 모조리 적으로 규정하여 결속력을 극단으로 끌어올린 그들은 맹목적인 추종을 자랑했으며, 무엇보다도 우두머리인 퀴테리아가 이대로 무너질 리 없었다.

성도 곳곳에 퍼져 있던 청백회의 모든 단원들을 소집한 퀴테리아는 원탁회의 직후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한 채 칩거를 이어 갔다. 그리고 며칠 뒤, 청백회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처음은 피아제 백작을 향한 고발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엘피도 공작과 잦은 회동을 가지며 공공연히 청백회에 반하는 모습을 보여 온 인물. 게다가 최근에는 성도의 사교계에서 광범위한 영향력까지 떨치고 있었다. 피아제 백작을 중심으로 한 반(反) 청백회 여론 형성, 엘피도 공작 측과 라발의 긴밀한 연계를 막기 위해선 백작의 운신을 제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했다.

피아제 백작이 걸려들자, 이후로는 클레멘스, 글리체리아, 도미시오, 산딜라 등 엘피도 공작과 뜻을 함께하는 원탁 추기경들을 향한 탄핵안이 잇달아 제출되었다.

클레멘스와 산딜라는 탄핵안의 내용을 소명하여 빠르게 의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글리체리아와 도미시오는 그러지 못했다. 글리체리아는 사사로이 언니가 되는 선대 피아제 백작과 관련된 비리, 도미시오는 과거에도 몇 차례 지적되었던 청탁 문제가 다시금 불거져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황의 성좌 아래 가장 빛나는 원탁 추기경의 자리였다. 일전에 파문되어 행방이 묘연해진 아나클레토처럼 증거가 아주 명확한 것이 아니고서야 원탁 추기경은 그리 손쉽게 탄핵될 수 없었다. 자연스레 글리체리아와 도미시오 추기경의 탄핵은 장기적인 법정 분쟁으로 이어졌다. 수군거리길 두어 달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했다.

청백회의 반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작금의 성도는 수용 가능한 인원을 초과할 정도로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교황의 자리를 둘러싼 엘피도 공작과 알비야 공작의 쟁탈전을 구경하기 위해 백방에서 모여든 순례자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전 재산을 여비 삼아 성도를 찾아온 빈자들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귀향길에 올랐어야 하는 이들인데, 예기치 못한 카타리나 공작의 등장으로 공의회가 중단된 것이 문제였다. 성도 체류 기간이 기약 없이 장기화되면서 수중의 여비가 떨어진 것이다.

자연스레 동냥질하는 거지로 전락한 순례자들은 점차 성도 치안대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순례자들끼리 다투어 피를 보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며, 거듭된 강도질과 도둑질로 성도 시민들은 수십 일째 극심한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순례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치안대는 가진 힘이 미약했으며, 중앙 교회는 카타리나 공작과 알비야 공작의 문제를 다루는 데만도 허덕이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불안정해지는 성도의 정국을 해결하기 위해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 바로 청백회였다.

청백회는 기나긴 칩거를 풀고 저택의 대문을 활짝 열었다. 도둑질로 연명하던 순례자들을 불러 모아 무료로 음식을 배급했으며, 숙박할 공간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그에 빈말로도 좋다 할 수 없었던 청백회의 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툭하면 깡패처럼 무섭게 구는 청백회를 꺼려 하던 성도의 시민들이 조금씩 호의적인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기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즈음이었다.

이번 공의회의 시작을 알렸던 경비대 교체 안건.

그 주인공이었던 이스파갈족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카타리나 공작이 등장한 시점에서 경비대 교체 건은 이미 세간의 흥미를 잃었으나, 이스파갈족이 카타리나 공작의 수하로 들어갔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순례자 무리에서 떠돌던 소문은 성궁을 방문한 카타리나 공작이 보란 듯이 피부 검은 사막 민족을 호위로 대동하면서부터 폭발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기적을 일으킨 사도와 이교도.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자극적인 소재건만, 카타리나 공작의 곁에는 똑같이 사막에서 온 엘피도 공작이 있었다.

엘피도 공작이 누구인가.

뱀을 죽인 영웅이자, 역대로 따져도 가장 강력한 사도로 손꼽히는 인재.

흠잡을 구석 없어 보이는 그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출신지였다. 그을린 피부색으로 말미암아 오래전부터 이교도라는 허무맹랑한 손가락질을 받았던 그는 몇 해 전 천사 미할리나의 성상을 베어 넘긴 일로 그 의혹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부정할 수 없는 이교도인 이스파갈족마저 그와 같은 배를 탔다. 혼자로도 충분했던 의혹은 둘이 되자 확신으로 진화했다. 그러자 청백회는 들불처럼 번져 가는 소문에 기름을 붙기 시작했다.

‘엘피도 공작이 이교도들과 합세하여 사막의 술법으로 죽은 자를 되살린 것이 아닌가?’

