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0화 (200/328)

마지막 능선을 앞둔 청백회가 다시는 빌미를 잡히지 않기 위해 숨죽이고, 또한 엘피도 공작마저 잠잠하니 세간의 이목을 불러 모았던 공의회는 표류하는 조각배처럼 방향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다. 그러자 득세하기 시작한 것은 예상외로 꼬장꼬장한 신학자들이었다. 지난 천 년, 변함없던 공의회의 단면이기도 했다.

“…경전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번역이란 것 자체가 사람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일인데, 어찌 경전의 옳은 뜻이 왜곡될 가능성을 부정하느냔 말입니다!”

공의회가 열린 지 나흘째 되는 날. 에페소스 별궁은 몇몇 신학자들의 공허한 외침만이 가득했다.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이미 번역된 경전이 암시장에 버젓이 나돌아다니는데 이제 와 금지해 봤자 무슨 소용입니까!”

“천 년 전의 사도 로살레다께선 절대 자신의 글을 다른 말로 옮기지 말라 이르셨소!”

“반면 샤를로망 프리울리께선 많은 이들에게 널리 자신의 뜻을 알리라 하셨습니다.”

“솔직해집시다. 경전이 번역되어 돌아다니면 성직자들이 지방에서 누리던 권력이 축소될까, 그것이 두려운 것 아닙니까! 경전의 내용을 왜곡하여 전달해 그릇된 권력을 누리는 성직자들의 전통이 어디 어제오늘의 일이랍니까?”

“불법적인 번역을 막지 못할 바에야 교회 주도로 꼼꼼히 검수한 번역본을 배포하는 것이 차라리….”

어제는 종교 재판이더니 오늘은 경전의 번역이었다. 이러다간 그림자 속에서 태어난 일곱 천사의 본질을 둘러싼 케케묵은 고릿적 논쟁까지 나오게 생겼다며 참관인들이 혀를 끌끌 찼다. 시민 중에는 이미 졸고 있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번역 문제가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자, 의장이 피곤에 절은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마지막 발안을 끝으로 오늘의 공의회를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발안자는 단상으로 올라오십시오.”

사위는 고요했다. 백발성성한 신학자들의 지겨운 논쟁에 지친 사람들은 이만 오늘의 공의회를 마치고 싶어 했다. 이대로 발안자가 나오지 않는다면 해 지기 전에 거처로 돌아갈 수 있을 터.

그때, 선명한 구둣발 소리가 울렸다.

하품을 쩍쩍 날리며 졸음을 견디던 사람들이 멈칫하며 단상을 돌아보았다. 아래로 깊숙이 파인 원형 단상에 자색 추기경 의복이 휘날리고 있었다. 흐려진 안경알을 닦고 안경을 고쳐 쓴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실의 창 앞에 충실할 것을 맹세합니다.”

나긋하지만 무게감 있는 음성이 거대한 돔 아래서 공명했다. 지쳐 늘어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세를 바로 했다. 꾸벅거리며 졸던 이들마저 여기저기서 깨우는 손길에 눈을 비볐다.

단상에 선 자는 엘피도 공작이었다.

“내 발언이 겨우 평화를 되찾은 교회에 파란을 몰고 올 것을 압니다.”

차분한 금빛 눈이 부스스 고개를 드는 좌중을 찬찬히 훑었다.

“하지만 진흙 속의 진주가 빛을 잃지 않듯, 진실 역시 가린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마주해야 할 진실을 끝까지 외면하고 있는 것은 소인배들이나 할 짓이겠지요.”

“…….”

“그러니 이 자리에서 밝히겠습니다.”

예후르는 고개를 돌려 비올라를 보았다. 영문도 모르고 불안해하는 그녀의 얼굴이 금빛 눈에 어려 왔다.

그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나는 위스누아의 비올라에게 신성의 진위를 묻습니다.”

서녘으로 기울어 가는 해가 에페소스 별궁의 지붕에 걸렸다.

굉음을 내며 별궁의 문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의 안색이 지독하도록 시퍼렜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처소로 돌아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글 생각부터 하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기 바빴다.

