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기는 딴소리를 주절거리며 바삐 후원으로 빠져나가는 클레멘스를 해괴하게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예후르가 사라진 방향과 클레멘스가 사라진 방향을 번갈아 보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다 그만, 번개처럼 깨달음을 얻고 말았다.
페기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타올랐다.
“클레멘스 추기경과 무슨 얘기를 그렇게… 어디 아프니?”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던 예후르가 그녀의 안색을 보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페기는 말없이 그의 맞은편으로 와 앉았다. 그녀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라앉히느라 손부채질에만 열중이었다.
의아하게 그녀를 지켜보던 예후르가 곧 탁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녀에게 물으니 요사이 샤를로망 프리울리의 저서를 번역하고 있다면서?”
“…….”
“페기?”
“나, 난 괜찮은데….”
“뭐가 괜찮아?”
멍하니 아랫입술을 쥐어뜯던 페기가 퍼뜩 어깨를 튕기며 그를 쳐다보았다. 예후르가 의문 서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겨우 누그러졌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물 끓는 주전자처럼 이제는 머리 위로 부연 수증기까지 피어오를 듯했다. 예후르가 살짝 인상을 쓰며 손을 뻗자, 불에 델 것처럼 놀란 페기가 화다닥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내, 내가 미친 것 같아. 이러다 천사께서 권능을 거둬 가시면 어떡하지?”
“뭐?”
“불경하고 삿된 생각을 품은 죄로… 세상에, 천사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을 거야. 이걸 어쩜 좋아.”
“불경하고 삿된 생각….”
예후르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흠칫한 페기가 손가락을 살짝 벌려 그의 동태를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감 잡은 얼굴로 그가 느긋하게 턱을 괴고 있었다.
페기가 주춤하며 소파 위로 끌어 올렸던 다리를 도로 내려놓았다. 궁지로 몰린 쥐를 배려하듯 예후르가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괜찮아, 페기. 사람이라면 다들 그런 상상을 하기 마련이니까.”
“…….”
“그런데 궁금은 하네. 정확히 무슨 상상을 한 거야?”
페기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선생님께 혼나는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인 그녀에게로 예후르가 즐겁게 말을 던졌다.
“네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니 전혀 짐작이 안 되네. 혹시 입 맞추는 상상만으로 그렇게 겁먹은 건 아니지? 그럼 곤란한데.”
“…다.”
“응?”
“다라고, 다. 끝까지 다.”
예후르가 턱을 괴고 있던 손바닥에서 얼굴을 살짝 들어 올렸다. 페기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벌게진 얼굴로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당장 화제 바꾸지 않으면 평생 상상으로만 끝날 줄 알아.”
잠자코 눈을 깜박이던 예후르가 얌전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고는 곧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탁상을 눈짓했다.
“샤를로망 프리울리는 갑자기 왜?”
탁상에는 천 년 전의 사도였던 샤를로망 프리울리의 낡은 저서와 이리저리 휘갈겨 쓴 종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페기는 소심하게 종이 끄트머리만 매만졌다.
“소니아가 해석본을 구하고 싶은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대서….”
“소니아?”
“여기 하녀야.”
예후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를 한 장 집어 들었다. 그의 얼굴에 곧 난처함이 떠올랐다.
“내가 해석본을 구해다 줄까?”
“…이건 아직 초고야. 번역을 완성하면 다른 곳에다 베껴 쓰려고 했어.”
창피해진 페기가 얼른 그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았다. 그러자 예후르의 시선이 탁상 위에 널린 종이들로 넌지시 내려앉았다. 페기가 뺨을 붉히며 어물거렸다.
“난 글씨에는 재능이 없나 봐. 필기체 익힌 지 얼마 안 된 마샤도 나보다는 잘 쓰던데….”
“나만 읽을 줄 알면 되지.”
예후르가 싱긋 웃었다.
“혹시 아까 무슨 상상을 한 건지 편지로 상세하게 써 줄 생각은 없니?”
페기는 그의 면전에다 종이를 집어 던졌다. 예후르가 맑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종이를 걷었다.
“어차피 네 글씬 나만 알아볼 수 있잖아. 이참에 페기, 네 취향을 알면 나중에 도움이 될….”
이번엔 흉기처럼 두꺼운 사전이 날아왔다. 예후르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찻주전자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오던 마샤가 바닥을 구르는 사전을 발견했다.
“어머나?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페기는 얼른 마샤에게 찻잔을 받아 마시는 척 얼굴을 가렸다. 사전에 찍힌 이마를 문지르던 예후르도 애매하게 웃으며 찻잔을 건네받았다.
도로 방을 나가려던 마샤가 머뭇머뭇 쟁반으로 입가를 가리며 속삭였다.
“저, 백작님 말씀으론 밖에 수상쩍은 움직임이 보인다고 해요.”
“내 뒤에 붙여 놓은 청백회일 거야. 오래 머무르진 못하겠어.”
다과를 오물거리던 페기가 조금 시무룩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작게 웃은 예후르가 팔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얌전히 지낼 수 있지?”
“…나야 할 일이 없어서 번역이나 하고 있는데, 무얼. 너무 무리는 하지 마. 다른 사람들에게 네가 더 밉보일까 걱정돼.”
“아무런 패도 없는 녀석이 뭐 저리 당당하냐 수군거리고만 있겠지. 너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염려하지 마. 널 몰라서 그러는 거니까.”
