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화 (197/328)

최초의 공의회를 상세하게 묘사한 로살레다서에 따라 중앙에 원형 단상을 둔 형태로, 1층에는 원탁 추기경들이, 그 위로는 대주교와 일반 성직자들이 자리한다. 그리고 서쪽으로 길게 트인 직사각형 형태의 공간에는 신자라면 누구나 들어와 앉을 수 있도록 장의자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눈이 돌아갈 만큼 섬세하게 조각된 장식과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그려 넣은 성화, 건축학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돔의 구조는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경탄을 자아낸다. 그러나 에페소스 별궁에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되, 겔랑수스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돔 천장의 동쪽으로 뚫린 자그마한 창문이다.

이는 로살레다서에서 묘사된 ‘빛’에서 영감을 얻은 구조물로, 광휘의 천사 미할리나의 현신이었던 야누비타 1세가 빛으로써 의심받는 추종자의 정체를 간파했던 사건을 상징한다. 이른바 진실의 창이라 불리는 자그마한 창문을 통해, 단상에 오르는 자의 진심을 파악할 수 있길 염원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천재 예술가 겔랑수스의 소망을 존중하여 에페소스 별궁의 중앙 단상에 오르는 자는 언제나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한다.

증인은 사실만을, 발안자는 오직 교회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진실의 창에 한 점 부끄럼 없이 말하건대, 저 야손은 현 경비대를 맡고 있는 이스파갈족을 추방할 것을 제의합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야손의 충격적인 발언에 에페소스 별궁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빠르게 눈알을 굴리며 본인의 잇속을 계산하던 사람들을 진정시킨 것은 성 미할리나 대성당의 주임 사제로, 공의회의 의장 역할을 맡은 노인이었다.

“모두들 정숙하십시오.”

가래 끓는 목소리에 좌중이 차츰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의장은 자꾸만 늘어지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야손 수도사. 근래 이스파갈족이 심각한 물의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주장에 합당한 근거가 있습니까?”

“문제는 늘 잔존해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이교도라는 점!”

야손이 너른 가슴팍을 내밀며 우렁차게 외쳤다.

“로살레다서에서 이르길, 이교를 섬기는 이들은 뱀의 추종자들과 똑같이 처분하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도리어 그들에게 지낼 땅과 먹을 양식을 제공했으며, 심지어는 우리를 지킬 방패로 삼았습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습니까.”

어디선가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손이 살벌해진 눈으로 즉각 소리가 들려온 곳을 노려보았다.

“그런 변명은 이제 통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다시 부강해졌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저 사악한 이교도 무리에게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 누가 몰라서 그런 말을 삼가는 줄 압니까? 대안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대안이!”

“대안이라면 바로 저기에 있습니다.”

야손이 의연하게 서쪽을 가리켰다.

“바스토뉴.”

또다시 작은 파란이 일었다. 의장이 불편한 기색으로 헛기침을 하자, 야손이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약 반백 년 전부터 우리 교회가 다그마르 산맥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다그마르 산맥에 뿌리를 내린 수도원이 셋이며, 그 신자만 해도 수백에 다다른다고 합니다. 모센달 족장과도 제법 호의적인 관계를 맺고 있고요.”

“…….”

“우리가 합당한 대가만 치른다면, 우리와 똑같이 세례를 받은 여덟 천사의 자식들이 이 땅을 지키러 올 것입니다. 천 년 전의 사도 로살레다께서 적으로 규정하신 피부 검은 이교도들을 몰아내고 새롭게 교회의 질서로 편입된 형제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면, 저 하늘 위의 천사들께서 보시기에도 더욱 기껍지 않겠습니까?”

그럴싸한 이야기에 차츰 수긍하는 분위기가 번졌다. 기세등등해진 야손이 입꼬리를 히죽 올리며 슬그머니 예후르를 보았다.

“광명의 천사 미할리나의 현신이신 엘피도 공작 전하. 부디 고견을 들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예후르는 놀란 기색 없이 여유롭게 그의 시선을 받았다. 모두가 숨죽이고 그들의 대치를 지켜보았다.

엘피도 공작과 알비야 공작.

그들 중 한 명이 차기 교황의 자리를 점할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열의 아홉은 엘피도 공작이 다음 교황이 되지 않겠느냐 예상했지만, 1년 사이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원탁의 절반이 알비야 공작의 손아귀로 들어갔으며, 근위대의 실권을 장악한 부단장 본시오가 알비야 공작에게 개처럼 충성했다. 이런 와중에 그간 중립을 지키던 경비대마저 바스토뉴로 교체한다?

너무나도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수작이었다.

위스누아를 비롯한 리누스 도시 연맹의 국가들이 바스토뉴와 오랫동안 긴밀한 관계를 맺어 왔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십중팔구 위스누아와 바스토뉴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터. 바스토뉴가 경비대의 직함을 가져가는 순간 알비야 공작의 사병화가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러므로 엘피도 공작에게 교황이 되고자 하는 야심이 남아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를 막아야만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이스파갈족과 마찬가지로 사막에서 온 이민족. 그간 접점이라 할 것이 없었음에도 둘을 엮어 대는 의혹이 끊이질 않았는데, 여기서 이스파갈족의 편을 들어 버리면 그동안 기저에서만 떠돌던 의심이 순식간에 폭발할 것이었다.

