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0화 (210/328)

클레멘스가 너스레를 떨듯이 말했다.

“사상 초유의 사태이니만큼 여러 말도 안 되는 헛소문들이 떠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사막의 술법으로 죽은 시체를 되살렸다는 말도 있고, 돌아가신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숨겨진 쌍둥이를 데려왔다는 얼토당토않은 말도 있습니다. 아, 그리고 조금 다른 얘기지만 성하께서 비밀 추기경을 지정해 두셨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비밀 추기경이요?”

예후르가 의아하게 물었다. 비밀 추기경이란 여러 가지 사유로 인해 공식적으로 임명을 선포하지 못한 추기경을 말했다.

“보통은 추기경임이 알려질 시 신변의 위협을 느낄 수 있는 위험 지대의 주교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지요. 소문으로는 다그마르 산맥에서 봉사하시는 분들 중 한 명이지 않겠느냐 하지만… 그다지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지요. 요새 바스토뉴의 족장이 교회에 꽤나 호의적이지 않습니까?”

하물며 바스토뉴의 용병대가 교국을 수호하는 경비대가 될 것이냐 말 것이냐로 한창 시끄럽던 와중이었다. 다그마르 산맥에서 추기경이 나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커다란 경사일 것인데, 구태여 지금 이 시점까지 비밀로 둘 이유가 없었다.

“다그마르 산맥은 아직 정식 교구로 지정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만약 다그마르 산맥에 비밀 추기경을 두셨다면 단순한 명예직으로, 험지에서 봉사하는 성직자들의 의욕을 북돋아 주기 위함이셨을 텐데…. 그대의 말대로 굳이 지금까지 비밀로 두실 이유는 없을 것 같군요.”

“일단은 그저 소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흘려들으시지요.”

클레멘스의 조언에 예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예후르의 수하였다. 그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내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알아본 결과, 지난밤 성하께서 또다시 혼절하셨다고 합니다.”

“…뭐?”

예후르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어제 오후에 깨어나셨을 때는 경과가 좋다고 하지 않았나?”

“예. 어제 진찰 결과는 좋았습니다만…. 갑자기 상태가 악화된 이유는 아직 오리무중이라고 합니다.”

예후르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가를 감싸 쥐었다. 클레멘스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성하의 병환이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반복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거야 일정 주기를 두고 반복되었을 때의 이야기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렇게 급작스레 나빠지실 리가….”

눈을 감은 예후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일단은 시간이 되었으니 원탁회의에 참석하도록 하죠. 막시모, 너는 성하의 상태에 대해 은밀히 조사해 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막시모가 다른 수하와 함께 방을 빠져나갔다. 예후르와 클레멘스의 자색 의복이 깃발처럼 펄럭이며 문 너머로 사라졌다.

원탁이 있는 성궁의 중앙관은 며칠째 싸늘한 분위기만이 감돌았다. 특히 원탁회의가 있을 때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으니, 회의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인적이 없었다.

글리체리아는 고요한 복도를 홀로 걷고 있었다. 떠오르는 해가 건너편 건물의 지붕 위로 고개를 내밀며 햇살을 쭉 드리우고 있었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 회의장으로 진입하려던 글리체리아는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솔란지아와 마주쳤다.

“잠깐… 이야기 좀 나누시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솔란지아가 휘청거리며 등을 돌렸다. 결국에 올 것이 왔구나. 글리체리아는 질끈 두 눈을 감곤 솔란지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막다른 복도에 이르러 솔란지아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일전에 나를 찾아오셔서 하셨던 말씀, 기억하십니까?”

“…….”

“미약한 힘이나마 나를 도울 수 있다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그 말을 믿고 퀴테리아에게 그대를 추천했고요.”

글리체리아는 말없이 시선을 피했다. 솔란지아는 어쩐지 초연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며칠 전, 퀴테리아로부터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퀴테리아는 그대가 일찌감치 엘피도 공작 전하와 뜻을 함께하고 있었으며, 원탁에 수월하게 복귀하기 위하여 나를 이용했다고 하더군요.”

“…….”

“정말입니까?”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던 글리체리아가 절박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솔란지아. 내 이런 말들이 그대에게 얼마나 큰 충격일지는 압니다. 하지만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살아 돌아오셨어요. 우리가 죽음으로 내몰았던 그분이요. 4년 전의 죄를 이제라도 갚아야지요. 솔란지아, 그러지 말고 나와 함께….”

“그대와 함께, 엘피도 공작의 편을 들라고요?”

그늘 속에서 솔란지아의 표정이 아연하게 일그러졌다.

“황제 폐하의 명을 거역할 수 없는 내 처지를 이해하신다던 분이… 어떻게 그런 말씀을….”

“솔란지아.”

“나는 그대를 믿었습니다. 성직자라고 있는 놈들이 죄다 어리석은 얼뜨기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대만은, 글리체리아, 그대만은 진정한 성직자라고 믿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

내지르는 소리가 비명처럼 째졌다. 글리체리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희게 질렸다.

솔란지아가 한 발짝 다가왔다.

“글리체리아, 당신은 이래선 안 됩니다. 적어도 당신만은!”

“소, 솔란지아… 미안해요. 그대를 속인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미안하다면 이번 한 번은 내 뜻을 따라 주십시오.”

지척으로 다가온 솔란지아의 검은 눈이 독하게 타올랐다.

