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7화 (207/328)

흘끗 솔란지아를 향해 내려오는 짙푸른 눈이 늦가을 서리처럼 냉랭했다. 솔란지아가 왈칵 이맛살을 구겼다.

“글리체리아 추기경께선 당연히 그러실 수밖에요!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무려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살아 돌아오셨습니다! 황제 폐하의 지엄한 명이 있는 나조차 마음을 다잡기가 힘든데, 평생을 교회에 헌신하셨던 글리체리아 추기경께서 무작정 그대의 편만 들어 주실 줄 알았습니까?”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잠시 입술을 다물었던 퀴테리아가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이틀 전 에페소스 별궁에서 증인이 등장했을 때, 글리체리아 추기경을 목격한 사람이 있습니다.”

“…….”

“조금의 놀란 기색도 없이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삼켰다더군요. 마치 증인의 정체를 미리 알고 있던 사람처럼.”

솔란지아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퀴테리아가 차분히 물었다.

“솔란지아. 진정 그대의 설득으로 글리체리아가 복귀를 결심한 것이 맞습니까?”

“그게… 그게 도대체 무슨….”

“혹 다른 마음을 먹고 그대에게 접근한 것이 아니냐 묻는 겁니다. 원탁에 복귀하기 위해선 그대의 도움이 절실했을 테니까요.”

“글리체리아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솔란지아가 극구 부정했다. 아연함이 비껴가는 얼굴에는 글리체리아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완고한 고집마저 엿보였다.

“제 배로 낳은 아이조차 속을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글리체리아를 향한 그대의 굳건한 믿음은 아름다운 것이나, 글리체리아 추기경도 그대와 같은 마음이리라 섣불리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그대가 글리체리아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죠!”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솔란지아 추기경, 그대가 아는 글리체리아는 개인적인 친분에 얽매여 본인의 신념조차 저버릴 사람입니까?”

솔란지아의 입이 덜컥 다물렸다. 글리체리아는 교회를 위한다는 일념만으로 지난 수십 년간 조국과도 선을 유지해 온 인물. 그런 사람이 고작 친분 따위에 연연하여 교회의 중대사를 결정할 리 없었다.

“압니다. 오랫동안 존경했던 분이 먼저 굽히고 들어와 그대를 도우리라 약속했으니, 마음이 많이 기울었겠지요.”

갑작스레 뒤바뀐 사근사근한 어조는 도리어 솔란지아의 수치심만 부추겼다. 퀴테리아는 노여움에 부들부들 떠는 솔란지아를 찬 눈으로 지켜보았다.

“이만 현실을 직시할 때입니다. 글리체리아에게 직접 진실을 물으십시오. 글리체리아 추기경 그 고매하신 인격에 그대를 속여 복귀를 꾀한 것은 제법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겁니다. 상황이 어렵게 되었으니, 그분이 느낄 양심의 가책에라도 일말의 기대를 걸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솔란지아는 피가 배어 나오도록 입술만 짓씹었다. 퀴테리아는 그런 솔란지아의 어깨를 토닥여 주곤 회의실을 나왔다.

밖에선 야손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하. 어떻게 되었습니까?”

퀴테리아는 말없이 걸었다. 얼른 그녀의 뒤로 따라붙은 야손이 흉흉한 눈으로 회의실을 쏘아보았다.

“역시 글리체리아가 복귀하는 것만은 막아야 했습니다. 어떻게 일이 이 지경이 될 수가….”

“그때는 복귀를 반대할 명분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글리체리아 때문에 모든 일이 엉망이 되질 않았습니까! 계획대로 제가 발렌트의 대주교가 되었다면, 지금쯤 우리가 원탁의 과반을 점하여 이 지긋지긋한 논쟁의 마침표를 찍었을 겁니다!”

퀴테리아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움찔한 야손이 거대한 몸을 구기듯 움츠렸다.

“야손. 우리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타락한 교회를 정화하여 새 시대를 여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이라 했었죠?”