이는 체크메이트였다. 엘피도 공작으로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사람들은 이제 그가 어떻게 대처할지를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만인의 이목을 끌어안은 엘피도 공작이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만일 우리와 같은 천사를 모시는 형제자매들이 이교도들의 자리를 대신할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겠지요.”

이대로 맥없이 물러나는 것인가. 사람들이 미간을 찌푸리려던 순간.

“하지만… 바스토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예후르가 상냥한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여기 모인 분들에게 묻건대, 그대들은 용병을 믿을 수 있습니까?”

좌중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바스토뉴와 용병.

밀접하게 연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천사를 모시는 형제자매란 의도적인 감언이설로 지우려 했던 단어가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단상을 둘러싸고 앉은 성직자들은 물론이요, 공의회에 참관하기 위해 몰려온 성도의 시민들이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시민들 사이에선 야유하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보다 못한 솔란지아 추기경이 손을 들고 나섰다.

“바스토뉴의 용병들은 여타 다른 용병대와 급이 다릅니다! 아비와 아들이 적으로 만나도 물러서지 않는 기개로 유명하죠. 우려하시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그것을 어찌 확신하십니까?”

한가롭게 손톱이나 들여다보던 클레멘스가 넌지시 물었다.

“그네들이 그리 필사적인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고, 궁극적으로는 다그마르 산맥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섭니다. 만일 교국의 방비를 맡게 된다면 지금껏 상상해 본 적 없는 거금을 손에 쥘 것인데, 그때에도 지금과 같은 기개를 유지하리라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만에 하나를 대비해 계약서에 파문을 비롯한 제재 조치를 확실하게 명시해 둔다면….”

“오, 솔란지아. 30년 전 라발의 용병대는 교회의 신도가 아니었답니까?”

옆자리에 앉은 누미디아의 대주교, 도미시아 추기경이 식겁하여 클레멘스의 팔을 붙들었다. 그러나 클레멘스의 얄미운 입놀림은 멈추지 않았다.

“용병들이 그깟 파문 따위에 겁먹을 위인이었으면 오스피나 참극은 일어나지도 않았습니다. 평화로운 땅에서 건달 노릇이나 하던 라발의 용병대도 그러했는데, 저 척박한 다그마르 산맥에서 살아남은 진짜배기 용병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들에게 우리와 같은 신앙심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30년 전의 참극이 반복되기라도 하면, 그 책임을 어찌 지시려고 그럽니까?”

“크, 클레멘스 추기경!”

도미시오 추기경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클레멘스가 라발의 용병대 운운한 순간부터 에페소스 별궁은 이미 왁자지껄한 북새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만! 그만! 모두들 정숙하십시오!”

의장이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질렀지만 소란은 좀체 가라앉질 않았다. 오스피나 참극은 교회 천 년 역사의 오점이자, 아직도 많은 이들의 밤잠을 괴롭히는 악몽이었다. 별궁에 모인 사람들이 그것을 용납할 리 없었다.

하물며 참극을 언급한 자가 요앙 오귀스트의 개라 불리던 클레멘스라면야.

“용병은 아니 되오!”

“우우!”

성도의 시민들이 성난 모습으로 일어나 흉흉한 비난을 던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던진 토마토가 클레멘스의 발치에서 벌겋게 터지고, 라발의 하수인은 물러가란 소리가 사방에서 빗발쳤다. 몇몇은 심지어 근위대의 손에 끌려 나가기까지 했다.

결국에 그 정신없는 소란을 잠재운 것은 예후르였다.

“이스파갈족을 추방하는 데는 동의하겠으나, 그 대안이 바스토뉴의 용병이란 것엔 반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도사는 부디 공의회가 끝나는 날까지 더 나은 대안을 찾아오길 바랍니다.”

야손이 일그러진 얼굴로 반대편에 앉은 퀴테리아를 곁눈질했다. 퀴테리아는 변함없이 차분한 태도로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야손은 이를 갈며 단상에서 내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거의 허물어질 듯 앉은 의장이 마른 기침을 토하며 힘겹게 말했다.

“다음 안건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공의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 단상으로 올라왔다. 단정한 걸음, 휘날리는 자색 옷자락. 다름 아닌 보나벤투라 추기경이었다.

“나 보나벤투라는 오직 교회만을 위하는 대국적인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음을 선언합니다.”

의례적인 맹세를 끝으로 고요하게 침묵하던 보나벤투라가 천천히 눈을 떴다.

“천 년 전의 사도시었던 샤를로망 프리울리는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사람은 의지가 꺾인 사람이다.’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어도 의지가 없다면 작은 일조차 이룰 수 없다는 뜻입니다.”

보나벤투라는 잠시 말을 끊었다. 음울한 목소리가 곧 이어졌다.

“의지는 불과 같습니다. 젊은 시절의 혈기로 타오르는 불은 산천을 잿더미로 만들 정도로 거세지만, 단 한 번 주춤한 순간에 모닥불로 잦아들고 맙니다. 나이 들어감에 따라 모든 인간이 한 번쯤 겪게 되는 일. 비난받을 일을 아닙니다만, 자신의 불이 모닥불로 잦아든 것도 모른 채 관성적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족히 지탄받을 일입니다.”

“…….”

“그런 아둔한 자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분이 바로 이곳에 계십니다.”

모두가 의문스러운 얼굴로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들을 찬찬히 훑어 내리던 보나벤투라의 검은 눈에 일순 예리한 날이 섰다.

“클레멘스 추기경.”

누군가 숨을 급하게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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