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3화 (213/328)

고개를 꾸벅 숙인 수도사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무 밑에 설치된 네 개의 거대한 화로에서 끊임없이 엷은 재색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정원 위를 날아가던 새 한 마리가 갑자기 연기를 맡곤 비틀거리며 추락하자, 화로 곁을 지키던 수도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가 새를 확인했다.

봐도 봐도 신기하다는 듯 보나벤투라가 탄식했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도대체 저런 약초는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그저 하늘의 안배지요.”

퀴테리아가 겸손하게 대꾸했다. 정원에 모여 있던 수도사들의 시선이 온통 그녀에게로 쏠렸다. 그야말로 성상을 우러르듯 숭배하는 눈길이었다.

“과연 퀴테리아 추기경….”

“사도가 아무리 많으면 뭐 합니까. 예하 한 분에 미치질 못하는데.”

“위태로운 교회의 미래를 책임지실 분은 역시….”

퀴테리아는 수군거리는 소리들을 전혀 듣지 못한 사람처럼 태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마치 자신이 칭찬을 들은 것처럼 우쭐해진 야손이 그 뒤로 따라붙자, 조금 불편한 기색으로 그의 뒷등을 노려본 보나벤투라가 이내 발걸음을 뗐다.

그들은 미로처럼 얽힌 복도를 걸어 어느 후미진 방에 도착했다. 창문마다 굵은 창살을 격자로 박아 넣은 방은 한낮에도 초저녁처럼 어둑했다. 방 안에는 긴 책상이 있었는데, 초라한 행색의 수도사들이 무언가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야손은 그들 중 한 사람을 불러 자리에서 일으켰다.

“예하. 이자가 제가 전에 말씀드렸던 수도사입니다.”

“…아. 모사에 능하다는 그.”

퀴테리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야손의 거대한 체구 옆에서 더욱 왜소해 보이는 여자가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이봐. 얼굴을 보여 드려.”

야손의 속삭임에 여자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변함없이 무표정한 퀴테리아와 달리, 보나벤투라는 식겁하여 뒤로 자빠질 뻔했다. 심한 화상을 입었는지 여자의 얼굴이 흉측하게 얽어져 있었다.

야손이 큼큼 헛기침을 했다.

“이래 봬도 솜씨는 쓸 만합니다. 한번 보시죠.”

퀴테리아는 여자가 작업하던 종이를 넘겨받았다. 대부분 귀족 가문의 인장을 섬세하게 모사한 것이었는데, 둘 중 무엇이 진짜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감쪽같았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고행에 참여할 정도로 수련에도 열심이고, 머리도 제법 잘 돌아갑니다. 곁에 두고 부리시기 좋을 겁니다.”

보기보다 깐깐한 야손이 이 정도로 칭찬하는 인재는 드물었다. 퀴테리아가 물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게롯타입니다.”

여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던 퀴테리아가 미소를 지어 올렸다.

“수고해요, 게롯타.”

퀴테리아는 종이를 넘겨주곤 발길을 돌렸다. 수도사들의 작업실 안쪽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자, 비로소 안락한 회의실이 나왔다.

상석에 앉는 퀴테리아를 따라 보나벤투라와 야손이 각각 양측에 앉았다. 퀴테리아는 미리 준비되어 있던 찻주전자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이쯤이면 생각이 정리들 되셨을 텐데,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비밀 추기경 발탁 절차를 공식적으로 문제 삼아, 이번 원탁회의의 결정을 무효화해야 합니다.”

기다렸다는 듯 보나벤투라가 말문을 열었다.

“비밀 추기경 제도를 이런 식으로 사용했던 전례가 없습니다. 경전을 뒤져 보면 분명히 문제 삼을 만한 구절 두어 개쯤은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성하께서 비밀 추기경을 발탁하신 것이 4년 전입니다. 문제 될 만한 소지를 확인하지 않으셨을 리 없어요.”

“하지만 퀴테리아 추기경, 시도는 해 봐야 합니다.”

