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4화 (214/328)

페기는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해가 중천이었다. 원탁회의를 위해 아침 일찍 나갔던 예후르조차 돌아오지 않은 마당에, 회의의 결과를 알리는 몬틸로 백작이 이토록 이른 시간에 도착했을 정도면 회의는 거의 시작하자마자 끝났다는 소리다.

“자신이 있다는 거겠죠. 그게 과연 사도라는 알비야 공작에 대한 믿음인지는 모르겠지만.”

페기가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소리에 몬틸로 백작이 냉소적으로 웃었다.

“퀴테리아 추기경은 타인에 대한 믿음 따위로 일을 그르칠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로 자신이 있다면, 용을 복종시킬 다른 방법을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다른 방법이 있나요?”

“훈련받지 않은 맨몸의 여자 혼자서요? 사막의 전사들이 듣는다면 절벽에서 뛰어내리라고 할 겁니다. 차라리 그 편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높을 테니까요.”

몬틸로 백작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기야 수백 년 가까이 재앙처럼 여겨지던 용을 백여 년 전에야 겨우 길들인 사막이었다. 그리 쉬운 방법이 있었다면 그토록 오랫동안 용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으리라.

백작은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페기는 그를 배웅하기 위해 저택의 로비까지 함께 나갔다. 떠날 준비를 마친 백작의 호위들이 현관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백작은 그중 가장 젊어 보이는 사내를 손짓으로 불러냈다.

“제 조카 녀석입니다. 몸 쓰는 일에 탁월하니 마음껏 부려 주십시오.”

“좋은 무기를 규중에서 썩힐 수야 있나요.”

“제 성의입니다. 부디 받아 주십시오.”

백작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페기는 백작의 조카라는 사내를 넌지시 훑어보았다. 사막인 특유의 짙은 피부색과 강렬한 눈빛. 금방이라도 모래바람 이는 사막으로 달려 나갈 것처럼 야성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사람이었다. 곁에 둔다면 필시 이런저런 말들이 떠돌 터.

페기는 싱긋 웃어 보였다.

“고맙게 받을게요.”

각 잡힌 자세로 경례한 백작은 호위들을 이끌고 저택을 빠져나갔다. 언덕 아래로 멀어지는 말의 뒤꽁무니를 응시하던 페기가 어깨를 감싼 숄을 여미며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백작의 조카라는 사내는 그때껏 현관 구석에 동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름이 뭐죠?”

묻는 소리에 사내의 고개가 슬쩍 들렸다. 그늘 속에서 드러나는 눈빛에 어쩐지 반항의 기운이 엿보였다. 하지만 페기의 눈이 가늘어지려는 찰나에 사내는 다시 순종적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라만입니다.”

“…좋아요, 라만. 앞으로 내 호위를 서도록 해요. 애나, 가서 머물 방을 안내해 드리렴.”

“예, 전하.”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하녀가 라만을 데리고 갔다. 그의 뒷모습을 못내 의심스럽게 주시하던 마샤가 득달같이 물었다.

“전하. 태도부터 불손한 저런 사람을 어찌 호위에 두려고 하세요?”

“그게 백작이 원하는 일일 테니까.”

“예에?”

“나마저 이스파갈족을 역병 든 환자처럼 멀리한다면, 백작이 어찌 나를 믿고 충성을 바칠 수 있겠니?”

“하지만….”

“걱정하지 말렴. 저 사람도 자신이 여기 남겨진 이유를 잘 알 테니까.”

페기의 태평한 말에 마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 아무래도 걱정이 가시질 않아요. 저런 불손한 자가 호위로 있는 걸 보시면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과연 어떻게 반응하실지….”

“…아.”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페기가 걸음을 멈추었다.

“설득할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네.”

몬틸로 백작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후르가 돌아왔다. 그를 맞이하기 위해 로비로 내려오던 페기는 호위 몇 명만을 대동한 단출한 인원을 보고 의아해졌다.

“클레멘스 추기경은? 같이 올 거라고 하지 않았어?”

외투를 하인에게 넘겨준 예후르가 단숨에 계단을 올라와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다녀왔어, 페기.”

“…응.”

페기가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웃음을 살짝 지은 예후르가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고 발걸음을 뗐다.

“클레멘스 추기경은 피아제 백작저로 갔어. 백작이 고발을 당했거든.”

“뭐?”

페기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심각한 일은 아니야. 백작이 집필한 소설에 반종교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건데… 백작이 라발의 대사로 성도에 온 지 4년이나 지나서야 고발이 된 걸 보면 누구의 수작인지는 빤하지.”

“…퀴테리아 추기경이구나.”

이시도르 피아제는 라발에서도 손꼽히는 문예가였다. 사람 심금을 울리는 서정시와 더불어 익살스러운 재치로 사회를 풍자하는 소설들이 인기가 많았다. 이미 세잔과 탐보프 등지로 번역서가 널리 퍼졌을 만큼 많은 이들의 손을 거친 글이 이제야 문제시될 리 없었다.

예후르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발의 명문 귀족이며, 무엇보다도 라발의 대사. 교국에서 직접적으로 처벌할 수 없는 인물이긴 하지만 당분간은 몸을 사리는 편이 좋겠지. 퀴테리아도 그것을 노렸을 테고.”

“피아제 백작은 이름난 마당발이잖아. 현재 성도에 모여 있는 각국 상류층들의 여론이 형성되는 것을 막으려는 걸까?”

