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올라는 으스러지도록 주먹을 말아 쥐었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그 여자가 불을 피우는 순간, 그녀가 진정 되살아난 사도인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 순간부터 그 여자는 천사 예리엘의 진정한 사도이며, 비올라는 거짓된 사도로 낙인찍힐 것이다.
이번에 화형을 선고받는 것은 비올라 자신이리라.
교황의 자리가 코앞이었다.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할 순 없었다. 저 하나의 비극으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지, 거짓된 사도를 배출한 죄로 위스누아의 가족들에게마저 불똥이 튈 것인데 그 참혹함을 어찌 견딜까. 비올라는 불타는 고향과 날카로운 창살에 꿰뚫려 죽을 가족들의 모습을 너무나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절로 이가 맞물렸다.
그녀는 울컥울컥 치솟는 울분을 삼키며 가까스로 레오폴트의 침실 앞에 섰다.
퀴테리아의 말대로 원탁이 둘로 나뉘었다면, 레오폴트의 한 표가 작금의 경색된 정국을 좌우할 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편을 들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만약 아니라면.
만약 그가 되살아난 시체의 편을 들어 준다면.
“카타리나 공작 전하요…? 성하께서 물론 많이 아끼셨지요. 성하께서 저리 기력을 잃으신 것도 다 그분께서 돌아가신 충격 때문인걸요. 지금도 그때를 사무치게 후회하고 계신다 들었어요.”
10년을 넘게 보고 길렀다고 했다. 카니나의 뒷골목에서 발견한 더러운 생쥐를 손수 씻기고 입혀 사람 꼴로 만들었다고 했다. 슬하의 아이 중 가장 선하고 여리다 하여 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했다.
더구나 그보다 끔찍할 수가 없는 방식으로 죽었다.
아직도 그날의 악몽을 꾸며, 아직도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회한에 병들어 갔다.
그런 딸이 되돌아왔다.
고작해야 2년 남짓 본 자신에 비할 수 있을까. 허리춤에도 닿지 않던 시절부터 손수 먹이고 기른 그 애정을 고작 자신이 이길 수 있을까.
비올라는 더운 숨을 삼켰다.
이길 수 없다면 판을 뒤엎어야 한다. 위스누아의 장사치라면 무릇 지는 판에 들지 않는 법이니.
결심한 비올라가 당차게 문을 열고 침실로 들어갔다. 한바탕 발작을 일으켰던 레오폴트는 거의 혼절할 지경으로 누워 끙끙 앓고 있었다. 바삐 그를 살피던 고드릭이 일어나 허리를 깊게 숙였다.
“알비야 공작 전하.”
비올라는 말없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색색 숨소리만 들리던 가면 속에서 연옥색 눈이 힘겹게 뜨였다.
“레오.”
비올라는 조용히 웃으며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아 주었다. 초점이 흐릿한 연옥색 눈에 금세 물기가 어렸다.
“비올라….”
“많이 힘들었죠.”
다정한 목소리에 레오폴트가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꽉 감았다. 비올라는 그의 손을 감싼 천에서 진물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끼곤 잠시 구역질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이 얼마나 힘들지 알아요. 내가 더 힘이 되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오, 비올라… 어찌 네가 그런 말을 하느냐.”
스르르 뜨이는 그의 눈에서 물기가 번져 왔다. 미소를 띤 채로 그를 응시하던 비올라가 고개를 돌려 고드릭을 보았다.
“잠깐 성하와 단둘이 있게 해 줘요.”
“…예?”
“괜찮으니 나가 보아라, 고드릭.”
망설이던 고드릭이 레오폴트의 명을 듣고는 하릴없이 침실을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자 침실에는 어두컴컴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비올라는 불그스름한 불빛이 어른거리는 그의 가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카니나의 페기.”
“…….”
“그 사람은 어때요?”
그의 눈에 다시금 고통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비올라는 멈추지 않고 물었다.
“정말로 당신의 죽은 딸이 되살아난 것 같아요? 천사 예리엘의 사도가 둘이라고요?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면….”
