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3화 (203/328)

페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손을 꽉 붙들었다. 금방이라도 토기가 올라올 것처럼 목구멍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딱딱 맞부딪히는 이를 힘주어 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요사스러운 마녀를 당장 끌어내!”

“전하, 정말 안 되시는 겁니까?”

“카타리나 공작에게 화형이 언도되었음을 원탁의 이름으로 선언합니다.”

아무리 귀를 막고 고개를 흔들어도 지난날의 악몽이 잊히질 않았다. 그녀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 홀로 나섰던 유일한 날. 성화를 잃어버린 대성당에서 불을 피우려 안간힘을 썼던 파국의 날.

종국에 그녀는 실패했고, 거짓된 사도로 몰려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천운으로 되살아났다 하여 그날의 실패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날의 악몽을 꾸었고, 또다시 만인의 앞으로 나아가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지금에 이르러선 그때의 공포를 재차 맛보고 있었다.

“…페기?”

통로의 끄트머리에서 바깥 상황을 주시하던 차라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그의 입이 바쁘게 움직였으나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깊은 물 속에 잠긴 것처럼 귀가 먹먹했다. 페기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천장이 흔들린다. 시야가 어지럽게 돌았다.

“…안색이 너무….”

“…말도 안… 시간이 없….”

말다툼이라도 하는 것처럼 치열하게 속삭임을 주고받는 차라와 요슈아를 무작정 헤쳐 휘청휘청 앞으로 나아갔다. 누군가 다급하게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차라였다.

그 애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나, 입 모양으로 간신히 마지막 말만은 이해했다.

돌아가도 돼.

페기는 눈을 깜박였다. 겨우 울음을 참고 있는 차라의 등 뒤로 무저갱 같은 어둠이 보였다. 지나온 길들이 자연스레 그 속으로 뻗어 나갔다.

어두침침한 복도, 청백회가 지키고 선 입구, 아늑한 피아제 백작저, 감금되었던 문도성, 칼바람 날리던 북방의 동토와 장대비 쏟아붓던 시체 썩은 땅….

떠올리기 무섭게 손끝이 움찔 떨렸다.

구역질 나는 악취가 불현듯 코끝에 맴돌았다. 무참히 떨어져 나가던 열 손가락의 손톱과 악바리처럼 긁었던 묘비의 감촉이 생생했다. 죽을 둥 살 둥 기어 올라왔던 공동묘지의 풍경은 곧 머나먼 남쪽의 아름다운 해안가로 뒤바뀌었다.

환락의 도시, 카니나.

빛에 기생하는 그림자처럼 그녀는 도시에 기생하던 시궁쥐였다. 그대로 숨이 끊어졌어도 누구 하나의 기억에조차 남지 않았을 한낱 쥐 새끼. 쓰레기 더미나 전전하던 비천한 존재가 어찌하다 여기까지 온 것인가.

그녀는 천천히 차라의 만류를 뿌리쳤다. 그의 등 뒤에 도사린 어둠을 피해 도망치듯 뒷걸음질했다. 엇갈린 발이 위태롭게 회전하며 몸을 뒤돌렸다. 그녀는 넘어질 것처럼 크게 비틀거리며 걸었다. 그녀는 가야만 했다.

나의 빛.

나의 구원.

간절하게 내디딘 걸음에 눈부신 빛이 폭포처럼 쇄도했다. 찬연한 빛줄기에 휘감긴 사방 모든 것이 희게 번졌다. 붉고 노랗고 파랗게 터지는 광채가 그녀의 눈가를 뒤덮었다. 오색찬란한 세상 속에 오로지 저 숨 쉬는 소리만이 아득하게 진동했다.

그녀는 급하게 숨을 마시며 왼발을 내디뎠다. 그러고는 폐부가 쪼그라들도록 빠져나가는 날숨과 함께 오른발을 내밀었다. 금방이라도 꺾일 것처럼 후들거리는 다리로 어찌어찌 중앙 단상에 오르자, 온 세상이 그녀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현란한 광채를 입은 사람들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알아들을 수 없는 곡소리들이 그녀의 숨소리를 요란하게 장식했다. 그녀를 축으로 삼아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함박눈처럼 떨어지는 무수한 시선들을 멍하니 돌아보던 페기는 그제야 불현듯이 그를 발견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그곳에 있었다.

