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드릭은 긴 소매 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들었다. 펼쳐지는 양피지를 보며 추기경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나 교황 레오폴트 6세가 명하건대, 지금 이 시간부로 나를 대신할 비밀 추기경을 선포하니 원탁은 그이를 나의 대행으로 모시라.”
“비밀 추기경…?”
솔란지아가 아연하게 중얼거렸다. 퀴테리아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항변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통보입니다. 게다가 비밀 추기경이라니요. 그대의 말을 어찌 신용한단 말입니까?”
“성하께선 이미 4년 전에 법적 절차를 밟아 비밀 추기경을 선정해 두셨습니다. 교황 성하와 비밀 추기경이신 그 당사자, 당시에 비공식적으로 안건을 처리했던 극소수의 실무진들만이 알고 있었던 사안입니다.”
고드릭이 문가를 향해 몸을 반쯤 돌렸다.
“그럼에도 의심이 들거든 한번 확인해 보시지요.”
모두의 시선이 열린 문을 향했다. 누군가 수도사들의 안내를 받아 회의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분이 바로 원탁에서 교황 성하를 대신할 비밀 추기경.”
작은 발이 문턱을 넘는다.
“캄페지오의 대주교이신 산딜라 추기경이십니다.”
지팡이를 짚고 선 작달막한 여자가 방긋 웃어 보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여러분.”
장내에는 아득한 적막만이 흘렀다. 예상치 못한 상황, 예기치 못한 인물의 등장은 물밀 듯한 아연함을 몰아왔다.
산딜라는 차마 아무런 말도 못 하는 동료 추기경들을 지나 원탁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가장 상석인 교황의 자리를 앞에 두고 조금 머뭇거렸는데, 아무래도 교황의 자리를 점하기는 부담스러운 듯했다.
“앉으셔야 합니다, 추기경 예하.”
고드릭의 엄격한 목소리에 산딜라는 하릴없이 교황의 자리에 앉았다. 좌중의 찌를 듯한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였다. 보이지 않기에 도리어 감각이 예민함에도 그녀는 그저 속없이 웃고만 있었다.
고드릭이 빳빳한 종이 한 장을 원탁에 올렸다.
“산딜라 대주교를 비밀 추기경에 임명한다는 성하의 명령서입니다.”
추기경들은 차례로 임명장을 돌려 보았다. 교황의 인장을 비롯하여 토씨 하나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날인이 된 날짜를 보면 4년 전 여름인데, 이런 중차대한 사안이 지금껏 비밀리에 유지되었다는 것이 그저 경악스럽기만 했다.
고드릭이 뒷짐 지고 선언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지금 이 시간부로 산딜라 추기경께선 원탁에 한해 교황 성하의 모든 권한을 대행하시게 됩니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전례가 없는 일이지 않소!”
보나벤투라가 경악한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고드릭이 매섭게 반문했다.
“지금 교황 성하의 지엄한 명보다 전례를 먼저 따지시는 겁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원탁에선 이미 결정이 내려졌다는 말이오!”
“한 표 차이로 갈렸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교황 성하의 대행이신 산딜라 추기경의 선택으로 뒤집힐 수도 있는 결과지요.”
원탁의 투표 결과가 동률일 시, 교황의 선택이 우선권을 갖는다. 이는 천계율에도 명시된 원탁의 기본 원칙 중 하나였다.
보나벤투라는 이를 꽉 깨물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다 된 일에 찬물을 끼얹은 격이었다. 산딜라의 선택에 그간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수가 있었다.
그는 황급히 퀴테리아를 돌아보았다. 골똘히 턱을 매만지던 퀴테리아가 힐끗 그에게 눈짓을 주었다. 보나벤투라는 울컥 치솟는 역정을 다스리며 철퍼덕 제자리에 앉았다.
사위가 조용해지길 기다리던 산딜라가 그제야 말문을 열었다.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여쭙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하던 산딜라가 퀴테리아가 앉아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증인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고 하셨는데, 어떤 방식으로 증인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을까요?”
