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긴 여자가 흘끗 페기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쨌든 만나서 반가웠어요. 요새 이 근처는 어두워지면 순례자들이 떼거리로 몰려드니 조심하고. 말이 순례자지, 부랑자나 다를 게 없다니까요?”
여자가 투덜거리며 등을 돌렸다. 우리 파피는 도대체 어딜 간 거야, 하고 불평하는 목소리가 멀어졌다. 수풀 사이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페기가 천천히 스카프를 얼굴에 둘러썼다.
지는 해를 등지고 차라가 달려오고 있었다.
페기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조금 전 만났던 여자에 대해 생각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묘하게 낯이 익었다. 검은 머리, 짙푸른 눈. 자꾸만 입천장에 달라붙는 찜찜한 기분을 느끼며 자욱하게 안개 낀 기억을 찬찬히 더듬어 나갔다.
불현듯이 기억의 파편이 반짝였다.
“아가씨, 그자는 사도가 아닙니다.”
설마.
“이를테면 3년 전, 뱀을 죽이러 왔던 엘피도 공작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세르난도 만포르차.
죽어 가던 이의 푸른 눈이 조금 전 스쳐 지나갔던 여자의 눈과 겹쳐졌다. 페기가 아연한 기분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여자는 자리를 뜨고 없는 공터. 스산한 기운만 감도는 그곳으로 페기의 그림자만이 길게 드리워졌다.
***
날이 밝았다.
성도 오스피나에선 밤새 엘피도 공작의 발언이 들불처럼 번져 있었다. 지난 며칠간의 고루한 논쟁으로 시들시들해졌던 사람들의 관심이 다시 하늘에 닿을 듯 치솟았다. 꼭두새벽부터 이미 에페소스 별궁 앞은 몰려든 인파로 바글거리고 있었다.
평소보다 일찍 성궁에 든 예후르는 그를 기다리고 있던 고드릭의 안내를 받아 내전으로 향했다. 감금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전에는 써늘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덧없이 회랑을 굴러다니는 낙엽을 잠시 응시하던 그는 고드릭의 부름을 듣고 발걸음을 마저 옮겼다.
접견실 문턱을 넘기 무섭게, 유리잔이 날아왔다.
쨍그랑!
그를 스쳐 지나간 잔이 요란하게 깨졌다. 사방으로 터져 나간 유리 조각을 맞아 그의 뺨에 작은 생채기가 생겼다. 예후르는 말없이 상처를 훑었다. 손끝에 피가 조금 묻어났다.
“네가… 네가 어떻게 그따위 짓을….”
고드릭의 부축을 받고 겨우 선 레오폴트가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것처럼 가슴을 들썩거렸다.
“페기가 어떻게 죽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네가… 네가 어떻게 그래….”
“그건 페기였잖아요.”
태연하게 대꾸한 예후르가 뚜벅뚜벅 걸어와 소파에 털썩 앉았다. 가면 속 레오폴트의 연옥색 눈이 허망하게 흔들렸다.
“페기와 비올라가 대체 무엇이 달라.”
“…….”
“둘 다 내 딸이고 너의 누이다. 어째서 그런 가슴 아픈 말을 하는 것이야. 교황의 자리 때문이라면 내 성심껏 너를 밀어준다지 않았어!”
“그저 교황이 되고 싶은 것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나오지는 않았겠죠.”
부릅뜬 연옥색 눈에 핏발이 섰다. 예후르는 목 언저리를 주무르며 한가롭게 말을 이었다.
“레오. 당신은 거짓된 사도도 가족으로 품어 줄 건가요?”
“뭐…?”
레오폴트의 몸이 눈에 띄게 떨려 왔다.
“가, 갑자기 왜 그런 소, 소리를….”
“그냥 궁금해서요.”
“그 애는 사도야. 처, 천사 예리엘께서 비둘기로 분하여 내려와 비올라에게 성흔을 내린 것을 많은 이들이 보았어.”
“그건 그 비둘기의 뜻이었나 보죠.”
몸을 반쯤 일으킨 예후르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지금 이건 내 뜻이고.”
