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하의 상태가 많이 불안정합니다. 부디 성하께서 무리하지 않으시도록 언행을 각별히 주의해 주십시오.”
그렇다고 안드레아처럼 악을 쓰며 몰아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레오폴트의 송장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었으므로.
페기는 그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그에 대한 원망을 느꼈다. 그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싶다가도,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를 주고 싶었다. 양가적인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고 멀리 돌아왔던 예후르와도 상황은 또 달랐다. 그녀에겐 더 이상 줄다리기를 할 여유가 없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마지막 모퉁이를 돌던 페기는 레오폴트의 침실에서 나오는 비올라의 뒷모습을 우연히 목격했다.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느릿느릿 멀어지는 모습이 꽤나 지쳐 보였다.
“전하?”
너도 최선을 다하고 있구나.
비올라는 그대로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페기는 그제야 발걸음을 떼었다. 지지부진하던 망설임은 끝났다. 그녀는 움트던 그리움의 싹을 외면해야만 했다.
비올라를 쫓아 침실에서 나오던 고드릭 수도사가 다가오는 그녀를 발견하곤 하얗게 질렸다. 그는 떨리는 손을 긴 소매 사이로 감추며 고개를 조아렸다.
“카, 카타리나 공작 전하, 오셨습니까. 성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 이야기를 들으셨겠지만 지금 성하의 상태가 위중하오니, 부디 격한 말씀은 삼가 주시고….”
“열어요.”
페기는 문 앞에 섰다. 고드릭이 애처로운 얼굴로 속삭였다.
“전하….”
페기는 묵묵부답이었다. 애끓는 심정으로 그녀의 옆얼굴을 응시하던 고드릭이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근위 기사들이 침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약초의 쓴 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페기는 어두침침한 침실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천개가 반쯤 걷어진 침대에 레오폴트가 축 늘어져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그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페기?”
그녀의 발걸음이 멎었다. 레오폴트는 우두커니 멈추어 선 그녀에게로 애타게 손을 뻗었다.
“페기가 맞느냐…?”
“…….”
“맞다면 가까이 와 다오. 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구나.”
페기가 미동하지 않자, 등 뒤에서 고드릭이 작은 목소리로 ‘전하’ 하고 재촉해 왔다. 마른침을 넘긴 페기가 말라붙은 입술을 간신히 달싹였다.
“아니요. 여기면 충분해요.”
작게 울리는 그녀의 음성이 레오폴트에게 똑똑히 가 닿았다. 그가 쩡하게 굳는 것이 보였다. 페기는 남몰래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절 찾으셨다고요.”
스스로 듣기에도 참 정 없는 목소리다. 레오폴트라고 그것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힘겹게 윗몸을 일으킨 그가 불안에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페기….”
“말씀하세요.”
“일단 가까이로….”
“말씀드렸잖아요. 여기면 충분하다고.”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대화가 뚝 끊겼다. 등 뒤에서 고드릭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느껴졌다. 페기는 또다시 입을 열어 날카로운 비수를 자신의 가슴에 손수 박아 넣었다.
“성하. 절 찾으신 용건을 이만 말씀해 주세요.”
느릿느릿 뻗어 오던 그의 손이 툭 떨어졌다. 그림자가 어둑하게 내려앉은 그의 가면 속에서 정처 없이 흔들리는 연옥색 눈이 엿보였다.
“어찌… 어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야….”
“…….”
“성하라니, 왜 날 그리 부르느냐. 페기, 나다. 레오다.”
페기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애써 감쳐물었다. 울음 섞인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눈을 따갑게 찔러 왔다.
“혹 내게 화가 난 것이라면 사죄하마. 몇 번이고 네가 만족할 때까지 빌마. 그리 냉정하게 선을 긋지는 말아 주렴. 페기. 나는, 나는 그저 네가….”
“제가 뭐라고 성하의 사죄를 받을 수 있겠어요. 몸 둘 바를 모르겠으니 부디 말씀 거두어 주세요.”
