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5화 (215/328)

물 흐르듯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페기는 연거푸 마른침만 삼켜 냈다.

이성적으로는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지만, 가슴에 쐐기가 꽂힌 것 같은 심정적인 타격은 피할 수 없었다. 예후르가 소중한 가족들을 땅을 기는 미물처럼 무감정하게 대할 때마다 그녀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그의 써늘한 면모를 다시 한번 체감하게 되었다.

싸하게 얼어붙은 그녀를 눈치챈 예후르가 곧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 올렸다.

“걱정하지 마. 레오는 반드시 깨어날 테니까.”

정처없이 서성이던 페기의 시선이 결국에 맥없이 내리깔렸다. 어정쩡한 침묵 속에서 예후르는 말을 고르듯 얼마간 찻잔의 손잡이만 만지작거렸다.

“그보다 첫 번째 시험의 내용은 전해 들었니?”

“…조금 전에 몬틸로 백작이 다녀갔어.”

“그럼 퀴테리아 추기경이 용을 복종시키자는 의견에 두말없이 동의했다는 것도 들었겠구나.”

페기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 걸까? 몬틸로 백작은 숙련된 교관도 아무런 장비 없이 용을 길들이기는 힘들다고 했는데.”

“확실히… 사도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하물며 짐승과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도에게도 마냥 쉬운 과제는 아니었다. 갓 태어난 어린 용이라곤 하나, 교육되지 않은 야생 상태 그대로의 용은 재앙과 다름 없는 위험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도 평범한 사람이 용을 길들일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너도 모른다고?”

“…페기. 나라고 세상 모든 일을 다 아는 건 아니야.”

예후르가 부드럽게 웃었다. 페기는 실감이 나지 않아 얼떨떨해졌다.

“퀴테리아가 아무도 모르는 방법을 알고 있든, 아니면 사악한 술책을 부릴 생각이든 관계없이 가장 중요한 건 네가 첫 번째 시험을 통과하는 거야. 비올라의 신성이 거짓임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과 동시에 네 신성이 진짜라는 것을 모두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하니까.”

“…….”

“너는 자신 있니?”

상냥한 물음에 페기는 심란하게 눈을 피했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짐승을 기피해 왔다. 짐승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명이 돌 정도로 귀가 아파 왔기 때문이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예후르가 시원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좋아. 그럼 오늘부터 조금씩 훈련을 해 보자.”

***

페기는 귀가 밝다.

안드레아는 후각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했으며, 예후르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미각이 예민해 약간의 고기 비린내도 못 견디는 차라는 한 발 더 나아가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까지 지녔다.

이처럼 사도들은 감각 중 하나가 굉장히 발달해 있다. 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 감각이 특별하지 않은 사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째서 누구는 청각이고, 다른 누구는 시각일까.

무엇이 그들의 차이를 결정할까.

“천사의 권능.”

예후르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권능이 들어온 감각 기관.”

그의 손끝이 페기의 귓가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이를테면 너에게 성흔을 남긴 천사 예리엘께선 너의 귀를 통해 권능을 불어넣으신 거지.”

페기는 반사적으로 귀를 감쌌다. 아주 오래전 카니나의 뒷골목에서 벼락처럼 내리쳤던 장중한 음악 소리가 떠올랐다. 천사의 음성이라 여겼던 그 소리가 내게로 떨어지던 천사의 권능이었나.

“사도의 각성은 천사의 권능을 내리받으면서 이루어져. 각성의 순간, 모든 사도들은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천사의 권능을 체감하지. 체감한다는 것은 곧 감각할 수 있다는 뜻이고, 이를 통해 천사의 권능이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온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어.”

“너도 권능을 체감했어?”

“물론.”

예후르가 옅게 웃었다.

“눈앞이 하얗게 부서지는 느낌이었어, 나는.”

페기는 가만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천사의 성흔마저 눈알에 찍혀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롱한 그의 금안을 보석보다 아름답다 칭송하는 것도 어쩌면 고귀한 권능이 서려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럼 내 청각이 예민한 것도 예리엘의 권능이 귀를 통해 들어왔기 때문이구나.”

낮게 중얼거리며 귓불을 매만지는 페기의 표정이 조금 착잡하게 물들었다.

예후르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차라가 간혹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를 꺼낸다면,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예민한 청각이 전부였다. 피아노를 연주할 때야 절대 음감이 유용했지, 손이 다 부서진 지금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예리엘께선 왜 하필 귀를 택하신 걸까. 다른 감각이었다면 적어도 짐승과 교감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을 텐데.”

페기가 고개를 숙이며 작게 웅얼거렸다. 그의 손이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는 것이 느껴졌다. 다정한 손길이었지만 우울한 감정이 가시진 않았다. 하필 천사 예리엘께서 귀를 택하신 탓에 첫새벽 새 우짖는 소리마저 기피해 온 그녀는 머잖아 용의 사나운 울음소리와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있었다.

“…참으로 무심하신 분이지, 예리엘께선.”

예후르의 속삭임이 깃털처럼 귓가에 내려앉았다. 지그시 입술을 깨물던 페기가 근심이 분분하던 마음을 어렵사리 다잡고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용을 보러 가야겠어. 난 지금까지 가까이서 용의 울음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으니… 조금이라도 익숙해져야지.”

말은 결연해도 멀리서나마 들었던 용의 울음소리를 떠올리니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려 왔다. 페기는 소름이 돋아난 팔뚝을 문지르며 꿋꿋이 예후르를 올려다보았다. 무섭고 끔찍해도 언젠가는 직면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자 예후르가 유순하게 눈썹을 늘어트리며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붙잡았다.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어.”

