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올라는 자신을 부축해 주던 근위대의 손길을 천천히 물렸다. 그러고는 내딛는 한 발, 한 발, 존재감조차 없는 발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만인의 이목을 휘장처럼 두른 그가 가죽 장갑을 벗다 말고 그녀를 바라본다.
마치 땅을 기는 미물을 보듯이.
순식간에 수치심으로 온몸이 달아올랐다. 비올라는 열 오른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땅바닥을 구르는 돌멩이나 저 멍청한 근위대나 저나, 똑같은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끔찍하도록 이가 갈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비올라는 간신히 분노에 찬 목소리를 끌어 올렸다.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입이 있으면 변명이라도 해….”
갑자기 그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비올라는 얼어붙었다.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 면밀하게 그녀를 살펴 왔다.
“…도저히 모르겠군.”
그러고는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하필이면 왜 이런 보잘것없는 것이었는지.”
반문할 틈도 없이 고개를 물린 예후르가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제야 참았던 숨을 꼴깍꼴깍 넘긴 비올라가 뒤늦게 치미는 깨달음에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야?”
“…….”
“무슨 뜻이냐고 묻잖아!”
“전하.”
퀴테리아가 예후르의 앞을 막아섰다.
“알고 계실 줄로 압니다만, 방금 중요한 행사를 엉망으로 만드셨습니다.”
예의상 내건 미소조차 엄격하게만 보인다. 가죽 장갑을 막시모에게 넘긴 예후르가 품에서 서신을 꺼내 휙 던졌다. 퀴테리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무례를 지적하려는 찰나에 그의 목소리가 치고 들어왔다.
“성하께서 어떤 무도한 자들에 의해 감금되어 계시다더군요.”
서신을 펼치려던 퀴테리아의 손길이 움찔했다.
“…그럴 리가요.”
“그럴 리가 없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예후르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성하께서 감금되실 리가 없다는 건지, 아니면… 그런 소식이 내게로 전해질 수 없다는 것인지.”
퀴테리아는 침묵했다.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던 예후르가 시선을 돌렸다.
“장난은 적당히 치십시오, 퀴테리아 추기경.”
그는 수하들을 이끌고 성궁 안으로 들어갔다.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는 뒷등을 지그시 응시하던 퀴테리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빠져나간 전서구가 있었나?”
“없습니다.”
씩씩 분루를 삼키던 야손이 시뻘게진 얼굴로 즉각 대답했다. 퀴테리아는 서서히 시선을 물렸다.
“올가미를 다시 점검해야겠군.”
내전의 문이 활짝 열렸다.
거침없이 내전으로 진입하는 예후르의 앞으로 근위대가 엉거주춤 칼을 뽑아 들자, 그의 등 뒤에서 튀어나온 수하들이 그들과 교전했다. 숫자에서 밀린 근위대는 오래지 않아 무장이 해제되었다.
멈추지 않고 계속해 걸어 나가던 예후르는 어느덧 레오폴트의 침실 앞에 도착했다. 침실 앞에는 어느 근위 기사가 창백한 안색으로 검 손잡이만 꽉 부여잡고 있었다. 고요히 내려앉는 시선에 기가 질린 기사는 결국에 검집을 풀어 바닥에 내려놓곤 슬슬 뒷걸음질했다.
예후르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두꺼운 커튼을 내려 한낮에도 어둑한 침실. 유일하게 커튼이 열려 하늘하늘 볕이 내려앉는 창가에 레오폴트가 동상처럼 앉아 있었다.
예후르는 찌를 듯한 그의 시선을 묵살하며 가까운 소파로 걸어가 파묻히듯 앉았다. 우아하게 교차하는 다리 너머로 실핏줄이 터져 벌겋게 물든 가면 속 연옥색 눈동자가 보였다.
예후르가 깊숙하게 턱을 괴었다.
“내가 전에 말했었죠. 퀴테리아를 너무 믿지 말라고.”
무릎에 놓인 레오폴트의 주먹이 으스러지도록 쥐어졌다. 내리깔린 예후르의 시선이 잠시 그의 주먹에 머물렀다.
