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4화 (194/328)

“내가, 왜 반백 년도 전에 죽은 여자처럼 꾸미고 그 여자 흉내를 냈는데. 다 당신 때문이잖아. 당신 마음 하나 붙잡아 보겠다고, 그런 미친 짓을 한 거 아냐.”

그늘진 눈가에서 푸른 눈이 위태롭게 번뜩였다. 레오폴트의 눈에 아연한 기색이 스쳤다.

“비올라, 그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허, 진심으로 하는 소리예요? 내가, 만인이 아는 사도가 이제 와 고향으로 돌아가면 무얼 할 수 있는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진 당신도 알잖아!”

비명처럼 갈급한 목소리가 목을 긁으며 터져 나왔다.

“당신이 앉아 있는 그 자리! 모두가 우러러보는 그 자릴, 내가 원한다고! 나한테도 자격이 있는데 왜 보아 주질 않아!”

늘 그랬다.

무슨 일이 터지면 엘피도 공작을 찾고, 아무리 편지를 보내도 대답 없는 그를 애타게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했다. 사도 된 몸으로 감히 천사의 성상을 베어 버린 무도한 자를,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한다는 구실로 타국의 정세를 어지럽히는 자를 여전히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 남자가 뭔데! 뭐가 그렇게 잘났길래 왜 항상 그 사람이야! 곁에서 당신을 돌보고, 당신을 대신하는 건 난데 왜 영광된 자리에는 항상 그 사람을 세우려 하냐고! 내가 그 사람보다 부족한 게 뭔데! 대체 뭐가 부족하길래 난 항상 뒷전이야!”

“…예후르는.”

억눌린 목소리가 치고 들어왔다.

“예후르 그 애는, 이 자리에 앉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나조차 그 아이에게 교황의 관을 물려주기 위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언제고 그 아이가 마음만 먹으면 여기서 내려갈 준비가 되어 있어. …오히려 나는 아직껏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네가 실망스럽구나.”

비올라는 쩡하니 굳었다. 늘 따스한 빛으로 저를 돌아보던 연옥색 눈에 어두운 상심만이 가득했다. 그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확 깼다.

내가 깨닫지 못했다고?

세게 맞물리는 잇새로 고통에 찬 신음이 새 나왔다. 인정할 수 없었다. 늘 거저 받았던 사랑과 칭찬이 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한다는 것을. 늘 영특하고 뛰어났던 내가 다른 누군가보다 뒤떨어진다는 것을.

잘못될 리 없는 내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것을.

“…내가 깨닫지 못한 게 아니야. 당신이 착각한 거지.”

가면 속 연옥색 눈동자가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비올라는 이를 악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자욱하게 그늘진 입매가 뒤틀린 미소를 그려 나갔다.

“있잖아요, 레오. 사람은 늙으면 판단이 흐려지고 정신이 오락가락한대요.”

“뭐…?”

“노망이 났으면, 쉬어야죠.”

선득한 웃음을 덧붙인 비올라가 싸늘하게 돌아섰다. 황망히 그녀를 붙잡으려던 레오폴트가 몇 발짝 걷지도 못하고 진흙밭에 미끄러졌다. 거친 숨을 헐떡이며 애타게 그녀를 부르는 레오폴트의 주위로 고양이들이 하나둘 몰려왔다.

회랑을 빠져나와 어두운 복도를 걷는 비올라에게로 본시오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지금 이 시간부로 내전을 봉쇄한다.”

“명 받들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본시오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비올라는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질척하게 따라붙는 레오폴트의 목소리를 뜯어 버리듯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다. 그러고는 눈부신 빛을 쏟아 내며 차례로 열리는 문들을 바라보았다.

내게로 안배되었음이 틀림없는 지고의 자리.

나는 틀리지 않았어.

비올라는 기꺼이 문턱을 넘었다. 그녀의 앞으로 무수히 많은 문이 열리듯, 그녀의 등 뒤로 무수히 많은 문이 닫혔다. 울부짖는 레오폴트의 목소리는 가련하게도 겹겹이 쌓인 문들에 갇혔다.