“방법이야 많겠지요.”
“예를 들자면요?”
퀴테리아가 설핏 미소를 머금었다.
“사견으로는 종교 재판에 넘기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봅니다.”
잠시 좌중이 술렁였다. 산딜라는 변함없이 웃는 낯으로 질문을 이어 갔다.
“어째서 종교 재판에 넘기는 것이 가장 타당한가요?”
“가장 명확하게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요. 죽음에서도 돌아온 사도라면 불타는 숯 위를 걷는 것쯤이야 손쉽지 않겠습니까?”
클레멘스가 불편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아주 그분을 망가트리지 못해 안달이 나셨군.”
“더 궁금하신 사항이 있습니까, 산딜라 추기경?”
퀴테리아의 물음에 산딜라는 산뜻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요, 충분합니다.”
“그러면… 이만 결정하시지요.”
초조하게 다리를 떨던 보나벤투라가 넌지시 말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산딜라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종교 재판은 천 년 전의 사도 로살레다께서 기획하신 제도입니다. 종교인과 종교적인 사건을 세속에 맡기지 않겠다는 강고한 뜻을 섬겨 지금까지도 명맥을 이어 오고 있지요. 그렇기에 이번 사안을 종교 재판에 넘겨야 한다는 퀴테리아 추기경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
“하지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의견에는 반대를 표할 수밖에 없겠군요.”
원탁에 놓여 있던 솔란지아의 손이 급격하게 오므라들었다. 퀴테리아가 침착하게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첫 번째 이유는 종교 재판의 방식에 있습니다. 너무 잔인해요.”
“잔인하다 뿐입니까, 아주 원시적이기 짝이 없습니다.”
클레멘스가 진저리를 치며 말을 보탰다. 작게 웃은 산딜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클레멘스 추기경의 말씀이 거칠지만 공감하는 바입니다. 종교란 결국 이 험한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천사의 뜻에 따라 바른길로 인도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이끌어야 하는 우리가 먼저 그들을 사람으로 대해 주어야지요.”
종교 재판은 여타 다른 세속 재판과는 궤를 달리했다. 광신적인 재판관들은 진실을 확인한다는 구실로 고문을 가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죄질의 경중이나 결백 여부와는 무관하게 일단 종교 재판에 들면 사지가 망가져서 돌아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마저 죽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증인은 4년 전에 돌아가셨던 카타리나 공작 전하일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카타리나 공작 전하이실 수도 있는 분께 무작정 종교 재판의 가혹한 방식을 적용하자는 의견에는 도저히 동조할 수가 없군요.”
“명색이 되살아난 사도라면 종교 재판쯤은 수월하게 넘겨야지요!”
“툭하면 종교 재판 운운하시는 우리 보나벤투라 추기경께서 먼저 모범을 보이시든가요, 그럼.”
“뭐, 뭐요?!”
보나벤투라가 눈을 부라리며 클레멘스를 노려보았다. 검은 눈에 살기가 진득했으나 클레멘스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산딜라 추기경. 종교 재판에 반대하는 두 번째 이유는 무업니까?”
“더 나은 방식이 있습니다.”
산딜라가 소녀처럼 웃었다.
“내 교구인 캄페지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내가 보살피고 있던 고아들 중 한 명의 아비라 주장하는 사내가 나타났지요. 아이는 부모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사내가 아이에게 보이는 애정이 워낙 각별하여 나조차 껌뻑 넘어갈 뻔했습니다.”
“…….”
“그때 아이가 태어난 마을에서 오랫동안 일하셨던 사제 한 분이 우연히 캄페지오에 들르셨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는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사내와의 독대를 청하신 그분은 고작 말 몇 마디로 사내가 거짓말쟁이임을 간파해 내셨습니다. 당신이 알던 아이의 아비 되는 사람은 말꼬리를 길게 늘이는 남쪽 지방 사투리를 썼다면서요.”