“그런…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니까!”
비명처럼 외친 레오폴트가 침대에서 내려오려다 그만 볼품없이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페기는 움찔하며 튀어 나가려던 몸을 간신히 멈춰 세웠다. 등 뒤에서 고드릭이 달려 나와 황급히 레오폴트를 부축했다.
목이 뽑힐 것처럼 격한 기침을 토해 내던 레오폴트가 고드릭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어 가까스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가면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구슬프게 반짝였다.
“내가 다 잘못했다…. 내가 그러면 안 되었어. 내가 널 버리다니, 내가 잠시 미쳤던 게야. 그날을 계속 후회해 왔다.”
힘이 다 빠진 손으로 고드릭을 밀어낸 그가 엉금엉금 기어 오기 시작했다.
“다시는 그러지 않으마.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다시는 널 버리지 않으마. 내 남은 평생을 너에게 속죄하며 살 테니, 제발… 가까이 와 다오. 얼굴을 보여 다오. 진정 내 딸 페기가 맞는지… 진정 무사한 것인지 내 눈으로 보게 해 다오.”
가면 아래로 섧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페기는 비틀비틀 기어 오는 그를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뼈가 도드라지는 앙상한 등과, 다 늙은 노인처럼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가 뼛골에 사무쳤다.
뭉툭하게 감싸인 그의 손이 짧게 경련하며 필사적으로 뻗어 오는 순간이었다. 페기는 달달 떨리는 이를 애써 힘주어 물었다. 피가 솟구치는 가슴의 상처에 또다시 비수를 박아 넣을 준비를 하며.
“당신을 이해해요.”
“…….”
“그런데 용서할 수가 없어요.”
부릅뜬 연옥색 눈이 한 차례 뒤집힐 것처럼 일렁였다. 페기는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상처 입은 그의 눈을 보며 똑같이 상처를 새겼다.
“당신을 용서하려고 수없이 노력해 봤어요. 그런데도 안 돼요. 날 지켜 주겠다고 했잖아요. 당신이 겪었던 그런 고통, 나는 겪지 않게 해 주겠다면서… 왜 나는 더한 고통으로 밀어 넣었는데요, 왜.”
“페기, 나는….”
“그러면서 고작 사과 몇 마디로 내게 용서를 바라요?”
그의 눈이 검게 죽어 갔다. 말 속에 담긴 칼날이 무자비한 난도질을 자행한다. 멈추지 않았다.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누가 날 죽였는지, 왜 나를 죽였는지…. 아무것도 모르니 그자가 아직도 성궁에 활개 치고 다니는 거겠죠. 진실을 알고 싶긴 해요?”
“누가… 페기, 대체 누구냐. 누군지 알려만 준다면….”
바들바들 떨리는 아랫입술을 타고 선득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레오폴트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페기는 끅끅거리는 웃음을 씹어 삼키며 간신히 말을 토해 냈다.
“알려만 준다면?”
“…….”
“그럼 이번엔 날 선택해 줄 건가요?”
그의 손끝이 움찔하며 오므라들었다. 그 본능적인 반응이 상처투성이 그녀의 가슴을 완전히 짓뭉갰다. 그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구 하나 쉬이 선택할 수 없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직면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페기는 발을 뒤로 물렸다. 그가 발작하듯이 손을 뻗어 왔지만 피하기는 쉬웠다.
“성하의 딸은 4년 전에 죽었어요.”
“…….”
“그러니 용서는 구하지 않으셔도 돼요.”
페기는 도망치듯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그가 다급하게 기어 오는 소리, 철퍼덕 엎어지면서까지 저의 이름을 부르짖는 소리, 말리는 고드릭의 애원과 비명처럼 울부짖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이 사정없이 찢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페기는 필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여린 손바닥에 손톱을 박아 넣으며 등 뒤로 문이 닫히기만을 기다렸다. 제게로 뻗어 올 그의 손과 쉼 없이 흐를 그의 눈물을 외면했다.
