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시정잡배처럼 혼자서 한참을 떠들던 클레멘스도 퇴장만큼은 우아했다. 익숙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려 화답한 비올라가 그와 멀어지기 무섭게 잇새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쓸데없이 입만 놀리는 늙은이.”
“괘념치 마십시오. 어차피 오래 볼 사람은 아닙니다.”
“…네. 퀴테리아 추기경.”
비올라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퀴테리아의 말을 가슴속에 새겼다. 한때 교국을 쥐락펴락하는 권력가였던 역사도 이제는 옛 영광에 불과한 종이호랑이. 근자에는 엘피도 공작과 수상한 접점까지 있었다고 하니, 퀴테리아의 주장대로 이만 쳐 내고 야손을 앉히는 편이 현명하리라.
클레멘스에 대한 생각은 순식간에 구석으로 처박혔다. 비올라는 썰물처럼 밀려드는 성직자들의 인사를 받았다. 단련된 얼굴은 변함없이 우아한 미소를 그렸지만, 그녀의 속은 긴장으로 끓어올라 발 디딜 곳조차 없었다.
오늘의 시가행진은 비올라가 최초로 주관하는 행사였다. 지금껏 그녀의 주도로 치렀던 행사라 해 봤자 성도의 성직자들만 모여 올리는 예배 정도였으며, 그마저 레오폴트가 나와 얼굴이라도 비춰 주곤 했다. 유일한 사도로서 백방의 모든 이목이 쏠리는 것은 단언컨대 오늘이 처음이었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했다. 하물며 고만고만한 행사도 아닌, 만국의 종교 지도자들과 콧대 높은 귀족들까지 한자리에 모이는 공의회다. 만일 레오폴트의 도움 없이 오늘의 행사를 잘 마무리 짓는다면, 그녀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내던 중도 세력까지 단번에 휘어잡을 수 있으리라.
비올라는 긴 옷소매 속에서 주먹을 힘껏 틀어쥐었다. 오늘만은 한 치의 실수라도 용납되어선 안 되었다. 기필코 오늘을 발판 삼아 만인이 우러르는 교황의 자리에 오르고 말 것이니.
“전하.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이만 아래로 내려가시지요.”
수도사가 공손히 허리 숙여 아뢰자, 비올라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미처 인사를 나누지 못한 이들과 일별했다. 테라스를 내려가는 그녀를 에워싸듯 퀴테리아를 비롯한 청백회의 간부들이 줄줄이 뒤따랐다.
성궁의 거대한 문 앞에는 백색 갑옷을 차려입은 근위 기사들이 벼린 창날 같은 기세로 도열해 있었다. 맨 앞줄에는 교국의 동심원이 그려진 깃발을 든 기수가, 그 뒤로는 나팔과 북을 든 군악대가, 비올라가 오를 근사한 백마와 그녀를 호위할 근위대는 후열에 자리를 잡았다.
꼼꼼하게 동선을 확인하던 근위대 부단장 본시오가 다가오는 비올라를 알아보곤 각 잡힌 자세로 경례했다. 오직 정면만을 응시하던 근위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차례로 등을 돌려 경례하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비올라는 사뿐사뿐 백마로 걸어갔다. 느긋하게 다가온 본시오가 온순한 말의 고삐를 잡곤 손을 내밀었다.
“오르시지요, 전하.”
늘 후줄근하던 본시오도 오늘만큼은 수염을 깨끗하게 깎은 모습이었다. 도도하게 턱을 치켜든 비올라가 그의 손을 잡곤 엎드린 하인의 등을 밟아 백마에 올라탔다. 수도사들이 치렁치렁한 추기경 의복을 잡아당겨 멋들어진 주름을 만들어 내자, 제법 그럴싸한 자태가 갖추어졌다.
본시오가 말갈기를 쓰다듬으며 빠르게 속삭여 왔다.
“외람되오나 한 번만 더 짚어 드리겠습니다. 문이 열리면 본격적으로 행진이 시작됩니다. 현재 성도의 수용 인원을 초과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려 있으나, 치안대가 잘 통제하고 있으니 너무 놀라지는 마십시오.”
비올라가 코웃음 쳤다.