솔란지아는 초조하게 입가를 감싸 쥐었다. 예감이 좋질 않았다.
“이 일화를 그대로 적용하자면, 본디 카타리나 공작 전하와 잘 어울려 지내셨던 사도분들의 판단이 가장 옳을 것입니다. 증인을 데려오신 엘피도 공작 전하와 그에 동조하시는 마가 공작 전하를 보면 이미 결과는 나온 듯하지만요.”
“어찌 그런 얼토당토않은 발언을…! 아무나 닮은 사람을 데려오신 건 줄 누가 압니까! 이 모두 알비야 공작 전하를 견제하기 위한 자작극이라면요!”
“설령 그렇다 해도 걱정하실 이유가 있나요? 두 분 중에 누가 진정한 사도인지 곧 가려내게 될 텐데요. 겉모습만 닮아서는 감히 사도의 권능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보나벤투라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그동안 잠잠하던 퀴테리아가 나섰다.
“알비야 공작 전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비둘기로 분하신 천사 예리엘의 성흔을 받았습니다. 전례가 없는 일이지요. 그런 분을 정체도 불확실한 증인과 함께 시험대에 올린다는 것 자체가 그분의 위신에 커다란 해가 된다는 것을 진정 모르시겠습니까?”
또박또박 울리는 목소리가 엄중했다. 그녀의 반론을 이해한다는 듯 산딜라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비야 공작 전하께는 몹시 송구한 일임을 압니다. 하지만 나는 그저 교황 성하를 대리할 뿐이라는 것을 알아주세요.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성하의 뜻을 대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하의 뜻이라면….”
술렁임이 번졌다. 산딜라는 고개를 살짝 틀어 고드릭을 보았다.
“고드릭 수도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근위대와 하녀들이 진술하길, 어제 비공식적으로 증인과 대면하신 이후 성하께서 돌아가신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성함을 수차례 부르짖으셨다고 합니다.”
“산딜라 추기경의 말씀이 맞습니다. 증인과 대면하시는 동안과 그 이후에도 성하께선 증인의 정체를 의심하신 바가 전혀 없습니다.”
고드릭의 증언에 보나벤투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산딜라는 깍지 낀 양손을 원탁에 올렸다.
“성하께 증인은 이미 카타리나 공작 전하입니다.”
“…….”
“그렇기에 나 역시 성하의 뜻을 존중하여, 증인을 돌아가신 카타리나 공작 전하로 인정합니다.”
솔란지아가 절망적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또한 알비야 공작 전하와 카타리나 공작 전하 두 분 중 누가 진정한 천사 예리엘의 사도인지 엄격한 시험에 부쳐야 할 것을 주장하며, 교황 성하의 대리인으로서 사감 없는 한 표를 행사했음을 나의 수호천사이신 심연의 천사 이슬라의 이름에 대고 맹세합니다.”
산딜라가 턱 아래서 양손을 맞잡으며 경건한 기도를 올렸다. 이제 원탁을 휘어잡은 것은 무거운 침묵이었다. 등받이에 편안히 몸을 기댄 클레멘스가 느른한 미소를 머금었다.
“비로소 원탁의 뜻이 하나로 모였군요.”
드르륵!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보나벤투라가 잔뜩 벌게진 얼굴로 회의장을 뛰쳐나갔다. 퀴테리아가 무섭게 굳은 얼굴로 그 뒤를 따랐으며, 솔란지아는 머뭇거리며 말을 걸려는 글리체리아를 냉랭하게 외면했다. 황급히 도망치는 도미시오 추기경을 쫓아 클레멘스도 재빨리 복도로 달려 나갔다.
고드릭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는 산딜라에게로 안드레아가 건들거리며 다가갔다.
“뉘신진 몰라도 덕분에 우리가 이겼네.”
“어머? 원탁에는 이기고 지는 것이 없답니다. 결국에는 모두가 교회를 위한 신심에서 비롯된 의견이니 모두의 승리요, 모두의 패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