그때, 비올라와 퀴테리아가 청백회 간부들을 거느리고 빠른 걸음으로 별궁을 빠져나왔다. 그들을 둘러싼 분위기가 어찌나 흉흉하던지, 고위 성직자들조차 설설 피하기 바빴다. 그들은 곧장 비올라와 퀴테리아의 집무실이 있는 동관으로 향했다.

“도대체 이게 말이나 되냐고요! 내가 천사의 성흔을 받는 걸 목격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어떻게…!”

목에 핏대를 세우며 노여움을 쏟아 내던 비올라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쓰러질 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고심에 잠긴 퀴테리아가 좀처럼 말이 없자, 씩씩거리며 그녀의 뒤를 지키던 야손이 분을 못 참고 말했다.

“없던 의심마저 키우려는 사특한 수작입니다. 더 이상 경비대 교체를 막을 만한 명분도 없고, 알비야 공작 전하를 견제할 방법도 없으니 막다른 수를 쓴 겁니다!”

야손이 벌게진 얼굴로 퀴테리아를 재촉했다.

“추기경 예하. 내일 공의회가 열리거든 제가 엘피도 공작을 공격하겠습니다! 속이 뻔히 보이는 수작이라 하나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

“예하!”

숙고하던 퀴테리아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전하. 아직도 불은 피우지 못하십니까?”

비올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퀴테리아가 낭패란 듯이 작게 혀를 찼다.

“귀찮게 되었군요. 엘피도 공작이 제기한 의혹을 단번에 불식시킬 수 있는 방법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니.”

“…하지만 추기경, 알잖아요. 내가 성흔을 받은 걸 목격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걸. 내 열아홉 번째 생일 연회에 참석했던 사람들 모두가 비둘기로 분하신 천사 예리엘을 보았어요. 그들을 모두 증인으로 소환하면 되잖아요!”

“전하께서 성흔을 받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제법 많긴 하나, 하나같이 만포르차 가문의 일원이거나 위스누아에서 고위직을 맡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잖아도 위스누아가 전하를 교황으로 옹립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는 말들이 떠도는데, 자칫 잘못하다간 위스누아 세력이 무조건적으로 전하를 비호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요.”

“맙소사,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건데요!”

비올라가 절망적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야트막한 한숨을 내쉰 퀴테리아가 고개를 살짝 틀어 야손에게 물었다.

“엘피도 공작이 내일 제시하겠다는 증거는 아직 파악이 안 됩니까?”

“송구합니다. 전력으로 파헤치곤 있으나….”

퀴테리아는 가만히 팔짱을 끼곤 검지로 톡톡 팔뚝을 두드렸다.

확실히 뜬금없는 의혹이긴 했다. 엘피도 공작 본인이야 사도로서의 능력이 워낙 출중하니 거리낄 게 없겠지만, 비올라처럼 불을 피울 수 없는 사도들도 더러 있었기에. 막말로 아뎃사의 차라 역시 불을 피울 줄 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엘피도 공작이 과연 아무런 확신도 없이 이런 헛발질을 할 자인가.

퀴테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기 교황 자리를 둘러싼 경쟁에서 그보다 더한 악수가 없으리라 평가받는 탐보프 내전에의 개입도 따져 보면 실익이 아주 없는 결정은 아니었다. 해가 지날수록 심해지던 탐보프의 간섭이 결과적으로 한결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올라가 지닌 신성에 대한 의혹에도 제법 그럴싸한 증좌를 준비해 놓았으리라 여기는 것이 타당했다. 그것의 정체를 전혀 짐작할 수 없는 것이 문제이나, 다행히도 중요한 결정은 모두 원탁에서 이루어질 터.

의혹의 당사자인 비올라가 빠진다 하여도, 퀴테리아 본인과 보나벤투라, 솔란지아와 그녀가 거느린 두 명의 추기경,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 글리체리아와 무엇보다도 교황 레오폴트가 있었다. 비슷한 사건으로 딸을 잃은 적 있는 교황은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비올라를 도려내려는 엘피도 공작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었다.