“대로는 남쪽 성문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는데, 성문에 이르시거든 말에서 내리신 뒤 몸소 성문 위로 올라가 성하의 공문을 낭독하실 겁니다. 낭독을 마치신 뒤에는 짧은 연설을 하실 기회가 있으며, 모두 끝나면 다시 대로를 따라 성궁으로 돌아오시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전하.”
본시오가 빙긋 웃었다.
“감축 드립니다.”
공손히 물러나는 그에게로 비올라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우습게도 저 한마디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비올라는 술렁이는 마음을 다스리며 힘차게 미소를 지었다. 구름 없이 맑은 하늘 아래 불어오는 바람조차 기분 좋게 선선한 가을날. 그녀는 긴장도 즐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멀리서 커다란 북소리가 울려 왔다.
쿵!
비올라의 가슴이 펄떡 뛰었다.
쿵!
기수의 어깨에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던 깃대가 바로 서고, 군악대가 연주를 준비했다.
쿵!
문지기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문을 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나팔수는 가슴이 부풀도록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부우우!
우렁찬 나팔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벽을 타고 넘어오던 시가지의 소란도 조금 잦아들었다. 긴장감이 감도는 정적 속, 거대한 문짝에 걸려 있던 사슬들이 드르륵드르륵 움직이기 시작했다.
“훗날 오늘이 전하의 치세를 논하는 첫 장이 되길 바랍니다.”
슬그머니 곁으로 다가온 퀴테리아가 나지막이 속삭여 왔다. 시험하는 듯한 눈빛을 마주하며 비올라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잘해 낼 수 있어요. 아니, 잘해 낼 거예요.”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던 퀴테리아가 조용히 눈을 내리깔곤 제자리로 돌아갔다. 비올라는 그녀를 쫓아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정면만을 쏘아보았다. 끼이익, 쇳소리를 내며 벌어지는 문틈으로 눈부신 빛이 새어 들었다. 고삐를 부여잡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쿵!
마침내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결에 펄럭이는 깃발 사이로 곧게 이어지는 대로가 얼핏 보였다. 촘촘히 깔린 바위들이 햇살 아래 반들반들 윤을 내고, 대로 양옆으로 빼곡하게 모인 인파의 기척이 찌를 듯 느껴졌다.
비올라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첫발을 떼기 직전 찰나의 정적이 숨 막히도록 목을 옥죄어 왔다.
그때, 어디선가 의문의 탄식이 들려왔다.
“어?”
비올라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열린 문 옆으로 비켜섰던 문지기들이 높게 손차양하며 성궁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쯤 출발해야 하는 앞줄의 기수와 군악대도 당혹한 기색으로 저들끼리 수군거릴 뿐이다.
인상을 쓴 비올라가 몸을 살짝 틀어 펄럭이는 깃발 사이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성궁 밖이 이상하도록 고요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터졌어야 할 환호성은 어디 가고 이토록 써늘한 적막만이….
“요, 용! 용이다!”
누군가 목청껏 지른 소리를 기점으로 웅성거림이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당황한 군악대가 나팔을 잘못 부는 둥 실수를 연발하고, 맨 앞의 기수마저 허둥지둥하다가 깃대를 떨어트렸다. 하인들이 달려와 깃대를 주워 드는 동안, 비올라는 그간 펄럭이는 깃발에 가려져 있었던 먼 하늘을 똑똑히 목격했다.
구름조차 물러간 남쪽 하늘.
열댓 마리의 거대한 용들이 일렬로 줄을 지어 날아오고 있었다.
“이, 이리로 온다! 피해!”
대로 양옆으로 밀집해 있던 인파가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정신없이 달아나는 아수라장이었다. 도처에서 수천의 발소리와 겁에 질린 비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망연자실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비올라가 이를 깨물며 뒤를 홱 돌아보았다. 사막 이북을 통틀어 용을 부리는 자는 단둘뿐. 만일 이스파갈족이 추방될 것을 염려하여 실력을 보이려는 것이라면, 오늘의 시가행진을 망친 죗값을 톡톡히 치러야 하리라.