“…….”
“레오. 나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연옥색 눈이 흔들렸다. 가면 속에선 급하게 숨 삼키는 소리만이 울릴 뿐이었다. 끈질기게 이어지는 적막을 되새기며 비올라는 서서히 깨달았다.
그는 자신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2년, 자신의 본모습을 버려 가면서까지 그의 수발을 들었던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었음에도 생각만큼의 좌절감은 들지 않았다. 기껏해야 약간의 허탈감과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냉소.
그제야 비올라는 자신에게 레오폴트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퀴테리아에게 이런 식으로 버려진다면 정말 끔찍하게 아플 테니까. 이런 취급에도 아프지 않다는 것은 곧 소중하지 않다는 뜻이니, 그녀는 진심으로 아무렇지 않게 약병을 꺼낼 수 있었다.
“마셔요.”
비올라는 약병에 갈대 빨대를 꽂아 내밀었다. 레오폴트가 선뜻 받지 않자, 그의 손에 억지로 약병을 쥐여 주었다.
“비, 비올라. 이게 무엇이냐?”
“아….”
당혹한 레오폴트의 물음에 비올라는 잠시 침음을 흘렸다. 고민하는 듯하던 얼굴에서 곧 명쾌한 대답이 나왔다.
“수면을 돕는 약이에요. 요새 잠을 잘 못 잤잖아요.”
“…….”
“마셔 줄 거죠?”
비올라가 어여쁘게 눈을 접었다.
“나를 딸로 여겨 준다면 기꺼이 마셔 줄 거예요. 그렇잖아요.”
연옥색 눈에 아연함이 깃들었다. 약병을 쥔 레오폴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단다.”
“글쎄요. 그거야 보면 알게 되겠죠.”
“비올라, 제발….”
“안 마셔요?”
“…….”
“좋아요. 그럼 고드릭을 부를게요.”
비올라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드릭이 들어오면 당신이 들고 있는 그 약병이 무엇이냐 묻겠죠. 나는 사실대로 대답할 거예요. 그럼 나는 감히 당신을 해하려 든 죄로 잡혀가 고문을 받을 거예요. 사지가 부러지고 살갗은 검게 타들어 가겠죠. 그렇게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죄인으로 죽고 말 거예요, 난.”
“비올라!”
“그게 싫으면 마셔요.”
심해처럼 짙푸른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마시라고.”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던 레오폴트의 눈이 파들거리며 감겼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천천히 빨대를 입으로 가져갔다.
약병은 곧 비워졌다.
레오폴트는 다시 힘없이 늘어졌다. 약병을 옷 속에 숨긴 비올라가 등을 돌리려는데, 침대에서 끊어질 듯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올라….”
연옥색 눈이 곧 감길 것처럼 가늘어졌다.
“예후르를… 너무 거역하지 말거라….”
비올라는 코웃음 치며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문 쪽으로 걸어가며 검지와 중지를 세워 두 눈을 쿡 찔렀다. 쓰라린 아픔과 함께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비올라는 황망히 문을 열어젖혔다.
“고드릭! 성하께서 쓰러지셨어요!”
***
이튿날 새벽, 예후르는 성궁으로 들기에 앞서 클레멘스와 만나 밀담을 나누었다.
“전하께서 예상하셨던 것처럼 콘체사 추기경 쪽에서 먼저 접촉해 왔습니다.”
현재 원탁은 절반으로 세력이 나뉘어 있었다. 비올라도 함께 시험의 장으로 끌어오려면 마지막 한 표가 절실한데, 예후르는 일찌감치 교황 레오폴트의 표를 포기하고 상대편을 회유할 생각이었다.
씨알도 안 먹힐 퀴테리아나 보나벤투라, 빌헬미나 3세의 직속 명령으로 움직이고 있을 솔란지아는 애당초 물망에도 넣지 않았다. 목표는 수년 전 아나클레토의 추천으로 원탁에 들어온 람베르토 추기경과 콘체사 추기경이었다.