“무리해야지. 시험 꼭 통과해야 하잖아.”

“준비할 시간은 충분해.”

예후르는 페기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창가로 이끌었다.

“네가 짐승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명이 도는 건 청력이 예민한 탓도 있지만, 면역이 없는 탓도 커. 기억나니? 너 어릴 때 레오가 기르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듣고 경기를 일으킨 뒤로 짐승의 꼬리만 봐도 무섭다며 나한테 안겼잖아.”

페기는 그의 품속에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짐승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귀가 아픈 것도 무서웠지만, 귀가 완전히 망가져서 혹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게 되면 어쩌나 지레 겁을 집어먹었더랬다. 고통도 겪다 보면 익숙해진다는데, 그런 면에서 그녀는 완전히 젬병이었다.

“짐승을 복종시키는 건 쉬워. 차라처럼 목소리에 특별한 힘이 깃들지 않았더라도 짐승들은 으레 천사의 권능을 지닌 사도의 말에는 쉽게 복종하니까.”

예후르는 화려한 새장의 문을 열어 카나리아를 손등에 얹었다. 노란 카나리아는 그의 손등에 부리를 비비며 애정을 표현해 왔다. 따뜻한 눈길로 카나리아를 응시하던 예후르가 고개를 돌려 페기를 보았다.

“페기, 너에게 깃든 권능의 크기를 보건대 용을 복종시키는 건 크게 어렵지 않을 거야. 중요한 건 너의 목소리가 용에게 닿을 때까지 용의 울음소리를 견뎌야 하는 거고. 직접적으로 너의 고통을 경감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남은 시간 동안 고통을 참는 방법은 익힐 수 있어.”

“…….”

“그러니 작은 짐승부터 시작하자. 내가 도와줄게.”

그 말에 지금껏 가슴을 짓누르던 근심의 바윗덩이가 사라졌다. 페기는 한결 나아진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후르는 엷게 웃으며 탁 트인 창밖의 들판을 가리켰다.

“마침 사냥터가 근처야. 위험한 들짐승은 없으니 저기서….”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페기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창밖에 못 박혀 있었다. 한순간에 굳어 버린 것처럼 미소가 박제된 얼굴이 묘하게 이질적이다.

“…페기. 먼저 가 있겠니?”

“…….”

“곧 뒤따라갈게.”

말씨는 전에 없이 다정했으나 정작 그의 시선은 돌아오지 않았다. 페기는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깜빡임도 잊은 듯한 호박색 눈에서 일렁이는 열기가 어쩐지 섬뜩하게 느껴졌다.

페기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방을 떠났다. 예후르는 그녀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동상처럼 미동 않고 서 있었다. 그리고 방 안이 완전한 침묵에 휩싸이고서야 불현듯 발걸음을 뗐다.

저벅저벅 창가로 다가간 그가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울창하게 몸을 부풀린 정원수의 굵은 가지에 새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처럼 격정적인 금안이 맹렬하게 비둘기를 주시했다. 비둘기 역시 더없이 냉엄한 시선으로 그의 눈을 마주한다.

숨통을 옥죄는 정적이 곧 폭발할 것처럼 비대해지는 순간이었다.

“전하.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먼저 떠나시겠다고….”

느닷없이 벌컥 문이 열림과 동시에 비둘기가 퍼드덕거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예후르의 시선이 멀어지는 비둘기의 뒤꽁무니로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어리둥절하여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막시모가 순간 가슴이 철렁하여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먼저 노크를 해야 했는데….”

“…활을 준비해.”

“예?”

갓 벼린 검처럼 시퍼렇게 날이 선 시선이 막시모에게로 떨어졌다.

“사냥할 시간이다.”

숲속으로 발을 내딛기 무섭게 사방에서 바스락거리며 흩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페기가 흠칫하며 좌우를 둘러보았다.

“놀라지 마셔요, 전하. 기껏해야 토끼나 다람쥐일 거예요.”

마샤가 조그맣게 속삭여 왔다. 페기는 그제야 움츠렸던 몸을 살짝 폈다.

호위 기사들은 물론이요, 저보다 어린 마샤마저 태평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다. 사냥터의 덩치 큰 짐승들은 이미 용들이 다 잡아먹어 씨가 말랐다는 소식 덕분이었다. 페기는 그 말을 반 농담처럼 받아들였으나, 숲을 거니는 동안 단 한 마리의 사슴조차 발견하지 못하자 그 말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음을 깨달았다.

“듣기로 용은 하루에 소 한 마리씩을 먹는대요.”

어딜 가나 귀여움을 받는 특기를 살려 오만 소식을 주워듣고 다니는 마샤가 종알종알 이야기했다. 마샤는 그저 용의 어마어마한 식욕이 놀라운 듯했지만, 정작 페기는 조금 엉뚱한 상상을 했다.

첫 번째 시험에서 만날 용은 갓 알에서 부화한 새끼라고 했다. 그럼 말라비틀어진 나나 비올라로도 충분할까?

“어머, 전하! 토끼예요!”

갑자기 마샤가 양손으로 뺨을 감싸며 후다닥 튀어 나갔다. 페기는 그쯤에서 터무니없는 상상을 접었다. 일찌감치 사람 손을 탔는지, 어린 토끼 한 마리가 마샤의 발치에서 재롱을 피우고 있었다.

“아우, 귀여워라…. 전하! 전하도 이리 와서 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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