보나벤투라에게선 필사적인 기색마저 엿보였다. 고심에 잠겨 있던 퀴테리아가 야손을 돌아보았다.

“야손 수도사는 달리 할 말이 없으십니까?”

“보나벤투라 추기경 예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가능성은 낮지만 시도는 해 봐야지요. 그리고 산딜라 추기경에 대한 뒷조사를 한번 해 볼까 합니다.”

“산딜라 추기경을?”

“청렴하고 자비롭다 하여 명망 높으신 분인 줄은 압니다. 하지만 이번 비밀 추기경 건도 그렇고, 뒤에서 무슨 수작을 벌이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언제까지 교황 성하의 대리로 원탁을 지킬지 모르는 만큼 저희 쪽에서도 대비는 해 놓아야 하니까요.”

퀴테리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용할 수 있는 인력은 모두 경전 탐색으로 돌리되, 산딜라 추기경의 뒷조사는 야손 수도사에게 일임하겠습니다.”

“예하께선 어찌하실 겁니까?”

“나는 바스토뉴의 용병대와 접촉할 생각입니다.”

야손과 보나벤투라의 몸이 바짝 굳었다. 보나벤투라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모반을 일으키려는 겁니까?”

뜻밖의 말에 눈을 크게 뜬 퀴테리아가 이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반은 이릅니다. 성궁 안팎의 여론이 아직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엘피도 공작 측에는 용이 있으니까요. 만반의 준비 없이 군대를 일으켰다간 도리어 우리가 죽게 됩니다.”

“그럼 용병대는 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야지요.”

편하게 등을 기대며 말하는 퀴테리아는 짐짓 여유로워 보였다. 갈등하던 보나벤투라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퀴테리아 추기경. 지금 우리는 큰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알비야 공작 전하께서 불을 피우지 못하시는 이상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에 하나 증인이 되살아난 카타리나 공작이라 한들, 불을 피우지 못하여 죽었던 사도가 지금이라고 다르겠습니까.”

“하지만 만약의 일이란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럼 불을 피우기 전에 상대를 무너트리면 그만이지요.”

보나벤투라의 입이 다물렸다. 퀴테리아는 차분한 손길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어차피 시험은 여러 단계로 치러질 겁니다. 누가 진정한 사도인지를 가르는 전대미문의 시험이 단 한 차례로 끝날 리 없으니까요. 자연히 불을 피우는 것은 가장 마지막 시험이 될 것이며, 그 전에 우리가 엘피도 공작의 세력을 무너트리면 그만입니다.”

“…….”

“그리고 그 완벽하신 사도야말로 우리 청백회가 대적하게 될 가장 위협적인 상대겠지요.”

야손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자만 처리하면 우리의 승리겠군요.”

“역경 뒤에 기쁨이 있노니.”

보나벤투라는 오래된 경전의 구절을 읊조리며 경건히 기도를 올렸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퀴테리아가 찻잔을 입술에 붙였다.

“우리는 수사의 예후르의 시체를 밟고 승리의 나팔을 불게 될 것입니다.”

***

“카타리나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몬틸로 백작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조아렸다. 페기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그의 인사를 받았다.

“다시 만나 반가워요, 백작.”

“…저 역시 전하를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그동안 청백파로부터 받았던 압박이 어지간했는지 백작은 못 본 새 많이 늙어 있었다. 초췌해진 얼굴은 더 이상 이스파갈족의 젊은 족장이란 칭호가 어울리지 않을 성싶었지만, 죽을 고비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처럼 두 눈만은 기운차게 번뜩였다.

“전하께서 등장하신 이후로 저희 이스파갈족을 추방해야 한다는 주장이 잠잠해졌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받을 일이 아니에요. 그대들을 위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전하께서 저희 이스파갈족을 구하셨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받아만 주신다면 앞으로 전하를 위해 저희의 모든 역량을 바치겠습니다.”

