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2화 (212/328)

산딜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못 순진하게 들리는 투로 대꾸했다. 안드레아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귀엽게 말씀하시긴.

“우리 편 들어 준 거 보면 댁도 알비야 공작인지 뭔지가 꽤나 언짢았던 거 아니야? 아무튼 우리 영감님 언제 깨어나실지도 모르는데 그때까지 잘 좀 부탁한다고요.”

“그만해, 안드레아.”

예후르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끼어들자, 안드레아가 눈매를 사납게 세웠다.

“뭘 그만해야. 앞으로가 더 중요한 거 몰라? 이럴 때일수록 사이를 돈독히 해 둬야지.”

“그런 말 통하는 상대 아니니까 그만하라고.”

그제야 안드레아가 멈칫하며 산딜라를 돌아보았다. 산딜라는 변함없이 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산딜라 추기경, 오랜만에 뵙습니다.”

예후르가 정중히 건네는 인사에 산딜라도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안녕하세요, 엘피도 공작 전하. 사실 전 3년 전 성촉절에서 전하를 뵈었답니다.”

“꼴불견이었겠군요, 그때는.”

“잘 아시는 분이 어째서 그러셨을까.”

산딜라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호호 웃었다. 해괴하게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안드레아는 3년 전 성촉절에서 예후르가 천사 미할리나의 성상을 베었다는 풍문을 기억해 냈다.

“지금까지 그러셨듯 교황 성하께선 곧 깨어나시리라 믿어요. 저의 이 과분한 짐도 그때는 내려놓을 수 있겠지요.”

“성하의 선택이 그대라 다행입니다.”

“어머나? 제가 전하의 반대편에 서는 날에도 그리 말씀하실까요?”

산딜라의 감긴 두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오늘 전하의 편을 들어 드린 건 성하의 뜻도 있거니와, 그 방법만이 지금의 혼란을 수습할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이었어요. 시간 끌 것 없이 누가 천사 예리엘의 진정한 사도인지만 밝혀낸다면 증인의 정체도 자연스레 확정될 테니까요.”

“증인은 페기가 맞습니다.”

“전하의 눈을 믿어요. 또한 마가 공작 전하와 교황 성하의 선택도요.”

“…….”

“하지만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4년 전 그분께서 어떤 죄목으로 돌아가셨는지.”

안드레아의 표정이 즉각 굳었다.

“진정한 천사 예리엘의 사도는 페기야. 되살아난 거 보면 몰라? 사도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기적을 펼쳐?”

“그거야 모르는 일이죠.”

“젠장, 얘 눈을 믿는다며! 이 새끼… 얘가 설마 거짓된 사도를 데려왔을까 봐?”

“물론 엘피도 공작 전하의 눈을 믿어요. 하지만 전하께서 진실만을 말씀하시리라고는 선뜻 믿을 수가 없군요.”

안드레아의 입이 덜컥 다물렸다. 시종일관 잔잔한 산딜라의 미소가 어쩐지 조금 선득하게 다가왔다.

“엘피도 공작 전하. 탐보프 내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고 들었어요.”

두 눈 감긴 얼굴이 예후르를 향했다. 그는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필요한 희생이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

“대답이 없으시네요.”

“그대라면 능히 거짓을 꿰뚫을 테니까.”

예후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산딜라는 마치 새처럼 웃었다.

“꿰뚫어 보시는 건 전하지요. 저는 그저 얄팍한 눈치로 알아차리는 것이고.”

산딜라는 고드릭의 팔에 손을 올리곤 지팡이를 쥐었다.

“전하. 저는 훌륭한 성직자의 자질은 머리가 아닌 가슴에 있다고 생각해요. 몸소 빈자들을 살피고 병자들을 구제했던 수많은 성인들처럼요.”

“…….”

“부디 좋은 사도가 되어 주세요.”

작달막한 키의 추기경이 고드릭의 부축을 받아 멀어져 갔다. 물끄러미 그 뒷모습을 응시하던 안드레아가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얼마 만에 들어 보는 설교냐?”

“…아마도 처음?”

“미친 새끼.”

“도미시오 추기경! 거기 서십시오!”