쿵.
문이 닫혔다.
갈라지는 그의 비명 소리가 한순간에 멀어졌다. 두꺼운 문에 갇혀 윙윙거리는 진동으로만 닿을 뿐이었다. 두 눈을 꾹 감고 현기증을 견디던 페기는 눈을 뜨기 무섭게 비올라를 발견했다.
비올라는 하녀들을 거느린 채 우두커니 복도에 서 있었다. 부릅뜬 눈이 페기를 지나 닫힌 침실 문으로 향했다. 아직도 페기의 이름을 부르짖는 레오폴트의 목소리가 멈추지 않고 있었다.
페기는 느릿하게 발걸음을 뗐다. 그러고는 곧은 자세로 비올라를 스쳐 지나갔다.
“전하… 괜찮으세요?”
인적 없는 내전을 벗어나면서 마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앞서 걸어가는 페기의 꼿꼿한 뒷등에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마샤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저녁놀이 밀려오는 회랑에 낙엽만이 덧없이 뒹굴었다.
비올라는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었다. 그놈의 페기, 페기! 레오폴트가 눈을 뜨자마자 부르짖던 이름이 귀에 박힐 지경이었다. 비올라는 아직도 귓전에서 쟁쟁 울리는 듯한 그의 고함을 떨치고자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일이 수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저의 신성이 의심받았을 때의 억울함은 증발한 지 오래였다. 죽었다던 거짓 사도가 난데없이 증인으로 등장한 것을 시작으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비올라는 양손으로 머리채를 움켜쥐며 벌겋게 터진 입술을 짓씹고 또 짓씹었다.
“원탁에서의 세력은 비등합니다. 전하께서는 오직 교황 성하의 마음을 잡는 데만 주력하십시오. 성하께서 전하의 편을 들어 주신다면 승산이 있습니다.”
틀릴 리가 없는 퀴테리아의 말이기에 무작정 따랐다. 뒤숭숭한 성내 분위기를 뒤로 한 채 끙끙 앓고만 있는 레오폴트의 곁을 지켰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그를 간호한 것은 그 잘난 엘피도 공작도, 되살아난 시체도 아니었다. 그녀였다.
그런데 깨어난 레오폴트는 저는 본체만체하며 그 여자만 찾기 바빴다. 당연히 화가 났지만… 직접 만나 보면 환상이 풀릴까 싶어 그 여자를 당장 봐야겠다는 억지도 들어주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리 없으니까.
십중팔구 엘피도 공작이 꾸민 간계가 틀림없었다. 아마도 먼 사막에서 유행하는 사특한 술법 중 하나이리라. 비올라는 그가 비천한 사막 출신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눈을 어지럽히는 잘난 얼굴로 가리고 있을 뿐, 천사에게 버림받은 그 더러운 핏줄이 어디 가겠나 싶었다.
하지만 사막의 술법이라 해 봤자 기껏해야 잘 모르는 사람들의 눈이나 잠깐 속일 수 있을 뿐. 레오폴트처럼 가까운 가족이라면 필시 그 차이점을 눈치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럼 이 악몽 같은 상황도 끝나리라고.
이런 결과를 바란 건 결코 아니었다.
“전하….”
어린 하녀가 작은 약병을 들고 왔다. 비올라는 입술에 뭉툭한 엄지손톱을 묻은 채로 물었다.
“성하는?”
“아직도 그분… 을 찾고 계세요.”
비올라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하녀가 머뭇거리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전하.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보심이….”
“내놔.”
그럼에도 하녀가 망설이고만 있자, 비올라가 사납게 약병을 가로챘다. 그러고는 뚜벅뚜벅 방을 걸어 나갔다.
퀴테리아는 만에 하나를 대비해 비올라도 시험에 부치자는 저쪽의 요구까지 함께 고려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퀴테리아를 비롯한 그 누구에게도 차마 털어놓지 못했던 것.
그 여자는 불을 피울 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