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6화 (206/328)

페기는 특히 오랜만에 보는 안드레아에게 활짝 웃어 주었다. 그런데 예후르나 안드레아나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식탁에서마저 하나가 포크를 집으면 다른 하나는 스푼을 들던 정반대의 남매가 똑같은 표정, 똑같은 눈빛을 하고 있으니 페기는 어쩐지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예후르가 조용히 다가왔다. 귓가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해 주는 듯하던 손길이 예기치 않게 그녀의 뺨을 문질렀다. 방심하고 있던 페기가 반사적으로 눈살을 찡그리며 작게 신음했다. 그러다 예후르의 손끝에 묻어난 분을 확인하곤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예후르, 이건….”

갑자기 등 뒤에서 마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페기는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하녀의 부축을 받아 걸어오던 비올라가 커다랗게 뜬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염병할 년이!”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안드레아가 분노한 들소처럼 달려 나갔다. 기함한 비올라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근위대가 황급히 안드레아를 막아섰으나, 안드레아는 장정 두 명에게도 밀리지 않고 악바리처럼 팔을 내뻗었다.

“야! 너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냐? 감히 누구한테 손을 올려!”

난동 부리는 안드레아에게 막혀 구석에 처박힌 비올라가 사색이 되어 바들바들 떨었다. 제법 가련해 보이는 모습에도 큰 감흥이 없던 페기는 문득 느껴지는 스산한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 뚫어져라 비올라를 응시하는 예후르의 안광이 심상치 않았다.

“…예후르.”

페기가 가만히 그의 손을 붙들었다. 그러고는 물끄러미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일부러 맞아 준 거야. 난 괜찮아.”

“…일부러?”

그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페기가 황급히 변명했다.

“저쪽에서 오해할 소지가 있었어. 나중에라도 부채감을 느끼기 싫어서 맞아 준 거야. 이런 거 아무것도 아니잖아.”

“아무것도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의 손이 곧장 귓가를 감싸 왔다.

“널 아껴 줘야지, 페기.”

그는 온통 아연함에 젖어 든 얼굴로 중얼거렸다. 벌겋게 부푼 뺨에는 차마 닿지도 못하고 그녀의 귓가만 서성이던 손이 어찌할 줄 몰라 연신 주먹만 쥐었다. 그답지 않게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자 페기는 갑자기 그에게 너무나도 미안해졌다. 맞은 건 그녀인데, 시급히 그를 안아 달래 주어야 할 것만 같았다. 마치 그의 책상에 잉크를 쏟아 과제를 모두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던 어린 날처럼, 페기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 다시는 안 그럴게….”

시무룩한 약속을 들은 예후르가 현기증이 이는 사람처럼 두 눈을 감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수리를 스치는 한숨을 느낀 페기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찔했다.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거리는 그녀를 짧게 응시하던 예후르가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그녀를 소중히 끌어안았다.

“…이만 돌아가자.”

그는 페기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곤 출입구 쪽으로 이끌었다. 넌지시 비올라를 돌아보는 금빛 눈에 어두운 기운이 감돌았다.

예후르는 미리 마련해 둔 사저로 페기를 데려갔다. 성궁에는 어느 선까지 비올라에게 충성하는지 알 수 없는 근위대가 가득하므로, 안전을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사항이었다.

하지만 그 사저가 설마하니 성도 외부에 있을 줄은 페기도 몰랐다. 십중팔구 위스누아 세력에게 매수되었을 것이 분명한 성도의 치안대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도 열댓 마리나 되는 용들을 성도 안에 둘 수는 없다는 것이 예후르의 설명이었다. 페기는 그의 입장을 이해했으나, 기껏 돌아온 성궁에서 다시 멀어져야 한다는 것이 마냥 기껍지는 않았다.

청백회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급박히 마련했다는 사저는 드넓은 벌판을 마당 삼은 오래된 석조 건물이었다. 한때 농장으로 쓰였다는 벌판은 특히 용을 풀어놓기 적당했다. 사방으로 뚫린 구조는 대개 방어에 취약하나, 아무리 청백회라 하여도 감히 용이 날아다니는 곳에 침입할 생각은 못 할 터였다.

오랜 세월을 거쳐 재색으로 물든 석조 건물은 벌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다. 고성 특유의 웅장한 멋이 있었지만, 사시사철 몰아치는 돌풍에 건장한 장정조차 때로는 운신하기 어려운 곳이기도 했다.

울퉁불퉁한 언덕길을 한참이나 달려 올라온 마차가 이윽고 멈추었다.

먼저 내린 마샤가 훅 불어오는 바람에 그만 볼품없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느슨하게 묶었던 머리가 삽시간에 산발이 되어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하녀들이 부지기수였다. 성도를 빠져나올 즈음부터 시름시름 앓던 페기는 예후르에게 반쯤 안긴 자세로 마차에서 내렸다. 칼바람이 무자비하게 할퀴고 간 뺨이 금세 희게 질렸다.

그들은 호위 기사들에 둘러싸여 이동했다. 다행히 저택은 코앞이었다. 무리가 성채의 그림자 안에 들자, 호위 기사들이 문을 열러 달려갔다.

페기는 예후르의 품에 몸을 기댄 채로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해를 등져 어둡게만 보이는 건물 위로 용이 그려진 깃발이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온통 흐린 와중에 깃대 주변만 구름이 일렁이며 하늘이 개는 것이 기묘했다.

홀린 것처럼 그 광경을 지켜보던 페기는 별안간 깃대에서 들이치는 반사광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동시에 아랫배에서 일어난 날카로운 통증이 삽시간에 전신으로 번져 갔다. 페기는 신음을 흘리며 그대로 정신을 잃고 고꾸라졌다.

다시 눈을 뜬 것은 이슥한 야밤에 이르러서였다.