본디 라발 사교계의 중심이었던 피아제 백작은 외교 대사로 임명되어 성도에 온 이후로도 활발한 사교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그가 정기적으로 여는 사교 모임은 근래 성도에서 가장 주목받는 회합으로, 지체 높은 귀족들이나 고위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비범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들도 대폭 포진해 있었다.

오죽하면 성도에서 인맥을 쌓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백작의 사교 모임에 초대받는 것이라고 할까.

페기는 며칠 전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하여 우리에게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겠노라 자신만만해하던 백작을 떠올리곤 작게 혀를 찼다.

“탐보프와 척을 지게 된 상황에서 라발은 절대 놓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우군이야. 그중에서도 피아제 백작은 클레멘스 추기경과 더불어 라발과 우리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두보지. 일시적이나마 다리 하나가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이제 퀴테리아는 클레멘스를 노릴 거야.”

예후르는 태연하게 대꾸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페기가 심각한 표정으로 따라붙었다.

“클레멘스 추기경은 여전히 성도의 시민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어. 우리가 나서서 그를 비호했다간 시민들과도 반목하게 될 거야.”

“맞는 말이야. 퀴테리아가 클레멘스의 허물을 잡아낼 수 있다는 가정하의 이야기지만.”

페기는 빙그레 웃는 예후르의 얼굴을 조금 멍하게 쳐다보았다. 느긋하게 소파에 앉은 예후르가 하녀에게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건네받았다.

“클레멘스가 요앙 오귀스트의 하수인으로 일하며 레오와 대립했던 기간이 장장 수십 년이야. 그동안 못된 짓을 저질렀다는 정황은 많았지만 하나같이 죄를 증명할 방도가 없었어. 그 오랜 시간 나와 레오도 잡아넣지 못한 사람인데 퀴테리아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니?”

페기는 그제야 순순히 수긍하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예후르가 그녀 몫의 찻잔을 손수 앞으로 밀어 주었다.

“클레멘스뿐만이 아니야. 지금쯤 청백회는 글리체리아와 도미시오, 심지어는 비밀 추기경으로 선정된 산딜라마저 탄핵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테니까. 다행히 고드릭이 잘 처리를 해 주어서 산딜라 추기경이 비밀 추기경으로 선정된 과정에는 별다른 법적 문제가 없어. 굳이 문제가 있다면 글리체리아나 도미시오일 텐데….”

글리체리아에겐 평생토록 놓지 못했던 가족과의 문제가, 도미시오에겐 과거 자잘한 청탁 문제가 남아 있었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아래턱을 매만지던 예후르가 곧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두 사람 모두 추기경 자리에서 당장 내쫓기엔 죄의 무게도, 여론의 집중도도 다소 떨어지지. 청백회 측에서 두 사람의 탄핵안을 제출한다 해도 당분간 치열한 법적 공방이 오갈 거야. 설령 탄핵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너와 알비야 공작의 시험이 끝난 이후일 테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페기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레오는 어때?”

예후르는 입술을 다물었다. 얌전히 눈을 내리깐 페기가 못내 초조한 기색으로 손끝을 문질렀다.

“혼절한 지 벌써 며칠째잖아. 의사는 이유를 모르겠다고만 하고, 언제쯤 깨어날 거라는 말도 없고….”

“…….”

“혹시 내가 그날 레오에게 심한 말을 해서 그런 거라면….”

“아니야.”

예후르가 단언했다. 페기는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야?”

“그래, 아니야.”

“그걸… 어떻게 그리 확신해?”

“…….”

“예후르.”

“레오가 쓰러졌을 때 비올라와 독대 중이었다는 고드릭의 증언이 있어.”

보랏빛 눈이 크게 뜨였다. 당황한 페기가 말을 더듬었다.

“그걸 왜 이제야….”

“무조건 비올라의 짓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어. 결정적인 증거가 없으니까.”

“그럼 공식적으로 조사를 해 봐야지.”

“글쎄. 굳이 일을 크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예상치 못한 대답에 페기는 말문이 턱 막혔다. 비스듬히 턱을 괸 예후르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사를 해서 증거를 찾아낸다 한들, 레오가 나중에 깨어나 비올라의 짓이 아니라고 말 한마디 하면 끝날 일이야. 레오의 성격을 잘 알잖아. 설령 비올라의 짓이었다 해도 제 손으로 딸을 벌주는 일, 그 사람은 절대 못 해.”

그리고 레오폴트의 증언으로 비올라가 풀려난다면, 도리어 그녀를 교황 살해 미수범으로 몰았던 페기와 예후르 쪽으로 역풍이 불게 되리라.

머릿속으로 자연스레 펼쳐지는 끔찍한 상황에 페기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트렸다.

“만약 비올라의 짓이 맞다면 단독으로 벌인 일일 거야. 그들에게 레오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비벼야 할 언덕인데, 그런 사람을 초장부터 싸움판에서 이탈시키는 악수에 퀴테리아가 동의했을 리 없으니까.”

예후르는 빈 찻잔에 뜨거운 찻물을 따라 냈다.

“좌우지간 우리로선 고마운 일이지. 손 안 대고 장애물을 처리한 격이니.”

“…뭐?”

멍하니 그의 말을 곱씹던 페기가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찻잔을 집어 든 예후르가 지극히 말간 낯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산딜라 추기경이었으니 망정이지, 레오였다면 기권에 표를 던졌을 거야. 그럼 너 혼자 시험에 처했을 거고.”

“…….”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최대한 늦게 깨어나길 바라는 수밖에. 산딜라 추기경이라고 다루기 쉬운 사람은 아니지만, 줏대 없이 갈팡질팡하는 교황은 이런 시국엔 없느니만 못한 존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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