백여 년간 이어졌던 사막과의 성전은 어느덧 반백 년 전의 일이 되었다. 사람들은 윗세대로부터 전해 들은 사막의 잔혹함을 뼈에 새겼지만, 정작 사막이 어떤 곳이고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는 잘 몰랐다. 이러한 무지는 사막의 신비성과 결합하여 얼토당토않은 상상을 부추겼다.

청백회가 조작하고 순례자들이 퍼트린 소문은 순식간에 성도 전체를 뒤덮어 나갔다. 여론에 휩쓸린 몇몇 성직자들마저 엘피도 공작과 이스파갈족 전체를 체포하여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는 망발을 일삼았다.

그러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일이 터지고 말았다.

인파가 가득 모인 한낮의 성도 중심 시가지에서였다. 엘피도 공작의 용 기병대 단원들과 경비대 소속 용 기병대 단원들이 시가지 한복판에서 마주쳤는데,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싸움질을 벌인 것이었다.

“어쭈. 용 타기 무섭다고 질질 짜던 애새끼가 많이 컸다?”

“그러는 아저씨는 많이 늙었네. 할아버지, 아침에 서기는 해요?”

오래전 예후르가 인근 고아원을 돌며 모집한 용 기병대 단원들은 일찍이 경비대 소속의 용 교관에게서 가혹한 훈련을 받았다. 굳이 따지자면 사제지간이었다.

“거, 우리 밖에선 못 본 척 지나다니기로 약속했잖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왜 아는 척이야. 기분 더럽게.”

“나는 못 본 척을 해도 너는 인사를 해야지. 내가 성심성의껏 가르쳐 준 덕에 네가 밥벌이라도 하고 있는 게 아니냐. 나 아니었어 봐, 너 지금쯤 똥통에나 굴렀다?”

“뭐라는 거야. 할아버지, 발음이나 좀 똑바로 해요. 교국 땅 밟은 지가 언젠데 아직도 더럽게 사막 냄새나 풍기고 다니실까?”

“뭐 이 새끼야?”

“잉잉잉잉, 갱갱갱갱. 개새끼도 아니고 발음이 뭐 그래?”

당연히 주먹질이 오갔다.

“네깟 놈 가르친 게 내 평생의 실수다! 네놈 따위에게 용 기병대가 가당키나 해?!”

“아, 좀만 참아 봐, 그럼! 우리 전하께서 교황이 되시면 너희 더러운 사막 놈들은 전부 고향으로 쫓아내 주실 테니까!”

“뭐?!”

“용 기병대가 우리 하나면 됐지, 굳이 당신들까지 필요하겠어?”

“저, 저놈이 은혜도 모르고!”

배곯은 순례자들의 주먹 다툼과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전투를 업으로 삼은 사람들답게 피가 튀기고 뼈가 뒤틀리는 싸움이었다. 시가지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아주 활개를 치며 주먹질을 벌인 탓에 장터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눈 돌아간 군인들의 싸움은 결국에 치안대가 몰려오고서야 막을 내렸다. 사지가 붙들려 끌려가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악에 받치도록 고성을 질러 댔다. 배신자, 더러운 이교도, 천지 분간 못 하는 짐승 새끼…. 듣는 이의 얼굴이 절로 찌푸려지는 원색적인 비난이었다.

대낮에 벌어진 주먹질은 또다시 성도를 한 차례 들썩여 놓았다. 그만한 싸움이면 언제 어디서건 회자될 법한데, 심지어는 싸움의 당사자가 각각 엘피도 공작과 몬틸로 백작의 수하들이었다.

단순히 개인적인 악감정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기엔 그들의 싸움을 보고 들은 자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자연스레 엘피도 공작과 이스파갈족의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러고 보면 둘 다 용 기병대를 소유하고 있잖은가.”

“사막 이북에서 아무리 용이 귀하다곤 하나, 둘보단 하나가 더 귀하겠지.”

“정말 엘피도 공작이 교황이 되면 이스파갈족을 쫓아낼까?”

엘피도 공작과 이스파갈족이 직접적으로 손을 잡았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이제 그 사이에 카타리나 공작의 존재를 끼워 넣기 시작했다. 만일 카타리나 공작을 주축으로 양측에 엘피도 공작과 이스파갈족이 자리잡은 것이라면, 두 세력이 대립하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었다.

“이스파갈족이야 청백회의 미움을 잔뜩 샀으니 카타리나 공작 말고는 대안이 없었을 테고… 엘피도 공작으로선 갑자기 또 다른 용 기병대를 가진 이스파갈족이 굴러 들어온 격이니,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느낀 것이로군.”

“일리 있는 지적일세. 카타리나 공작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일 어느 정도 정치적 식견을 가진 인물이라면, 엘피도 공작을 견제하기 위해 이스파갈족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르지.”

“엘피도 공작과 카타리나 공작은 사이가 아주 돈독하다고 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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