고운 손으로 내려와 뙤약볕 속에 죽어 가던 시궁쥐를 건진 그날처럼. 혹은 악몽에 시달리던 어린 누이를 남몰래 보듬어 주었던 그 수많은 밤처럼.

빛과 소리가 산란한 세상에서 오직 그만이 중심을 잡고 있었다. 무자비하게 뻗어 나가는 빛줄기를 휘어잡고, 제멋대로 목청을 지르는 소리들을 발밑에 깔며. 그와 함께했던 수많은 나날이 그러하듯, 그는 질서 없이 역류하는 그녀의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마치 마법처럼.

천둥같이 울리던 숨소리가 잠잠해지고, 눈을 어지럽히던 광채가 잦아들었다.

폭주하던 감각이 제자리로 돌아온 세상은 초라하고 어수선한 혼란만이 가득했다. 페기는 이제 자신을 둘러싼 경악과 악의의 시선을 고스란히 느꼈다. 불을 피우지 못했던 그 옛날처럼 날카롭게 벼린 적의가 창살처럼 날아들었으나, 그녀는 더 이상 겁먹지도 떨지도 않았다.

끔찍하리만치 이해의 범주를 벗어난 이 세상. 그러나 가장 불가해한 존재가 바로 그녀일지니.

이윽고 페기는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성좌에 레오폴트가 눈을 부릅뜨고 앉아 있었다.

갑자기 통로에서 튀어나온 여자를 처음부터 눈여겨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거대한 별궁에 비하면 그녀의 존재는 너무나도 미약했기에.

그러나 여자의 은빛 머리칼이 반짝인 순간, 4년 전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고개가 번개처럼 돌아갔다. 그럴 리가…. 아연하게 중얼거리던 사람들이 점차 할 말을 잃었다. 기억에서 지울 수 없던 오래전의 충격적인 광경이 비로소 그들의 뇌리를 스멀스멀 메우기 시작했다.

짧게 곱슬거리는 은발, 창백한 흰 피부, 백지에 물감을 떨어트린 양 홀로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와 바람 불면 날아갈 듯 여리여리한 체구.

목마른 사슴처럼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듯 아슬아슬한 걸음이 이어진다. 어느새 숨죽인 사람들의 시선이 여자의 힘겨운 걸음을 따라 움직였다. 한 발, 한 발, 턱없이 높은 계단을 올라 중앙 단상에 서는 여자의 얼굴이 소름 끼치도록 익숙했다.

“말도 안 돼….”

어디선가 신음 같은 혼잣말이 흘렀다. 경악에 휩싸인 사람들이 가까스로 입술만 달싹여 동조했다. 차마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어 연신 눈을 비비고 또 비볐지만, 단상에 오른 여자의 모습은 조금도 변치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비올라뿐이었다.

보자마자 어제 미레 강변에서 마주쳤던 여자임을 단번에 알아챈 비올라는 어째서 저 여자의 등장으로 이토록 별궁이 술렁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고작해야 자신의 또래. 저만한 나이대의 여자가 교회 안팎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소문은 들은 적 없었다.

“퀴테리아 추기경, 저 사람이 대체 누구길래….”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던 비올라가 멈칫했다. 퀴테리아는 여태 본 적 없는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 앉은 보나벤투라는 흡사 발작이라도 온 것처럼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비올라는 그제야 지금 상황이 몹시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빠르게 사위를 훑자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글리체리아, 졸도할 것처럼 창백하게 질린 솔란지아, 어울리지 않게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는 클레멘스와 고요한 미소를 머금은 예후르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레오폴트.