“우리의 세력이 완전해질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의 세력이 완전해졌습니까?”

야손은 우물쭈물 대답을 망설였다. 퀴테리아는 미동 없이 선 자세로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는 강성해졌지만 체제를 전복할 정도는 아닙니다. 이런 예민한 시기에 만사 우리 뜻대로 밀고 나가다간 그러잖아도 불만이 많은 반대 세력들이 위기를 느끼고 규합할 겁니다.”

“하, 하지만 이러다 알비야 공작 전하께서 시험에 들기라도 하시면…!”

비올라는 불을 피우지 못한다. 불을 피우지 못하는 사도가 어디 그녀 하나뿐이겠느냐만, 되살아난 카타리나 공작이 만에 하나라도 불을 피운다면 끔찍한 상황이 도래할 것이었다.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설령 우리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해도 언제나 방도는 있습니다.”

퀴테리아는 야손을 돌아보았다. 온기 한 점 없이 냉랭하던 얼굴에 미소 한 자락 떠올랐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역사상 가장 완벽한 혁명을 해낼 것입니다.”

야손은 하릴없이 고개만 조아렸다. 고개를 돌리던 퀴테리아의 눈에 쏜살같이 날아가는 매 한 마리가 스쳤다. 그녀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

성도 밖 예후르의 저택에 전령이 찾아온 것은 이른 오후의 일이었다.

“성하께서 깨어나셨다고?”

소식을 가져온 어린 수도사는 희게 질린 얼굴로 고개만 주억거렸다. 페기는 심란한 기색으로 대답을 망설였다.

레오폴트가 깨어나자마자 그녀를 찾는다 하였다. 하지만 페기는 그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성하께서 모, 몹시 간절하셨습니다. 부디 입궁해 주십시오.”

엎드린 등이 잘게 떨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페기가 시름없이 눈을 내리감았다. 결국에 그녀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입궁 준비는 서둘러 이루어졌다.

간단히 드레스에 로브를 걸친 차림으로 마차에 오른 페기는 점차 가까워지는 성도의 위용을 창밖으로 내다보았다. 오늘도 날이 흐렸다. 비를 모으는 것처럼 재색 먹구름이 얇게 찢어져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미리 내전에서 명령이 내려왔는지, 그녀가 탄 마차는 검문 없이 성문을 넘었다. 앙겔리카 성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외궁을 가로지른 마차는 새하얀 벽이 버티어 선 내전 앞에서 멈추었다.

내전의 입구에는 레오폴트를 모시는 수도사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페기는 드레스를 추스르는 척, 자연스럽게 호위 무리에 합류한 막시모와 속삭임을 주고받았다.

“예후르는요?”

“급한 용무가 있어 오지 못하셨습니다.”

페기는 잠시 입술을 앙다물었다.

“다른 말은 없던가요?”

“그저 전하께서 내키시는 대로 하면 된다고만 하셨습니다.”

예후르다운 조언이었다. 하지만 어찌해야 자신의 마음이 내킬지 알 수 없는 페기로선 쓸모없는 조언이기도 했다.

복잡한 심정으로 성벽을 올려다보던 페기가 수도사들의 재촉을 못 이기고 내전으로 발을 들이려던 순간이었다.

“오, 전하! 카타리나 공작 전하!”

멀리서 체통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클레멘스였다. 페기는 이번만은 확실하게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작게 혀를 찼다.

“저 사람은 내가 온 걸 어떻게 안 걸까요?”

“글쎄요. 워낙 발이 넓으신 분이다 보니….”

막시모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발랄하게 달려온 클레멘스가 갑자기 무게를 잡으며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전하. 그동안 무탈하셨습니까?”

“지난 이틀 동안이라면, 네. 충분히 무탈했죠.”

페기가 매정하게 손을 빼냈다. 클레멘스의 눈썹이 축 처졌다.

“이런… 전하께서 이렇게나 제게 매정하십니다. 산딜라 대주교, 내 어찌해야 전하의 환심을 살 수 있겠습니까?”