가물거리는 시야를 멍하니 가늠하던 그녀는 아랫배에서부터 뭉근하게 퍼지는 감각을 느끼곤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월경통이었다. 도대체 얼마만의 월경인가 헤아리던 페기는 문득 뒤에서 저를 감싸 오는 온기를 느끼곤 고개를 살짝 돌렸다.

“…예후르?”

자신이 듣기에도 꼭 죽어 가는 목소리였다. 페기는 그에게로 돌아누우려 했으나, 몸을 뒤틀기 무섭게 숨 막히는 복통이 일어났다. 마치 누군가 자궁을 쥐어짜 내는 듯한 통증이었다.

“그냥 가만히 있어.”

페기가 이 악물고 식은땀만 줄줄 흘리자, 등 뒤에서 건너온 그의 손이 상의 아랫단을 들추고 들어와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끓기 직전의 물처럼 뜨거운 체온이 차갑게 죄어든 아랫배를 부드럽게 풀어 주었다. 페기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한껏 몰아쉬었다.

“이제 좀 괜찮니?”

너른 품으로 그녀를 감싸 안은 예후르가 속삭이듯 물었다. 페기는 대답할 기력도 없어 그저 눈만 깜박이고 말았다. 본디 그녀는 월경통이 없었다. 되살아난 뒤로는 월경을 하지 않았으니, 갑자기 찾아든 고통이 생경하다 못해 조금은 무섭기까지 했다.

“의사의 말로는 그동안 정신적 부담이 심해서 월경이 끊긴 것 같다고 해. 꾸준히 약을 복용하면 다시 정상적인 주기로 돌아올 거야.”

가만가만 들려오는 목소리가 몽롱한 정신을 간질였다. 멍하니 듣던 페기는 문득 예후르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월경은 으레 여인들이 비밀처럼 간직하는 소재였다.

한번 불편하다는 자각이 들자, 하녀에게만 겨우 내보였던 아랫배를 그에게 내어 준 것도 몹시 거북해졌다. 페기는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그는 물러나긴커녕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옴짝달싹도 못 하게 만들었다.

“몸이 따뜻해야 덜 아파.”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페기가 뺨을 붉히며 소심하게 반항했다. 잠시 침묵하던 그에게서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났다.

“왜 내가 모른다고 생각해.”

“그거야….”

너는 남자니까, 하고 대답하려던 페기는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와 입씨름하기에는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 에페소스 별궁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던 오전의 일이 까마득한 옛일처럼 느껴졌다.

“레오는 어떻게 됐어?”

흐릿한 기억을 되감던 페기가 무심코 물었다. 입 밖으로 레오폴트의 이름을 뱉고 나니,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혼절한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페기는 혼란스러운 마음에 지그시 입술을 당겨 물었다. 당연히 레오의 입장을 이해했다. 하지만 죽기 전 느꼈던 배반감이 아직 가슴에 멍울로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고 들었어.”

“뭐? 왜 아직도….”

황급히 뒤돌아보려던 페기가 갑자기 불쑥 드리워지는 그의 얼굴에 말문을 닫았다. 어두운 눈으로 물끄러미 그녀를 굽어보던 예후르가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가를 덮었다. 숨 막히도록 따스한 체온이 순식간에 서늘한 목덜미까지 치달았다.

“그는 괜찮을 거야.”

아이를 재우듯 가만가만한 손길이 가슴팍에 깃털처럼 내려앉았다. 페기는 별안간 몰려오는 졸음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바위를 매단 것처럼 무거워진 눈꺼풀이 절로 감겼다.

“괜찮아…?”

“응, 괜찮아.”

멀어진 의식 너머에서 그의 목소리가 고요히 울려 왔다.

“편히 쉬어, 내 사랑.”

아늑한 단잠이었다.

***

이튿날에도 원탁회의는 수확 없이 끝났다. 당장에 교황 레오폴트가 사경을 헤매고 있기도 하거니와, 원탁이 절반으로 뚝 갈려 첨예한 대립을 벌이고 있었다.

“재수 없는 여우 새끼.”

상스러운 욕설까지 내뱉은 솔란지아가 씩씩거리며 클레멘스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어제가 안드레아와 보나벤투라의 일방적인 몸싸움이었다면, 오늘은 그녀와 클레멘스의 지지부진한 입씨름이었다.

의욕 없이 지내는 동안 좀 철이 드는가 싶었던 클레멘스는 여전히 사람의 분노를 끌어내는 데는 누구보다 탁월했다. 텅 빈 회의실에 남아 노여움을 죽이던 솔란지아는 또다시 생각나는 클레멘스의 얄미운 입놀림에 원탁을 주먹으로 마구 내리쳤다. 분노에 찬 주먹질에 낡은 원탁이 덜컹덜컹 흔들렸다.

“…….”

어디선가 진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솔란지아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퀴테리아가 벽에 붙어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계셨습니까?”

“나간 적도 없습니다.”

고개를 돌려 눈을 질끈 감은 솔란지아가 다시금 점잖은 표정을 하며 퀴테리아를 돌아보았다.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십니까?”

퀴테리아가 느린 걸음으로 다가왔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솔란지아가 아득바득 최대한 품격 있는 태도를 갖추었다.

“솔란지아 추기경도 아시다시피 돌아가는 상황이 썩 좋지 않습니다.”

지척으로 붙은 퀴테리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교황 성하와 알비야 공작 전하께서 빠진 상황에 지금 원탁을 지키는 사람은 단 열 명. 그중에서 알비야 공작 전하도 함께 시험에 부쳐야 한다는 엘피도 공작의 의견에 동조하는 자가 무려 절반인 다섯입니다.”

“…….”

“그대가 강력하게 추천했던 글리체리아 역시 마찬가지고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