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6화 (216/328)

입꼬리에 웃음을 가득 매단 마샤가 손을 높이 흔들었다. 페기는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예후르는 작은 짐승부터 시작해 보라고 했다. 새끼 토끼 정도면 합당하다.

토끼는 마샤가 던져 준 당근 조각을 열심히 갉아 먹고 있었다. 먹는 데 얼마나 집중을 했는지 마샤가 연신 쓰다듬는데도 고개 한 번 들어 보지 않는다.

마샤는 검지를 입술에 붙여 보이곤 페기의 손을 잡아 살며시 토끼의 등에 올려 주었다.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빳빳하게 굳어 있던 손에 보드라운 털이 닿자 금세 힘이 풀렸다.

페기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토끼의 등을 매만졌다. 숱하게 만져 보았던 토끼 털가죽보단 거친 느낌이지만, 살갗 아래서 팔딱팔딱 박동하는 뜨거운 맥동이 못내 생경했다. 페기는 두려워하던 것도 잊고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 귀를 찡긋거리며 고개를 든 토끼가 까만 눈 한가득 그녀의 얼굴을 담았다. 토끼의 하얀 앞니가 설핏 보인다 싶더니, 낑낑대는 울음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페기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왈칵 찌푸렸다. 귀를 쑤시는 것 같은 익숙한 통증과 함께 울렁거리는 이명이 피어올랐다. 자주 들었던 말의 울음소리보다야 덜했지만 달가운 고통일 리 없다.

페기는 입 안의 여린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저 낑낑거리는 듯하던 토끼의 울음소리가 점점 둔중하게 머릿속으로 치받기 시작했다. 사람의 언어보다 거칠고 본능적인 무언가가 뇌리로 쑤셔 박혔다. 페기는 선명하게 박히는 ‘배고픔’을 읽고, 마샤의 손에서 당근을 뺏어 멀리 던져 버렸다.

토끼는 득달같이 수풀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고통을 동반한 이명이 단숨에 가시는 것을 느끼며 페기는 기나긴 한숨을 내뱉었다. 부랴부랴 그녀를 부축해 일으킨 마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괘, 괜찮으세요, 전하?”

페기는 말없이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일단 한 단계 뛰어넘었다는 안도감이 낮게 차올랐다. 페기는 걱정을 감추지 못하는 마샤를 안심시키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찰나의 순간, 먼 하늘에서 화살에 맞아 떨어지는 새 한 마리가 눈을 스쳤다.

페기의 얼굴이 반사적으로 구겨졌다.

휙!

쏘아 올려진 화살이 하얀 비둘기의 몸에 날아가 박혔다. 예후르는 맥없이 추락하는 새의 위치를 가늠하며 느릿하게 활을 거두어들였다.

“전하….”

아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막시모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수의 호위 기사들을 제외하면 다행히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전하, 새는 저희가 처리할 테니 전하께선….”

예후르는 그의 말을 묵살하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막시모가 다급하게 그를 만류했다.

“전하! 성도에서 새 사냥은 금지입니다! 천계율이 금한 사항을 어찌…!”

교회는 천사께서 날개 달린 새에게 깃드신다 하여 성도 오스피나에 한해 새 사냥을 엄금하고 있었다. 당장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만취하여 새를 때려잡았다가 옥고를 치른 주교가 있었다. 사도인 예후르야 적당히 경감된 벌을 받겠지만, 천사 미할리나의 성상을 베어 넘긴 전적이 있는 만큼 비난과 의혹의 시선은 피하지 못할 것이었다.

모를 리 없는 사실일 텐데도 예후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독선적인 주인을 모시는 죄로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어 본 것이 아닌 막시모는 꽉 막힌 것처럼 갑갑해진 가슴을 때리며 황급히 그를 뒤따랐다.

비둘기는 멀지 않은 곳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죽은 비둘기의 사체를 화살째로 들어 올린 예후르가 유심히 비둘기를 살펴보았다.

“…놓쳤군.”

“예?”

막시모는 순간 해괴하단 표정을 지었다. 다 잡아 놓고 놓쳤다니, 저게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예후르는 말없이 비둘기 사체를 내던지고 가만히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는 날아가는 새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스멀스멀 차오르는 불쾌감에 심중이 뒤틀리려는 찰나, 지척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후르는 고민의 여지 없이 화살을 뽑아 인기척이 들려온 곳으로 겨누었다. 우거진 수풀 사이, 날카로운 화살촉이 가리키는 것은 다름 아닌 페기였다.

순식간에 공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겨누어진 화살촉을 사이에 두고 한 쌍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뜻밖의 상황에 한참 동안 굳어 있던 보랏빛 눈이 뒤늦게야 깨질 듯이 일렁거렸다. 난데없는 당혹감에 뒤이어 애써 묻어 두었던 과거의 기억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페기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철퍼덕 주저앉았다. 차마 그를 마주하지 못하고 꺾인 고개가 달달 떨렸다. 예후르는 잔떨림을 멈추지 못하는 은발을 그저 멀거니 바라만 보았다. 짙은 안개 속, 바람 먹어 들추어지던 낡은 담요와 부지불식간에 화살을 맞고 쓰러지던 그녀의 모습이 신물처럼 치밀어 올랐다.

“전하!”