코앞으로 그를 당면한 연옥색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가면 속에서 이가 딱딱 맞부딪히는 소리마저 울렸다.
“나는 결정했어요. 그 애를 지고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거고, 필요하다면 죽일 겁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뿐이에요.”
금빛 눈이 생긋 휘어졌다.
“약속.”
“…….”
“기억하죠?”
검지로 톡톡 가볍게 가면을 두드린 예후르가 바람처럼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석상처럼 굳어 있던 레오폴트의 몸이 그제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기함한 고드릭의 목소리 따윈 들리지도 않았다.
“약속….”
멍하니 중얼거린 레오폴트가 휑하니 열린 접견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많은 죄를 저지르고, 많은 수치를 범했다. 페기를 잃은 것이 그 대가인 것만 같아 다시는 그리 살지 말자 여겼건만 결국에는 제자리.
오늘도 그는 약속을 어기는 변절자가 될 것이다.
페기는 공의회를 참관하러 몰려든 시민들에 섞여 성궁으로 들어왔다. 이른 아침부터 어찌나 사람이 많던지, 그리운 성궁의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추억을 곱씹을 만한 여유는 전혀 없었다.
별궁 근처에는 파란 장미 브로치를 단 청백회 일당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면사를 습관적으로 매만지며 최대한 숨죽이고 있던 그녀는 바짝 붙어 오는 인기척을 느끼곤 고개를 들었다.
막시모였다.
“이쪽으로.”
짧게 속삭인 막시모가 그녀를 이끌고 샛길로 들어갔다. 청백회의 감시망에서 벗어나 인적 드문 곳에 이르자 막시모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긋지긋한 놈들. 누굴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저리 버티고 있는 꼴이라니….”
“증인을 찾고 있는 건가요?”
“예, 뭐. 알비야 공작이 사도가 아니라는 증좌를 물건으로 댈 수는 없을 테니 아마도 누군가의 증언이 있을 거라 예상하는 거겠죠. 하지만 증인으로 누가 나올지는 감도 잡지 못했을 겁니다. 걱정은 놓으십시오.”
페기는 수긍하며 막시모를 따라 별궁의 곁문으로 들어갔다. 빛이 들지 않는 어둑한 복도에서 차라가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페기!”
“쉿.”
막시모가 즉각 검지를 입술에 붙였다. 헙, 하고 입을 다문 차라가 소리 죽여 다가왔다.
“오는 데 별일 없었지? 피아제 백작이나 호위 기사도 없이 혼자 온 거야?”
“모여 있으면 청백회의 의심을 살 것 같아 뿔뿔이 흩어졌어.”
“잘했어. 괜히 눈길을 끌어 봐야 좋을 거 하나 없으니까.”
둘이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막시모가 복도 바깥의 동향을 살피고 돌아왔다.
“곧 공의회가 시작될 모양입니다. 여기가 별궁의 중앙 단상으로 이어지는 통로와 가장 근접한 복도니, 전하의 차례가 올 때까지 잠시 이곳에서 대기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막시모가 바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도련님, 요슈아는 어디 갔습니까?”
“잠깐 볼일 좀 보고 오겠다고… 아, 저기 오네요.”
멀리서 요슈아가 손을 방방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막시모가 떫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저는 잠시 엘피도 공작 전하께 가 볼 테니, 두 분 모두 요슈아 곁에 꼭 붙어 계십시오.”
막시모는 요슈아가 당도하고서야 자리를 떴다. 어두침침한 복도를 가로질러 모퉁이를 돌자, 중앙 단상으로 이어지는 넓은 통로가 나왔다.
통로의 그늘진 구석에서 막시모는 옷매무시를 단정히 가다듬고, 침 묻힌 손가락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졌다. 마지막으로 구겨진 셔츠를 빳빳하게 편 그가 등을 꼿꼿하게 세운 자세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통로를 벗어남과 동시에 왁자지껄한 소음과 눈부신 아침 햇살이 사위를 휘감았다.
막시모는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중앙 단상을 아래로 굽어보는 엄숙한 분위기의 원형 강당. 그의 주인은 만인의 이목을 당연하다는 듯이 두르고 앉아 있었다.