“엘피도 공작이 증인으로 내세운 그 여자가 정말로 4년 전에 죽었던 카타리나 공작이 맞는지 확인부터 해 보자는 겁니다. 만약 카타리나 공작이 맞다면, 그때는 그대가 누구의 편을 들든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딱 한 번만!”

“…….”

“그럼 지난 일은 모두 묻겠습니다. 그대를 여전히 내 우상으로 여길 것이며,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그대를 평생의 벗으로 삼겠어요.”

솔란지아가 글리체리아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내 뜻, 이해하시겠어요?”

음울하게 속삭인 솔란지아가 그대로 글리체리아를 스쳐 지나갔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멍하니 듣고만 있던 글리체리아가 갑자기 휘청하며 벽을 짚고 섰다. 솔란지아가 사라진 방향을 잠시 응시하던 눈이 파들거리며 도로 감겼다.

원탁회의가 시작되었다.

이미 양측의 의견은 지난 회의들로 확인된 바, 거두절미하고 투표를 재개하기로 했다.

“알비야 공작 전하와 증인을 모두 시험에 부쳐 누가 진정한 천사 예리엘의 사도인지 확인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시는 분들은 모두 손을 들어 주십시오.”

예상대로 예후르와 안드레아, 클레멘스가 먼저 손을 들었다.

그들 사이로 누군가 망설이며 손을 들어 올렸다.

글리체리아였다.

“…….”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던 솔란지아가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퀴테리아 역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는 듯 차분한 태도였다. 글리체리아만이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죽상으로 발치만 내려다보았다.

“네 분이 손을 드셨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현재 원탁에 둘러앉은 인원은 총 열 명.

본디 예후르의 세력은 다섯이었다. 손을 든 네 명의 사람들이 의아한 기색으로 나머지 한 명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퀴테리아의 옆자리, 유약한 인상의 추기경에게로 곧 네 쌍의 눈이 쏠렸다.

클레멘스가 앓는 듯이 중얼거렸다.

“…도미시오 추기경.”

누미디아의 대주교, 도미시오 추기경이 백지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그들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네 분. 그 이상 없으십니까?”

안드레아가 당장이라도 그를 쥐어팰 것처럼 일어서려는데, 예후르가 그녀의 팔뚝을 잡아 말렸다. 도미시오 추기경에게 꽂혀 있던 그의 시선이 힐끗 퀴테리아와 보나벤투라를 확인했다. 놀랍지도 않다는 듯 그들은 지극히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 분으로 마감하겠습니다.”

“…젠장, 어쩔 거야.”

안드레아가 흉흉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예후르는 자꾸만 들썩이는 그녀를 진정시키며 도미시오 추기경을 주시했다. 그는 끈질기게 말을 걸어오는 클레멘스를 꾸역꾸역 무시하고 있었다.

“자, 그럼 이번에는 증인의 정체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시는 분들께서 손을 들어 주십시오.”

퀴테리아와 보나벤투라, 솔란지아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들었다. 람베르토 추기경도 안경을 추켜올리느라 조금 늦었을 뿐, 손을 드는 데는 주저 없었다.

남은 사람은 콘체사 추기경과 도미시오 추기경뿐이었다.

도미시오 추기경은 원탁에 올려 둔 손을 초조하게 얽고 있었다. 갈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반면 개구리처럼 툭 튀어나온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콘체사 추기경은 갑자기 흠칫 놀랐다. 솔란지아가 그녀를 죽여 버릴 것 같은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어색하게 웃어 보인 콘체사가 머뭇거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다섯이었다.

“도미시오 추기경. 그대는 어찌하시겠습니까?”

갑작스러운 호명에 퍼뜩 고개를 든 도미시오가 순식간에 몰리는 이목을 견디지 못하고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사실상의 기권 선언이었다.

입꼬리를 말아 올린 퀴테리아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야 결착이 나는군요.”

완만하게 휘어진 그녀의 눈이 당장이라도 들고 일어날 것 같은 안드레아와 그녀를 붙잡고 있는 예후르를 향했다.

“며칠째 지지부진하던 투표를 종결하여 주신 도미시오 추기경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럼 다섯 표를 받은 의견으로 원탁의 뜻을 수렴하여….”

쿵!

갑자기 회의장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모든 추기경들이 문가를 돌아보았다.

“…고드릭 수도사?”

퀴테리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고드릭을 위시한 레오폴트의 충복들이 회의장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보나벤투라가 원탁을 세게 때리며 일어섰다

“원탁회의가 한창인데 이 무슨 무례한 짓이오!”

“자중하십시오, 보나벤투라 추기경. 저희는 성하의 뜻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고드릭이 싸늘한 목소리로 그를 제지했다. 보나벤투라는 아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성하께서… 다시 정신을 차리신 게요?”

“아직 혼절해 계십니다만, 이런 때를 대비해 미리 제게 전해 두신 사항이 있습니다.”

고드릭은 찬찬히 좌중을 돌아보았다.

“4년 전에도 원탁에 계셨던 분들은 기억하실 겁니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뒤집어쓰셨던 교황 살해 미수 건.”

몇몇의 찌를 듯한 시선이 클레멘스를 향했다. 당시 사건의 원흉이었던 클레멘스가 공연히 헛기침을 했다.

“다행히 카타리나 공작 전하를 모시던 하녀의 소행으로 밝혀졌으나, 당시 교황 성하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셨습니다. 성하께서 쓰러지신 틈에 또다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으니까요.”

“…….”

“하여 명하시길, 당신께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여러 날 원탁을 비우는 상황이 지속되거든 이 교서를 발표하라 당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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