클레멘스가 귀신처럼 눈을 홉뜬 채 복도를 내달렸다. 그에 앞서 죽기 살기로 달리던 도미시오는 갑자기 모퉁이에서 툭 튀어나온 발에 걸려 우당탕 넘어지고 말았다.

안드레아가 손을 털며 느긋하게 모퉁이에서 걸어 나왔다.

“서라면 얌전히 설 것이지. 꼭 이렇게 사람을 귀찮게 만든다니까.”

아픈 무릎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던 도미시오 추기경의 얼굴이 금세 하얗게 질렸다. 안드레아는 네 발로 달아나려는 그의 목덜미를 콱 잡곤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어이, 형씨.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기나 해?”

안드레아가 얼굴을 들이밀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꼭 유령을 맞닥뜨린 것처럼 힉힉 숨만 들이켜던 도미시오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저, 저, 저는 해, 해야 할 일을 한 거, 겁니다!”

“해야 할 일? 네가 할 일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얌전히 거수기 노릇이나 하는 거야. 이게 어디서 분수에도 안 맞는 말을 하고 있어?”

“아… 그, 그게….”

멱살을 내준 도미시오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비처럼 쏟아졌다. 불안하게 눈을 굴리던 그는 슬그머니 안드레아의 곁으로 다가오는 클레멘스를 발견하곤 황급히 목청을 높였다.

“크, 클레멘스 추기경! 그대가 그러면 안 되지요!”

“내가요?”

“예, 그, 그래요, 당신! 당신 말입니다! 어, 어찌 폐하의 지엄한 명을 거역하실 수가 있어요!”

“폐하의 명…?”

클레멘스가 도저히 모르겠단 얼굴을 했다. 속에 맺힌 것이 많은 도미시오가 다다다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오죽 답답하셨으면 내게 밀서를 다 보내셨겠습니까! 그대가 위스누아와 척을 지지 말라는 폐하의 명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며 몹시 분노해 계십니다! 그러잖아도 건강이 쇠하여 요양 중이신 폐하를 어찌 그리도 못살게 구시는 거냔 말입니다!”

“도미시오 추기경. 간밤에 꿈이라도 꾸신 겁니까? 위스누아와 척을 지지 말라니, 폐하께서 언제 그런 명을 내리셨다고요?”

“예…?”

도미시오가 어리벙벙하게 눈을 껌벅였다. 클레멘스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지금 라발은 위스누아 상단의 통행세 문제로 몇 년째 골치를 앓고 있습니다. 리누스 도시 연맹 전체에 대한 본보기로 위스누아 상단에게 통행금지 조치를 내려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는데, 위스누아와 척을 지지 말라니요. 나 참.”

“하, 하지만 분명 폐하의 인장이 찍힌 밀서를 받았는데….”

“그 밀서, 지금 어디 있습니까?”

안드레아의 등 뒤에서 예후르가 걸어 나왔다. 도미시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거야 제 사저에….”

“가죠.”

클레멘스와 눈짓을 주고받은 예후르가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안드레아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도미시오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고 갔다.

도미시오는 당장 밀서를 내놓지 않으면 그 반듯한 콧대와는 영영 이별이라는 안드레아의 협박을 듣고서야 죽상으로 밀서를 갖고 왔다. 밀서를 받자마자 유심히 들여다보던 클레멘스가 붉게 찍힌 날인을 손끝으로 튕겼다.

“가짜입니다.”

“예, 예?!”

도미시오가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이 놀랐다. 클레멘스는 친절하게 인장의 테두리를 지적해 주었다.

“끄트머리에 덩굴무늬 보이십니까? 폐하께서 개인적으로 사용하시는 인장 반지에는 이 덩굴무늬가 상당히 흐릿합니다. 아시다시피 폐하의 인장은 세잔 갈루아 왕가의 유물인데, 세잔은 라발처럼 주조술이 크게 발달하진 못했거든요.”

“그, 그럼 이건 도대체….”

도미시오가 망연자실한 눈으로 거짓 밀서를 바라보았다. 예후르가 물었다.

“도미시오 추기경. 이 밀서는 어떻게 받은 겁니까?”