***

“글리체리아, 이쪽입니다!”

멀리서 솔란지아가 손을 방방 흔들었다. 혼잡한 인파 틈바구니에서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던 글리체리아가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다.

“솔란지아. 이번 공의회는 왜 이리 사람이 몰리는 것인지….”

“왜겠습니까. 알비야 공작 전하께서 차기 교황으로 선포되실 것 같으니 이제야 줄을 대러 오는 자들이지요.”

커다란 모자에서 자꾸만 늘어지는 금색 술을 짜증스럽게 어깨 너머로 제친 솔란지아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저기 몰루아 주교 보이십니까? 지금껏 공의회가 열릴 때마다 지병을 핑계로 불참하던 작자가 이번 공의회에는 번듯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 좀 보십시오. 벌써부터 청백회 간부들에게 붙어 알랑대는 꼴을 보니 저 음흉한 속내가 대충 그려집니다.”

좁은 콧잔등에 주름을 잔뜩 잡은 솔란지아가 소리 죽여 불평했다.

“하나같이 역겨운 자들 뿐입니다. 저런 기회주의자들을 쫓아낼 수만 있다면 내 무엇이든 할 텐데요…. 잠깐, 저기 저분 산딜라 대주교가 아닙니까?”

솔란지아가 펄쩍 뛰었다. 눈을 휘둥그레 뜬 글리체리아도 유심히 한 지점을 들여다보았다.

“예…. 산딜라 대주교가 맞습니다.”

작달막한 키의 중년 여자가 수많은 성직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인파 사이로 얼핏 본 모습이나, 그처럼 작은 키에 다정다감한 인상, 무엇보다도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맹인 주교가 이 교회에 한 명 더 있을 리 없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뵙는 얼굴입니다. 마지막으로 뵌 것이 아마 4년 전이었지요?”

“그럴 겁니다. 카타리나 공…. 크흠, 아무튼 피치 못하게 원탁에서 물러나신 뒤로는 성도에 거의 걸음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솔란지아가 소태 씹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렇게 올곧으신 분이 원탁을 채워야 이치에 맞는 일일 텐데요. 캄페지오는 산딜라 대주교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물론 평화로운 도시긴 합니다만, 원탁에서 자리를 유지하시기엔 교구의 서열이 너무 낮아요.”

그것은 글리체리아도 공감하는 바였다. 작금의 원탁에는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를 차지한 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녀 자신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글리체리아는 한숨을 삼키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일반 수도사들의 흑색 의복, 주교들의 적색 의복, 몇 안 되는 추기경들의 자색 의복이 넓은 테라스를 어지럽게 메우고 있었다. 그중에는 산딜라 대주교나 몰루아 주교처럼 익숙한 얼굴도 있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이 더욱 많았다.

“계시던 때와는 많이 달라졌지요?”

글리체리아가 느끼는 생소함을 이해한다는 듯 솔란지아가 넌지시 물었다. 글리체리아는 머쓱한 기색으로 고개를 내둘렀다.

“내 기억이 흐려진 건지, 아니면 내가 알던 분들이 모두 은퇴를 하신 건지 도통 모르겠군요.”

“설마요. 전부 퀴테리아 추기경의 짓입니다. 알비야 공작 전하께서 교황 대리로 전권을 잡으시자마자 대폭적인 물갈이를 했어요. 작금에 이르러 살아남은 사람이라 함은, 그들과 손잡은 세력이거나 아니면 견제할 가치도 없는 잔챙이들 뿐…. 맙소사. 글리체리아, 고개 돌리십시오. 얼른!”

솔란지아가 닦달하기 무섭게, 우아하게 혀를 굴리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글리체리아! 나의 벗!”

자색 의복을 펄럭이며 달려온 클레멘스가 마치 왕을 숭상하듯 한쪽 무릎을 꿇고 기꺼이 글리체리아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순식간에 쏠린 이목을 따갑게 느끼며 글리체리아는 한숨처럼 웃었다.

“여전하십니다, 클레멘스.”