그는 벼락 맞고 쪼개진 나무처럼 충격적인 몰골을 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바깥으로 내보이는 연옥색 눈은 실핏줄이 다 터져 온통 시뻘겋기만 했다. 내쉬는 숨이 어찌나 거친지 견고하게 고정해 둔 가면이 덜컹덜컹 흔들렸으며, 손을 둥글게 동여맨 흰 천에는 피가 점점이 배어났다.

비올라는 나병 환자라 하여 평소 그와 닿는 것조차 꺼려 하던 것을 잊고 멍하니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레오?”

부름에도 그는 답이 없었다. 비올라는 그제야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는 것을 직감했다. 부릅뜬 그의 눈에서 물기만 붉게 번지고 있었다. 가면을 타고 진득하게 흘러내리는 그것은… 피눈물이었다.

“저, 전하…!”

어디선가 목 놓아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

울부짖는 소리가 둥근 돔 아래를 쟁쟁하게 울렸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던 비올라는 일순 눈앞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레오폴트의 어깨를 짚고 있던 손이 스르르 떨어져 나갔다.

“전하!”

“카타리나 공작 전하!”

누군가의 울부짖음을 시작으로 경쟁하듯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눈물과 통곡이 삽시간에 끓어올랐다. 한바탕 별궁을 휩쓸었던 혼돈이 더욱 요동치는 파장으로 깨달음을 몰아오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설마 정말로 그분께서….”

극심한 충격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흡사 망치로 후려 맞은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을 따라 일어서려다 그만 다리가 꺾여 도로 주저앉은 자들도 한 무더기였다. 처음에는 부정하던 이들조차 이제는 현실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거짓된 사도로 몰려 죽었던 카타리나 공작이 돌아왔다.

믿을 수 없는 자각이 해일처럼 그들을 덮쳐 왔다.

“아, 악마….”

격분한 보나벤투라가 만취한 주정뱅이처럼 휘청거리며 일어섰다. 덥수룩한 수염 사이에서 돋아난 굵은 혈관이 시뻘겋게 핏발 선 눈가로 번져 왔다.

“저건 악마요! 마귀를 부리는 뱀이요! 죽은 사람이 어찌 되살아난단 말인가! 이 사특한 것아, 당장 네 정체를 밝혀라!”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단상을 삿대질하던 보나벤투라가 별안간 경전을 힘껏 내던졌다. 그러고도 분을 참지 못하여 무작정 손에 집히는 대로 던지자, 곳곳에 퍼져 있던 청백회가 그를 따라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 마녀야, 썩 꺼지지 못할까!”

사방에서 돌팔매질이 쏟아졌다. 차마 들어 주기도 힘든 욕설들이 오물처럼 귓전을 더럽혔다. 그럼에도 단상에 선 페기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모멸감을 견딜 뿐이었다. 흡사 종교 박해의 한 장면처럼 끔찍한 광경에 좌중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만하십시오, 보나벤투라! 어찌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십니까!”

보다 못한 글리체리아가 분연히 일어섰다. 보나벤투라를 위시한 청백회 일당들이 왁왁 고함을 쳤으나 소용없었다. 그들이 악을 지를수록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맞서는 이들이 늘어났다. 욕지거리에 주먹질까지, 단상을 둘러싼 반목이 점점 살벌해지고 있었다.

“전하, 이만 말리셔야 합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막시모가 다급히 속삭여 왔다. 청백회의 광신도들이 벌게진 눈으로 단상을 노리고 있었다. 더 좌시하다간 페기가 다칠지도 몰랐다.

그러나 거듭된 재촉에도 예후르는 요지부동이었다. 난장판이 되어 가는 주변을 살피며 전전긍긍하던 막시모는 불현듯 애먼 곳을 올려다보는 예후르를 발견했다.

막시모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돔 천장의 동쪽으로 뚫린 자그마한 창문에서 엷은 빛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별스럽지 않은 광경에 표정을 살짝 구겼던 막시모가 별안간 쩡하게 얼어붙었다. 굳어 버린 뇌리에서 깨달음의 종이 우렁차게 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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