“전하.”
예후르는 그의 눈빛만으로 페기가 안전히 별궁 안으로 진입했음을 이해했다. 막시모는 얌전히 그의 등 뒤에 섰다.
“안드레아는?”
“곧 입장하실 겁니다. 아, 저기에….”
예후르는 뒷말을 더 듣지 않고도 누가 안드레아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참관하려는 시민들에 섞여 안으로 들어오던 안드레아가 멀찍이 예후르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인상을 팍 구겼다. 마음 같아선 침이라도 뱉고 싶어 하는 표정이다.
“왜 꼭 저런 모습이신지….”
막시모가 한탄했다. 하필 더러운 거지꼴로 변신한 안드레아는 대놓고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시민들을 밀치며 당당하게 장의자 하나를 꿰차고 드러누웠다. 순찰하던 근위대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그때, 공기를 뒤흔드는 거대한 쇳소리가 울려 왔다.
안드레아를 욕하던 시민들도, 그녀를 쫓아내려던 근위대원도 고개를 돌렸다. 잦아드는 소요 속에 내전으로 이어지는 석문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안일하게 늘어져 있던 성직자들이 황망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열리는 문틈으로 쏟아져 들어온 근위 기사들이 긴 창대로 ‘쿵!’ 대리석 바닥을 내리쳤다. 잇따른 타격음이 둥근 돔 아래서 맑게 공명했다. 번지는 소리의 파동이 간담을 서늘케 했다.
마침내 석문이 굉음을 내며 열렸다.
팽팽하던 정적은 찰나였다. 곧 여러 개의 뒤섞인 발소리가 들려왔다. 열린 문 너머로 크고 작은 인영이 아른거린다 싶더니,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햇살을 뚫고 엄숙한 제식용 가면이 위용을 드러냈다.
비올라의 손을 잡은 레오폴트가 느린 걸음으로 입장했다. 퀴테리아와 보나벤투라를 비롯한 청백회의 주요 간부들이 기세등등하게 그들을 뒤따랐다. 누가 보더라도 교황의 의지가 분명히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날카로운 선웃음을 터트린 예후르가 그제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레오폴트는 비올라의 부축을 받아 1층 교황의 자리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좌중을 훑어보더니 조용히 성좌에 앉았다. 기립하여 그를 맞이하던 성직자와 시민들이 웅성거리며 도로 착석했다.
비올라에게 전권을 맡긴 뒤로 레오폴트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기는 오랜만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전신을 가린 흰 의복과 딱딱한 가면을 곁눈질하며 수군거렸다. 결국에 성하의 마음이 알비야 공작에게로 기운 것인가.
레오폴트의 등장이 몰고 온 파란은 의장의 거친 목소리와 함께 잠시 막을 내렸다.
“지금부터 공의회를 개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엘피도 공작 전하, 어제 마무리 짓지 못한 안건을 계속 이어 나가시겠습니까?”
“네.”
보란 듯이 레오폴트의 옆자리를 꿰고 앉은 비올라가 격렬하게 타오르는 눈으로 예후르를 노려보았다.
“노파심에 말씀드립니다만, 지금 이 자리는 종교 재판이 아닙니다. 불타는 숯 위를 걸어 상처 입지 않은 몸으로 결백을 입증하라는 식의 요구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가혹한 방식은 나 역시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알비야 공작 전하께서 진실한 사도가 아님을 증명하시겠습니까?”
“증인이 있습니다.”
웅성거림이 번졌다. 의장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것이 누굽니까?”
“당신들은 상상도 못 할 사람.”
좌중의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염려와 호기심이 교차하는 광경을 유유히 지켜보던 예후르가 회심의 미소를 지어 올렸다.
“불신함으로 죄를 지은 자, 선동에 눈에 멀어 진실을 외면한 자. 모두 회개하십시오.”
“…….”
“진짜는 바로 저기에 있습니다.”
그의 손끝이 중앙 단상으로 이어지는 통로의 입구를 가리켰다. 모든 이의 이목이 아래쪽으로 쏠렸다. 그곳에 작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