“두 사람 모두 아나클레토의 갑작스러운 파문으로 줄을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아나클레토와 비슷한 노선이던 솔란지아 밑으로 빠르게 갈아타긴 했지만,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솔란지아를 배반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겁니다.”
람베르토와 콘체사는 오랫동안 아나클레토의 세력에 몸담았던 인물들로, 그 수혜를 입어 원탁 추기경의 자리까지 올랐다. 많은 약점과 강점을 공유하고 있었을 아나클레토와 달리, 솔란지아에겐 아무런 빚도 없었다. 만일 자신에게 해가 된다면 솔란지아를 쉽게 내 버릴 것이었다.
“그렇다면 둘 중 누가 더 가망이 있겠습니까?”
“굳이 한 사람을 뽑자면 콘체사 추기경이겠지요.”
람베르토 추기경은 본디 아나클레토의 소속 가문인 탐보프 바도비체 후작가의 후원을 받던 인물이었다. 사실상 성직자의 길로 들어선 것도 아나클레토의 뒷수습을 하기 위함이었을 만큼 바도비체 후작가와 연이 깊었다.
그와 달리 콘체사 추기경은 교국 출신으로 아나클레토나 탐보프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재물을 탐하여 수많은 악행을 일삼았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일수록 회유하기는 더 쉬웠다. 위스누아가 아무리 부유하다 한들, 라발의 부강함에는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예상대로 콘체사 추기경은 상황이 묘해지자마자 클레멘스를 통하여 밀서를 보내왔다. 평범하게 안부를 묻는 내용이었지만 서신을 보낸 진의야 분명했다.
콘체사는 이쪽의 속을 떠보고 있었다.
“답장은 선물로 대신하죠.”
예후르의 손짓에 막시모가 커다란 궤짝을 들고 왔다. 뚜껑을 살짝 열자 번쩍번쩍한 황금이 엿보였다.
클레멘스가 조금 진저리를 쳤다.
“너무 속 보이는 선물이 아닐지요?”
“선물은 내가 주고 싶은 걸 주는 게 아닙니다. 상대가 가장 원하는 것을 줘야지요.”
“하긴….”
클레멘스는 도저히 끝을 알 수 없는 콘체사의 탐욕을 생각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예후르의 손짓과 함께 막시모가 다시 궤짝을 들고 물러났다.
“콘체사 추기경을 회유해서 며칠 내에 원탁회의를 마무리 짓는 것으로 합시다. 더 끌어 봐야 혼란만 가중될 테니까요.”
“성하께는 아무런 말씀도 안 하실 작정입니까?”
“…….”
“알비야 공작이 며칠째 밤새도록 성하의 곁을 지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성하께서 그 눈물겨운 노력에 감동하여 알비야 공작의 손을 들어 주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교황의 표는 단순한 한 표가 아니다. 투표 결과가 동률이라면 교황이 선택한 쪽으로 결정되었다. 원탁의 규칙인 다수결의 원칙을 유일하게 깨트릴 수 있는 것이 바로 교황의 우선권이었다.
“성하께선 그러실 수가 없습니다.”
예후르가 잔잔하게 웃었다.
“에페소스 별궁에서 알비야 공작을 대동하여 나온 것부터가 이미 그분께는 커다란 부담이었을 겁니다. 페기와 비올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작금의 상황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나로서는 성하를 원탁으로 끌어들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내가 그분께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자비입니다.”
그 말은 즉, 끔찍한 기로에 직면한 레오폴트를 배려하여 그가 없는 원탁에서 결정을 내리겠다는 의미였다. 클레멘스도 더 이상은 할 말이 없어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성궁 안팎의 여론은 어떻습니까?”
“혼란스럽기 짝이 없지요. 어딜 가든 되살아나신 카타리나 공작 전하에 대한 이야기가 들끓고 있습니다. 저만 해도 진정 그 증인이 4년 전에 돌아가셨던 그분이 맞느냐는 서신을 수십 장이나 받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