“여전하다니요? 제 달라진 점을 몰라보시겠습니까?”

의아한 표정을 짓던 글리체리아가 그의 한쪽 눈을 감싼 검은 안대를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아니, 안대는 왜…?”

“영광의 상처지요.”

“그게 도대체 무슨… 괜찮으신 겁니까?”

“물론입니다. 이렇게 그대를 다시 보게 되어 한없이 기쁠 뿐이지요.”

하나 남은 올리브색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대놓고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던 솔란지아가 투덜투덜 중얼거렸다.

“글리체리아가 돌아오면 뭐 합니까. 본인이 곧 쫓겨나게 생겼는데.”

“쫓겨나다니요? 누가요?”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클레멘스 당신이지요.”

차가운 눈으로 힐끗 그를 쳐다본 솔란지아가 선심 쓴다는 듯 목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글리체리아가 아나클레토의 후임으로 원탁에 복귀하는 것이 거의 확실시되었으니, 퀴테리아 추기경이 야손 놈을 앉힐 자리로 페아노라를 노릴 것은 자명한 이치 아닙니까? 페아노라는 원탁에서 서열도 높을뿐더러 거기 대주교께서 몇 년째 은퇴를 받아 달라 징징대고 계시니 말입니다.”

“오….”

클레멘스는 자기 얘기를 남 일처럼 들었다.

“내 게으름에 감화되어 똑같이 게을러진 페아노라의 사제들이 들으면 놀라 고꾸라질 일이로군요. 그것참 안된 이야깁니다.”

“저, 저…!”

인상을 구기며 발만 동동 구르던 솔란지아가 홧김에 등을 홱 돌려 버렸다. 그러고는 같이 가자며 글리체리아에게 눈짓을 하는데, 글리체리아가 민망한 얼굴로 고개만 살짝 저었다. 기함하여 눈을 부릅뜬 솔란지아가 클레멘스를 힘껏 노려보곤 씩씩거리며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잠시 그 뒷모습을 응시하던 글리체리아가 눈만 굴려 클레멘스를 보았다.

“클레멘스, 은퇴는 아니 됩니다.”

주름 없이 빳빳한 소매나 한가롭게 매만지던 클레멘스가 고개를 들었다. 글리체리아 특유의 엄격한 눈빛이 마주쳐 왔다.

“원탁의 한 자리가 중요한 시점입니다. 만일 페아노라의 대주교 자리가 넘어간다면 알비야 공작 전하께서 과반을 차지….”

“쉿.”

클레멘스가 입술에 검지를 붙였다. 그러고는 들으란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글리체리아, 나는 이미 모든 권력을 내려놓은 사람입니다. 이제 와 자리에 연연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아닌 체하면서 이쪽을 주시하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대는 모쪼록 솔란지아 추기경을 곁에서 잘 도와주세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대에게 많이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직 젊으니, 한 번쯤 헛된 믿음에 발목 잡히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지요.”

마지막 속삭임은 가까이 붙어 선 글리체리아나 겨우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글리체리아의 얼굴이 설핏 굳자, 클레멘스가 격려하듯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너무 염려치 마십시오.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다 보면 어느 날 바다에 이르러 있을 겁니다.”

눈웃음을 지어 보인 그는 때마침 테라스로 나오던 알비야 공작과 퀴테리아 추기경을 발견하곤 황급히 그쪽으로 달려갔다. 고귀한 추기경이 되어 그 누구보다 비굴하게 굽실거리는 꼴이었다. 주변 성직자들이 클레멘스의 뒷모습을 흘기며 수군거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글리체리아가 시름 가득한 눈을 돌렸다.

높은 성벽조차 내려다보이는 테라스 아래, 성도 오스피나의 중심 시가지가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곧 시작될 시가행진을 구경하기 위해 대로를 중심으로 빼곡하게 모인 사람들, 우렁차게 휘날리는 순백의 깃발, 흩날리는 오색의 색종이….

글리체리아는 아찔한 기분으로 눈을 감아 버렸다. 머잖아 다가올 파국이 눈꺼풀 안쪽을 어둡게 찔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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