“비올라, 그 애는 괜찮지만 그 언니는 조심하라고…. 아무리 딸이 어여뻐도 응석은 적당히 받아 줬어야죠. 원하는 걸 다 내어 주니 이렇게 버릇만 나빠진 거 아니에요.”
“해서, 행진을 이 꼴로 만든 것이냐?”
부들거리며 내뱉는 목소리에 노여움이 가득했다. 그에게로 완전히 돌아앉은 레오폴트가 꾹꾹 눌러 참았던 화를 퍼붓기 시작했다.
“내 분명 너에게 일찍 성도로 와서 행진에 참여하라 이르지 않았어! 내 말은 그리 쓰레기같이 무시해 놓고 이제야 나타나? 그것도 비올라를 저리 면전에서 짓밟으면서?”
“왜 이리 화를 내실까. 나는 앞으로 더한 짓도 할 건데.”
금빛 눈이 매끄럽게 휘어졌다. 말문이 막혀 거친 숨만 토해 내던 레오폴트가 느릿하게 목소리를 끌어 올렸다.
“…마음을 잡은 것이냐?”
“…….”
“만일 그렇다면 내가 도우마. 교황은 너의 자리야. 네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내가 너를 강력하게 밀어준다면 큰 무리 없이 네가 교황의 관을 이어받을 수 있을 게다.”
“그거야 그렇겠죠.”
예후르가 넌지시 중얼거렸다. 레오폴트의 눈에 의구심이 살짝 어렸다. 그러나 미처 캐묻기도 전에 예후르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비올라가 당신을 감금했던 건 조용히 묻을게요. 사랑하는 딸이 이렇게 몰락하는 것은 당신도 바라는 바가 아닐 테니.”
“…….”
“하지만 마음의 준비는 해 놔요.”
예후르가 흘끗 그를 곁눈질했다.
“결국에 끝을 보게 될 겁니다.”
가면 속 연옥색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고꾸라질 듯 땅으로 넘어진 레오폴트가 덜덜 떨면서 그의 발치로 기어 왔다. 하얀 천으로 뭉툭하게 동여맨 손이 가까스로 예후르의 망토를 쥐었다.
“트리… 트리니테 공동묘지가 불에 타 사라졌다. 페기… 우리 페기가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졌어.”
그가 흐느끼며 두 손으로 마구 빌었다.
“제발 내 얼굴을 봐서라도, 제발… 비올라의 목숨만은 살려 다오. 그 아이마저 잃을 수는 없다. 난… 난 이러려고 목숨을 구걸했던 것이 아니야. 너도 잘 알지 않니.”
가면 아래로 섧은 눈물이 끓어 넘쳤다. 그를 딱하게 굽어보던 예후르가 눈매를 살짝 찡그리며 웃었다.
“가엾고 가여운 레오폴트. 당신은 정말 아무것이나 가족으로 품어 주는군요.”
“예후르, 제발….”
“나는 약속을 지켰어요.”
그의 발이 무정하게 떠나갔다.
“이번엔 당신이 지킬 차례에요.”
황망히 내뻗은 손에 그의 망토만이 잠시 머물다 갔다. 덧없이 떠나간 그의 자취를 곱씹을 틈도 없이.
쿵.
문이 닫혔다.
***
용 기병대가 난입한 뒤로 성도는 혼란에 휩싸였다. 치안대는 사방으로 흩어지는 시민들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없었고, 근위대는 엘피도 공작과 알비야 공작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다. 덕분에 페기는 경계가 느슨해진 성문을 손쉽게 넘을 수 있었다.
이미 시민들이 빠져나간 도로는 한산했다. 마차는 형형색색 색종이들을 짓밟으며 질주했다. 시가행진을 기념하기 위해 가로수마다 걸렸던 미색의 비단 천과 깃발들도 볼품없이 땅을 뒹굴고 있었다.
페기는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았다. 시작하기도 전에 중단된 축제의 흔적들. 정리되지 않은 엉망진창 속에서도 차마 도려낼 수 없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페기는 레오폴트의 손을 잡고 행진을 나갔던 어린 시절의 악몽을 끊어 내며 고개를 높이 들어 올렸다.