페기는 근심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백작저의 사용인들은 그녀를 그저 엘피도 공작의 숨겨진 정부라고만 알았다. 그녀의 앞에서 비교적 편하게 오가는 성도의 민심이 여전히 예후르에게 적대적이란 사실은 못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예후르는 곧 백작저를 떠났다. 멀어지는 그의 뒷등을 커튼 틈새로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려니, 찻잔을 치우러 온 어느 하녀가 조심스레 말을 붙여 왔다.
“저기, 아가씨.”
페기는 말없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하녀가 배시시 웃었다.
“소니아가 그러는데 아가씨께서 옛 경전을 번역해 준다고 하셨다면서요? 혹시 저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녀가 낡은 경전과 함께 공들여 모은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페기는 돈주머니는 빼고 경전만 받았다.
“어휴, 제 마음인데 좀 받아 주셔요.”
“나도 좋아서 하는 일이야. 그건 잘 보관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쓰렴.”
페기가 옅게 웃었다. 황공하여 어찌할 줄 몰라 하던 하녀가 거듭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페기는 몇 마디 겸양의 말을 덧붙여 하녀를 돌려보냈다.
혼자 남은 방 안에서 그녀는 다시 탁상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정신없이 널린 번역의 흔적들을 정리하다 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듯 비어 버린 시간이면 늘 번뇌가 차올랐다.
다가올 폭로의 날.
진짜 사도를 가를 시험의 장이 앞으로의 인생을 결정하게 되리라.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쳤으나, 4년 전의 실패가 똑같이 반복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은 초조하게 속을 태우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공허한 시간을 견디게 해 주는 것은 오직 다른 일에 열중하는 것뿐이었다.
또다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실패의 기억을 되새기던 페기는 고개를 흔들며 깃펜을 주워 들었다. 그러고는 번역하던 책을 펼쳐, 잘 들어오지도 않는 고어를 억지로 눈에 박아 넣었다.
커튼 사이로 지는 해의 흔적이 길게 들이쳤다. 시간은 약속의 날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충격적이었던 첫날과 달리 이튿날부터 공의회는 다시 예전의 고루한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의견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던 경비대 교체 건은 일단 퀴테리아 측이 한발 물러난 모양새였다. 그 외의 주요 안건이라 해 봤자 수년 전 은퇴했던 글리체리아가 발렌트의 대주교로 임명되어 원탁으로 복귀한 것 정도였다.
당파와는 거리가 멀었던 글리체리아가 솔란지아와 어울리며 그녀의 편을 들어 주는 것도 눈여겨볼 만한 일이었다.
비록 한창때의 글리체리아가 국적과 무관하게 자신의 소신대로 움직였다곤 하나, 그럼에도 엄연히 라발의 명문가인 피아제 백작가의 일원이었다. 그런 사람이 클레멘스와 합세하지 않고 탐보프 진영과 의견을 같이하는 것은 못내 의아한 일이었다.
“일단은 지켜보도록 합시다.”
퀴테리아는 글리체리아에 대한 의혹을 감추지 않는 청백회의 간부들을 그런 말로 다독였다.
청백회 간부들의 우두머리 격인 야손이 발렌트의 대주교로 임명되는 것이 거의 확실시되던 상황에서 갑자기 글리체리아가 대두한 것이니, 그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만도 했다. 하지만 정작 퀴테리아가 예의를 차려 그녀를 대하니, 겉보기로 글리체리아는 알비야 공작의 손을 들어 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엘피도 공작의 속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혹자는 야심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라 했으며, 혹자는 교황의 자리에 대한 미련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라 하였다.
양측의 대립이 팽팽하였으나, 최근 들어선 후자 쪽으로 여론의 추가 쏠리고 있었다. 퀴테리아가 가장 강력하게 추진하던 경비대 교체 건에 대하여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바스토뉴만을 지적하였을 뿐 제시된 안건의 효용성은 인정했다는 점, 그리고 청백회에 대한 별다른 공격이 없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탓이다.
그의 속내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든 어쨌든, 엘피도 공작은 제법 성실하게 공의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참여하는 것보단 관전하는 쪽에 가까웠으나, 그마저 한때 천사의 성상을 베어 넘겼던 사람의 모습이라기엔 놀라운 구석이 있었다. 1년여간 행방이 묘연했다가 다시 나타난 뒤로 엿보였던 불안정한 모습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는 현명하고 완벽하던 옛날의 위용을 완전히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에게 의혹의 시선을 보내면서도, 한편으론 오래전 우러러 마지않았던 완벽한 사도로서의 자태에 자꾸만 시선을 빼앗겼다. 만일 그가 본격적으로 알비야 공작과 대립하기 시작한다면, 거의 따 놓은 것처럼 보였던 알비야 공작의 교황 자리도 위태로워질지 몰랐다.
하지만 그런 기대도 알비야 공작의 견고한 세력이 흔들릴 때에나 가능한 일.
퀴테리아를 위시한 청백회는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막강한 결속력을 자랑했다. 공공연히 광신도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을 정도로 외부 세력에게 마냥 좋은 인상을 주진 못했으나, 내부적으로 그만큼 단단한 조직은 교회의 천 년 역사를 통틀어 살펴봐도 얼마 없을 것이다.
그들이 선점한 ‘개혁’이란 기치 아래, 타락한 교단에 염증을 느껴 교회를 등졌던 수도사들과 젊은 혈기로 충만한 청년들이 지금도 개떼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하물며 그들을 광신도라 손가락질하는 성도의 시민들마저 그들이 펼칠 개혁 정치에 대해서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으니.
그에 반해 와해된 세력을 추스를 생각도 없어 보이는 엘피도 공작은 마치 청백회란 존재를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청백회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가 청백회의 악행을 고해바칠 것이 분명한데도 이렇다 할 의사 표시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