말하는 투가 제법 결연했다. 페기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움을 모르는 사막의 전사들과 용 기병대는 교국을 수호하는 창이요, 방패입니다. 그간 그대들이 겪었던 억울한 오욕과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노고를 내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니, 부디 앞으로도 지금의 자리에서 본분을 다해 주길 바랍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보인 몬틸로 백작이 품에서 서신을 꺼내 공손하게 내밀었다.

“오늘 공식적으로 찾아뵌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페기는 서신을 받아 펼쳤다. 원탁의 이름으로 알리는 시험의 고지였다.

“전하께서는 앞으로 알비야 공작 전하와 함께 누가 진정한 천사 예리엘의 사도인지 가르는 시험에 드실 겁니다. 시험은 총 세 단계로 이루어질 것이며, 더 많은 시험을 통과하신 분께서 진정한 사도라는 인정을 받으시게 됩니다.”

“…….”

“그리고… 탈락한 분께서는….”

몬틸로 백작이 난감한 기색으로 어물거리자, 페기가 태연하게 받아쳤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요. 어떻게 될지는 잘 아니까.”

“…….”

“그보다 다른 사람이 아닌 그대가 직접 왔다는 건 첫 번째 시험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겠죠?”

페기는 서신을 접고 몬틸로 백작을 보았다.

“사도가 자신의 권능을 증명하는 방법으로는 보통 맨손으로 불을 피우는 것을 떠올리지만, 사실 생각만큼 정확한 방법은 아니에요. 어느 날 새로 분하신 천사께서 성흔을 찍고 가셨음에도 불을 피우지 못하는 사도들이 있으니까요.”

사도들만의 고유한 특성은 단순히 맨손으로 불을 피우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신체 한 군데에 찍히는 새 발자국 모양의 성흔, 혹은 짐승과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 역시 사도만이 보이는 특징이었다.

“이렇게 백작의 얼굴을 보니 첫 번째 시험은 용과 소통이라도 하라는 건가 보네요.”

“기민하시군요.”

백작은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뗬다.

한 천사의 사도가 동시에 두 명이 존재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 가능한 한 많은 방법을 통해 진실을 가려내는 것이 당연했다.

“짐작하셨듯이 첫 번째 시험은 용을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아무런 도구 없이 맨몸으로 시험장에 들어가실 것이며, 용의 움직임을 봉쇄할 최소한의 쇠사슬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안전장치도 준비되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선 오로지 본인의 능력으로 용을 제압하셔야 합니다.”

“제압?”

“말이 제압이지, 짐승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사도의 능력이 아니라면 십중팔구 실패할 시험입니다. 아무리 숙련된 교관이라 하여도 맨몸으로 용을 제압하기는 불가능하니까요.”

페기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가만히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시험의 공정성을 위해 곧 알을 깨고 나올 어린 용이 사용될 것입니다. 성체에 비하면 파괴력이 낮으나, 교육이 되지 않은 완전한 야생 상태라는 점을 주의해 주십시오. 저희 경비대 소속의 용 기병대 단원들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시험장 외곽에 배치될 예정이지만, 갓 태어난 용은 가볍기에 더욱 빠릅니다. 짐승과의 소통에 자신이 없으시다면 차라리 기권을 하는 것이 목숨을 부지하시는 선택이 될 것입니다.”

“…….”

“여기까지가 알비야 공작 전하께도 동일하게 전달 드린 사항입니다.”

몬틸로 백작은 깍지 낀 손을 무릎에 걸치며 상체를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엘피도 공작 전하께 듣기로, 알비야 공작은 사도로서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더군요.”

페기가 내리깔려 있던 눈을 들었다.

“…예후르의 말이라면 맞겠죠.”

“그렇다면 더더욱 이상한 일이지 않습니까? 오늘은 첫 시험의 종목을 정하는 첫 번째 원탁회의였습니다. 엘피도 공작 전하의 말씀에 따르자면 알비야 공작은 짐승과 소통할 수 없을 텐데, 어째서 퀴테리아 추기경은 용을 복종시키자는 의견에 선뜻 동의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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