“폐하의 전서응이었습니다. 훈련된 매를 사용하는 건 라발의 황실뿐인지라 추호도 의심치 않았는데… 아, 아직 하인들이 돌보고 있을 겁니다! 오랜 시간 날아와 많이 지친 듯 보였거든요.”

도미시오의 명령에 곧 하인이 새장을 들고 왔다. 예후르는 조심스레 새장을 열어 매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도미시오의 말대로 매는 새장에 늘어져 지친 눈만 끔벅이고 있었다.

“…무언가에 중독된 듯합니다.”

“중독이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꽤나 강력한 물질인 것 같군요.”

“웬일이냐? 네가 모르는 것도 다 있고… 야, 잠깐. 이게 대체 무슨 냄새야?”

시시껄렁하게 웃던 안드레아가 갑자기 인상을 구기며 코를 움켜쥐었다. 클레멘스가 의아한 기색으로 코를 킁킁거렸다.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요?”

“아무 냄새도 안 나긴, 아주 진동을 하고 있는데….”

안드레아는 새장 근처를 맴돌며 코를 찡긋거렸다. 예후르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계속 무슨 냄새가 난다고 하지 않았나?”

“너도 몰라? 아주 성도 전체에서 풀풀 풍기고 있잖아! 그 어디냐, 원탁회의 할 때도 요상한 냄새가 나더구만.”

안드레아가 욕설을 중얼거리며 하인에게 손짓해 새장을 물렸다.

“어찌 됐든 간에 문제야. 시궁창 냄새도 아니고 도대체 이게 무슨 냄새인지… 젠장, 짜증 나!”

홧김에 의자를 걷어찬 안드레아가 씩씩거리며 방을 빠져나갔다.

진지한 얼굴로 입가를 감싸 쥐고 있던 예후르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서 깊은 건물들이 늘어선 성도의 시가지 사이로 우뚝 솟은 퀴테리아의 저택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퀴테리아의 마차는 그야말로 장례를 앞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원탁회의의 소식을 듣고 울분을 터트리려던 야손조차 퀴테리아의 제지를 받곤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불편한 침묵을 껴안고 거리를 내달리던 마차는 곧 퀴테리아의 사저에 이르러 속도를 줄였다.

위스누아의 부유함이 돋보이는 이 거대한 저택은 본디 인접한 네 개의 건물을 개조한 것이었다. 일단은 퀴테리아의 명의로 되어 있지만, 실상은 청백회의 거점으로, 갈 곳 없는 청백회 단원들의 숙소 겸 수련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퀴테리아와 보나벤투라, 야손을 비롯한 청백회 간부들이 줄줄이 마차에서 내리자, 마당을 쓸던 청백회 단원들이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퀴테리아는 간부들을 이끌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쥐 죽은 듯 적요하던 저택은 진입할수록 비명과 신음 소리가 들끓었다.

“조시마 수도사. 고행으로 지나치게 몸이 상한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고 오세요.”

“알겠습니다.”

퀴테리아의 명령에 한 수도사가 모퉁이를 꺾어 사라졌다.

남은 사람들은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느 순간 비명이 멀어진다 싶더니, 눈부신 햇살과 함께 엷은 탄내가 드리워졌다. ㅁ 자 형태의 폐쇄적인 구조로 건설된 저택 한가운데에 조성된 비밀 정원이었다.

퀴테리아는 고개를 들어 중앙에 심긴 거대한 고목을 올려다보았다. 정원을 뒤덮을 듯 울창한 나뭇잎들 사이사이로 가을 햇살의 조각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람하게 뻗은 나뭇가지마다 수많은 새들이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추기경 예하!”

나무 아래에서 열심히 불을 피우던 수도사가 환한 낯으로 달려왔다. 퀴테리아가 인자하게 물었다.

“별일 없었습니까?”

“그럼요. 참, 오전 중에 탐보프 측 전서구를 한 마리 발견했습니다.”

수도사가 작게 말린 종이를 공손히 내밀었다. 퀴테리아는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쳐 보았다.

“보시다시피 전부 암호라서 해석하는 데는 시일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내용은 필사해서 따로 보관해 두고, 이건 다시 전서구에 묶어서 날려 보내십시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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