원탁의 과반은 충분하다. 설령 일이 잘못되더라도 비올라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선은 견고하게 구축된 상황.

그렇다면 이런 얼토당토않은 문제를 제기한 엘피도 공작에게 반격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나.

“야손 수도사. 일전에 엘피도 공작이 클레멘스나 피아제 백작과 자주 어울린다 했었죠?”

“예. 며칠 전에는 클레멘스 추기경과 함께 피아제 백작저를 짧게나마 방문한 적도 있습니다.”

클레멘스를 비롯한 라발의 세력이 엘피도 공작에게 붙었다는 정황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둘 중 누구를 쳐야 하는가.

“클레멘스 추기경의 사저로 갈까요?”

“…아닙니다. 클레멘스는 보기보다 뒤가 깨끗한 사람이에요. 또한 성도를 기피한 지 오래되었으니 성도의 사저에는 딱히 볼 만한 것도 없을 겁니다.”

퀴테리아가 마침내 팔짱을 풀고 명했다.

“피아제 백작저로 가십시오.”

가서, 문제의 소지가 될 만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그녀의 눈빛을 읽은 야손이 비열한 미소를 머금곤 나갔다. 퀴테리아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상품에 알맞은 값을 치르듯, 당한 만큼 갚아 주는 것 또한 위스누아 장사치로서의 당연한 소임이었다.

그 시각, 피아제 백작저에는 차라가 방문해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 사기꾼의 고간을 팍! 걷어찼지!”

차라는 엊그제 자신이 사기꾼을 어떻게 퇴치했는지 설명하느라 아주 열심이었다. 떠드느라 바쁜 입에 가끔 다과를 물려 주고, 빈 찻잔에 차를 따라 주며 페기는 즐겁게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잘 해결되는 줄 알았는데 막다른 골목에서 치안대를 마주쳤지 뭐야? 난 보자마자 줄행랑을 쳤는데, 요슈아 그 멍청이는 예쁜 아가씨랑 시시덕거리다가 잡혔어.”

“그래서 오늘 혼자 온 거구나?”

차라는 입 안 가득한 다과를 우적거리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유 잔을 밀어 준 페기가 지나가듯 물었다.

“그런데 헤르고미 문서 기록원에는 무슨 일로 갔던 거니?”

우유를 들이켜던 차라가 갑자기 사레들렸다. 페기는 의아해하면서도 기꺼이 차라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너무 급하게 마시니까 그렇지. 괜찮아?”

“으응….”

차라가 연신 콜록거리며 은근슬쩍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페기는 축축하게 젖은 차라의 입가를 손수 닦아 주었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아, 아냐! 그냥… 뭔가 확실하게 알게 되면, 그때 말할게.”

페기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멍하니 눈만 끔벅이던 차라가 얼른 그녀의 손에서 손수건을 뺏어 직접 입가를 닦기 시작했다.

늦은 오후였다.

하늘에는 붉은 기운이 어리고, 서쪽으로 떨어지는 해를 따라 그림자가 길게 몸을 뉘었다. 페기는 시름 가득한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늘이 저물고 도래할 내일이, 예후르가 약속한 바로 그날이었다.

“내가 같이 있어 줄게.”

차라가 제법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페기가 천천히 손을 뻗어 삐죽삐죽한 그의 앞머리를 살짝 건드렸다. 그러곤 우유 거품처럼 보들보들한 뺨을 잡아 늘리며 말했다.

“그 심술쟁이 꼬맹이가 어쩌다 이렇게 든든하게 컸을까.”

“아, 진짜!”

차라가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그녀의 손길을 뿌리쳤다. 아직도 어린애처럼 통통한 볼살은 그가 가장 신경 쓰는 구석 중 하나였다.

“너 가끔 예후르처럼 구는 거 알아?”

“내가?”

“그래! 너… 그렇게 되기 전에도 낌새가 보이더니 아주…. 그런 못된 거 배우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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