묘하게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기억을 더듬던 페기는 곧 클레멘스의 등 뒤에서 살며시 튀어나오는 작은 여자를 발견하곤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중년임에도 소녀처럼 말간 인상의 맹인 주교가 입가에 수줍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

까맣게 잊고 있었던 얼굴은 순식간에 옛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캄페지오의 대주교, 산딜라.

그녀는 4년 전, 성인이 된 페기가 원탁에 들어오면서 자연스레 원탁 추기경의 자리에서 물러난 인물이었다.

“…산딜라 대주교.”

페기는 애먼 곳을 두리번거리는 산딜라의 손을 황망히 잡아 주었다. 산딜라의 얼굴에 놀라움의 감정이 피어났다.

“세상에, 정말로 전하께서 돌아오셨군요. 저는 사람들이 모두 제게 장난을 치는 줄만 알고….”

앞을 보지 못하는 그녀의 입장에서야 난데없이 살아 돌아왔다는 사도의 이야기를 선뜻 믿지 못할 법도 했다. 페기는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고개만 끄덕이다가, 얼른 ‘그렇군요’ 하고 말을 덧붙였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페기는 힐난을 담은 눈으로 클레멘스를 흘겨보았다. 갑작스레 마주치고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조성하기에, 산딜라는 고작 과거에 한 번 마주쳤던 인물에 불과했다.

“오, 산딜라 대주교께선 성하께 드릴 서신이 있다더군요.”

산딜라도 활짝 웃으며 동조했다. 그녀가 보좌관의 부축을 받아 레오폴트를 보필하는 수도사에게 서신을 전하는 동안, 클레멘스가 뒷짐을 지며 넌지시 다가왔다.

“성하를 뵈러 가신다고요.”

페기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시름이 가득한 그녀의 표정을 힐끗 확인한 클레멘스가 괜스레 딴청을 피우며 속삭였다.

“살갑게 대하지 마십시오.”

“…네?”

“안 그래도 편찮으신 교황 성하, 마음의 짐이라도 덜어 주시겠다고 내키지도 않는 용서는 괜히 하지 마시란 뜻입니다.”

페기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용서하고 말 것도 없는 일이에요. 그때 성하께서 날 버린 건 당연한 선택이었으니까.”

“성하께는 당연한 선택일지 몰라도, 전하께는 당연할 수가 없는 일이지요. 진실로 성하께 단 한 톨의 원망도 없다고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페기는 이를 사리물며 그를 노려보았다. 클레멘스가 짐짓 푸근하게 웃어 보였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하께 원탁에서의 한 표가 걸려 있음을 잊으신 듯하여 드리는 간언일 뿐입니다.”

“…….”

“지금 원탁은 반반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교황 성하의 한 표가 몹시 중요해졌지요. 엘피도 공작 전하께선 성하께서 끝내 중립을 표하리라 하셨지만,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할 수 있는 선까지는 해 봐야지요. 알비야 공작 전하께서 괜히 마음에도 없는 성하의 수발을 드시는 줄 아십니까.”

“…나한테 지금 성하의 죄책감이라도 자극하란 소린가요?”

“그리하여 성하의 표를 얻어 낼 수만 있다면요.”

페기는 몰려오는 어지럼증을 느끼며 이마를 감쌌다. 클레멘스가 입을 다물자, 이제는 수도사들이 입을 모아 그녀를 재촉해 왔다.

페기는 수도사들을 따라 온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삭막한 복도를 걸어 들어갔다. 익숙한 풍경 속에서 어린 날의 자신과 웃으며 뒤따르는 레오폴트의 모습이 비눗방울처럼 떠올랐다. 견딜 수 없는 그리움에 사로잡힌 그녀는 기억 속의 장면을 하염없이 눈으로만 쫓았다.

차라에게 그랬던 것처럼 무작정 레오폴트를 반가워할 수는 없다. 그 애는 끝까지 나를 놓지 않아 주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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