그러나 몬틸로 백작은 테라스 난간 앞에서 날아오는 용들을 우두커니 지켜볼 뿐이었다. 주위에서 다급히 묻는 소리에도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만 저을 뿐, 도저히 이 사태의 주범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등골을 타고 오싹한 기운이 흘렀다. 스멀스멀 발밑에서부터 기어 올라오는 불길한 상상이 사지를 얽어맸다. 비올라는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퀴테리아만을 응시했다. 굳은 얼굴로 먼 하늘을 주시하던 퀴테리아가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넌지시 그녀를 보았다.
언니, 하고 입술을 달싹이려던 순간이었다.
끼아아아악!
귀청을 찢는 용의 울음소리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비올라는 온몸에 돋아나는 소름을 느끼며 황급히 남쪽 하늘을 돌아보았다.
어느덧 성도의 외곽 성벽에 달한 용 한 마리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성벽을 꿰고 앉아 목청껏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머리털 쭈뼛 솟는 감각에 몸서리치던 비올라는 뒤이어 대로로 하나씩 내려앉는 용들을 보곤 기함하며 숨을 들이켰다.
쿵!
굉음을 내며 대로를 깔고 앉은 용들이 거대한 꼬리를 흔들며 한바탕 우렁차게 울었다. 겁에 질린 시민들이 달아나 버린 시가지는 그야말로 무주공산. 텅 비어 버린 공간을 휘젓는 섬뜩한 울음소리에 근위대마저 기가 꺾여 황망히 뒷걸음질을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어, 어…!”
불현듯 동그랗게 지는 그림자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던 근위 기사들이 휘둥그레 눈을 떴다. 어느새 성궁에 달한 용 몇 마리가 새하얀 성벽 위로 고개를 들이밀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동공이 세로로 찢어진 파충류의 눈알이 먹잇감을 발견한 포식자처럼 번뜩였다. 근위대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용들이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그들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피할 새도 없이 땅에서부터 몰아치는 돌풍이 어지럽게 근위대를 휘감았다. 군악대가 놓친 악기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뒹굴고, 놀란 말들이 ‘히이잉!’ 울며 근육 진 앞발을 높이 쳐들었다. 굵은 깃대를 간수하느라 고삐를 놓친 기수들이 줄줄이 낙마하여 나동그라졌다. 똑같이 말에서 떨어질 뻔한 비올라는 간신히 근위대의 품에 안겨 그 자리를 벗어났다.
휘리릭!
별안간 하늘에 뜬 용에게서 굵은 밧줄이 쏟아졌다. 그와 동시에 민첩하게 밧줄을 타고 내려온 용 기병대 단원들이 안정적으로 땅에 안착했다.
주인을 내려 준 용들이 양측으로 갈라지는 가운데, 먼 하늘에서 순백의 용이 미끄러져 내려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백룡이 우아하게 날개를 접고 땅에 내려앉자, 사위에는 쥐 죽은 듯한 적막만이 흘렀다.
비올라는 도도하게 목을 세우는 백룡을 황망히 바라보았다. 어릴 적 카니나의 앞바다에서 보았던 흰고래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물살을 헤치던 매끄러운 거죽과 유연하게 꿈틀거리는 근육. 그러나 홍채가 길게 찢어져 형형한 빛을 띠는 붉은 눈알만은 파충류의 것처럼 섬뜩했다.
사자가 갈기를 털듯 목을 가볍게 흔들던 용이 이내 잠잠해졌다. 용에게 온 시선을 빼앗겨 있던 비올라는 용의 등에서 날렵하게 뛰어내리는 그림자를 뒤늦게 인지했다. 용의 날개를 제치며 걸어 나오는 몸태가 어딘지 낯익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올라는 갑자기 근위대의 품에서 절 뜯어낼 듯 잡아당기는 손길에 화들짝 놀랐다.
퀴테리아였다.
“정신 차리십시오.”
씹어 뱉듯 말하는 음성이 선득했다. 퀴테리아의 얼굴을 멀거니 응시하던 비올라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찔한 전율, 혹은 숨 막히는 공포. 종잡을 수 없는 감정으로 얼룩진 근위대원들이 종국에는 짓눌린 숭배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오직 단 한 사람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