수풀을 비집고 달려온 마샤가 황급히 페기를 감싸 안았다. 홀로 겨울인 것처럼 무섭게 떠는 어깨에 도톰한 숄을 걸쳐 주곤,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를 부축해 간신히 일으켜 세웠다.

이제 마샤는 겁먹은 얼굴로 여전히 이쪽을 겨누고 있는 화살을 본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넋 놓고 지켜보던 예후르가 그답지 않게 몹시 황망한 손길로 활을 물렸다. 그 와중에 제대로 쥐지 못한 화살이 맥없이 진흙밭을 뒹굴었다.

그제야 마샤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페기를 부축하여 비틀비틀 물러났다. 힘없이 꺾인 페기의 고개는 여전히 땅에 처박혀 있다. 은빛 머리칼 사이로 잘게 떨리는 여린 턱이 울창한 수풀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예후르는 감히 그녀를 막아설 수 없었다.

막시모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전하….”

막시모의 근심 가득한 시선이 오래된 고목처럼 버티어 선 그의 등에 가 닿았다. 예후르는 끔찍한 자괴감을 씹어 삼키며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성급했던 행동이 죄가 되어 돌아왔다. 남은 세월 이고 가야 하는 짐이 벌써부터 숨 막히도록 버겁다.

할 수만 있다면, 과거의 자신을 난도질하고 싶었다.

“이제 괜찮아, 마샤.”

“괜찮으시다는 분 안색이 이렇게 창백해요?”

“조금 놀라서 그래. 별일 아니잖아.”

페기는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숄을 덤덤하게 추슬렀다. 속상한 마음에 애꿎은 입술만 짓씹던 마샤가 결국에 호위 기사들을 데리고 하릴없이 물러났다.

고즈넉한 후원에 홀로 남겨진 페기는 고개를 높이 쳐들어 따사롭게 내리쬐는 해 질 녘 노을을 느꼈다.

어떤 과거의 상처는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긴다.

그녀가 죽음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십중팔구 그런 이유일 것이다. 처절했던 죽음의 기억은 그녀의 영혼에 가장 깊게 남겨진 상흔이었으므로. 나락으로 굴러떨어진 삶은 이후로도 수많은 상처를 겪어야 했지만, 개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날이리라.

반사적으로 등의 흉터를 만지려던 손길이 멈추었다.

페기는 다시 양손을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렸다.

그날의 상처가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그날에 그녀는 또 한 번 혹한처럼 몰아닥쳐 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다. 예후르가 어떻게 자신을 죽음의 문턱에서 건져 올렸는지는 모르겠으나, 뼈에 각인된 공포가 쉽사리 가실 리 없었다.

예후르를 다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기억 속에 묻어 두고 다시는 들추지 않으리라 결심했던 일이다. 막연하게 쉽지는 않으리라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날 줄은 몰랐다.

페기는 조금 전 화살을 사이에 두고 흐르던 정적을 떠올렸다. 때로 상처는 모두에게 남겨진다. 착잡함이 두통처럼 밀려왔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와.”

멀지 않은 곳에서 망설이듯 배회하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페기는 피로가 묻어나는 얼굴을 손바닥에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늘한 가을바람이 여윈 발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페기는 울적한 시선으로 발치를 응시했다. 한동안 멎어 있던 그의 발걸음이 저벅저벅 다가오고 있었다. 동그랗게 고여 있던 그녀의 그림자 위로 그의 그림자가 무겁게 겹쳐졌다.

길게 늘어지는 그의 그림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페기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지는 해를 등진 그의 얼굴이 까마득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페기는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힘없이 딸려 오는 그의 어깨를 잡아 자리에 앉힌 뒤 양손으로 그의 턱을 잡아 올렸다.

그제야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불그스름한 노을빛이 연달아 들이치는 얼굴에서 쓰라린 고통이 엿보였다. 페기는 그가 견디고 있을 자괴감을 어렴풋이 가늠하며 엄지로 그의 뺨을 문질렀다.

“난 괜찮아.”

이것은 최면이다.

정말로 괜찮아지기 위한 발버둥.

더는 과거의 망령에 붙들려 있고 싶지 않았다. 과거의 상처에 얽매여 쓸데없이 멀리 돌아온 것은 지난 1년으로 족했다.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였다. 부질없는 불신과 증오의 사슬을 끊어 내야만 했다. 제 상처는 저 혼자만 알고 있으면 된다.

예후르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붉은 노을빛이 눈물처럼 번져 오고 있었다. 페기는 노을이 일렁이는 그의 얼굴에서 말로 다 못 할 죄책감과 괴로움을 읽었다. 그거면 되었다. 괜찮아지기에는 충분했다.

페기는 양팔을 뻗어 그의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사지의 힘줄이 잘린 것처럼 미동 없던 그가 그제야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의 얼굴과 맞닿은 배에서 잔떨림이 느껴졌다. 이럴 때면 울지 못하는 그가 안쓰럽다. 페기는 가만히 두 눈을 내리감았다. 미지근한 눈물 한 줄기가 조용히 그녀의 뺨을 타고 내려왔다.

서녘으로 기울어 가는 해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황혼을 내지르는 하늘.

먹이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용들이 창공에서 춤을 춘다. 멀리서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흐릿한 이명을 자아냈다. 페기는 그를 품에 안고 몸을 옹송그렸다. 나는 괜찮아질 것이다.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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