민가의 지붕 위로 우뚝 선 순백의 궁전이 보였다. 정오의 햇살 아래 성벽은 진주를 쪼개어 바른 듯 윤이 나고,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치솟은 첨탑이 눈부신 반사광을 내뿜었다. 용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와중에도 거대한 궁전의 위용만은 대단했다.
페기는 무릎에 올려 두었던 손을 살며시 주먹 쥐었다.
죽음에서 돌아온 뒤로 세 번의 계절이 지나갔다. 지나가는 얘기로만 듣던 북방의 동토를 밟았고, 수천의 사람이 죽어 나가던 전장을 목도했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사선을 넘어 아득바득 여기까지 왔다. 아득한 지평선 너머로도 좀처럼 가늠할 수 없던 곳이 비로소 나의 눈앞에.
그러니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 방심은 용납되지 않으며, 실수는 곧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니.
그녀는 필사적으로 헤쳐 올라왔던 무덤의 썩은 흙을 떠올렸다. 온몸을 울긋불긋한 멍투성이로 만들 것처럼 쏟아지던 장대비를 생각했다. 허망하게 날아간 열 손가락의 손톱과 미칠 듯이 끓어오르던 분노를 되새겼다. 덧없이 부서지던 오른손을, 배반에 몸서리치던 죽음의 기억을 신물처럼 삼켰다.
이윽고 페기는 새파랗게 눈을 떴다.
그녀에게 퇴로는 없었다.
06
공의회.
만국에 흩어져 있는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이 모여 교리와 교회의 주요 안건에 대해 토의하는 자리로, 대개 5년에서 10년에 한 번꼴로 개최된다. 이러한 전통은 천 년 전 뱀을 봉인했던 야누비타 1세를 비롯한 당대 여덟 명의 사도들로부터 유래되었다.
로살레다서(書)에 따르면 공의회의 기원은 이러하다.
뱀을 봉인한 뒤 여덟 사도는 각기 여덟 방위로 흩어져 천사들의 뜻을 설파하고 다녔다. 그리고 정확히 10년 후 추종자들을 이끌고 지금의 앙겔리카 성궁의 자리로 모여 회담을 가졌는데, 그것이 바로 역사적인 첫 공의회다.
소명의 천사 예리엘의 현신으로 당대 여덟 사도 중 하나였던 로살레다는 첫 공의회의 출범을 이런 식으로 묘사했다.
…그곳에는 뱀이 유희를 즐기던 원형 극장의 터가 남아 있었다. 나를 비롯한 여덟 사도가 1층에 둘러앉고, 추종자들은 우리를 에워싸듯 겹겹이 2층과 3층에 자리를 잡았다. 야누비타가 무대로 나가 그간의 여정을 짧게 설명한 것을 시작으로 나머지 일곱 사도들의 연설이 이어지니, 끝날 무렵에는 이미 해 질 녘이었다.
우리는 이튿날에 다시 모였다. 우리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뱀이 사라진 시대를 어찌 꾸려 나가야 하는지였다. 추종자 중 하나가 용기 있게 무대로 나가 말하길, 뱀의 왕궁이었던 이곳에 우리를 섬기는 신전을 지어 새로운 시대의 주춧돌로 삼자 하였다.
나는 그 말이 온당하다 여겼기에 기꺼이 찬동했다. 하지만 반론이 만만치 않았다. 여러 갑론을박이 오갔으나 가장 공격적인 의혹은 이것이었다.
‘뱀이 군림한 뒤로 사치와 향락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나친 숭배는 독입니다.’
‘뱀의 전철을 밟자 주장하는 저자는 뱀의 하수인이 분명합니다.’
의견을 내었던 추종자는 한순간에 궁지로 몰렸다. 나는 답답해진 마음에 야누비타를 채근했다. 뱀을 봉인한 이후로 그녀는 세상 모든 일을 관망하였으나, 뱀의 하수인이라는 의심을 풀기엔 그녀만 한 적임자가 없었다.
그러자 야누비타가 서서히 검지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등 뒤에서 눈부신 빛줄기가 쏟아져 들어오니, 목에 핏대를 세우며 싸우던 이들도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빛이 드리워진 무대 위로 뱀의 하수인이라 의심받던 추종자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것은 인간의 그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