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1화 (191/328)

“나한테 글리체리아 추기경은 언제나 원탁을 지키는 추기경이십니다. 성직자가 되고자 서임을 받았을 때부터 늘 글리체리아 추기경처럼 되고자 노력해 왔다고, 전부터 입이 닳도록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너무 대단하게 보십니다. 그래 봤자 원탁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간 한낱 수도사일 뿐인 것을요.”

글리체리아의 늙은 눈에 수심이 가득 어렸다. 입술을 꾹꾹 짓씹던 솔란지아가 덜컥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일단 제 사저로 가십시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재회의 술잔을 나누어야지요.”

“전에는 이별의 술잔을 나누자더니, 이번엔 재회의 술잔이에요?”

“자고로 탐보프인은 술 없이는 못 사는 법이거든요.”

한쪽 눈을 찡긋한 솔란지아가 씩씩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잔잔한 웃음을 머금었던 글리체리아의 얼굴에 문득 복잡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남몰래 내쉬는 한숨에 형언할 수 없는 심사가 깃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솔란지아의 으리으리한 마차를 타고 곧 사저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을 받은 하녀들이 기다렸다는 듯 따끈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술상을 내왔다. 부옇게 습기 찬 안경알을 소매로 닦고 다시 안경을 쓴 솔란지아가 신나게 술을 따라 냈다.

“고향에서 가져온 술입니다. 한번 드셔 보십시오.”

“어우… 냄새만 맡아도 센데요?”

“염려치 마세요. 두 번 권하진 않겠습니다.”

호탕하게 웃은 솔란지아가 한입에 술을 삼켰다. 눈에 띄게 작고 마른 체구임에도 솔란지아는 교회에서 손꼽히는 말술 중의 말술이었다.

그녀를 따라 조심스레 술잔에 입술을 붙였던 글리체리아는, 그러나 한 모금 삼키기 무섭게 연방 격한 기침을 터트렸다. 깜짝 놀란 솔란지아가 등을 두드려 주었지만 기침은 한참 뒤에야 겨우 진정되었다.

“바로 뱉지 그러셨습니까! 아니, 힘들 것 같으면 그냥 들지를 마시지!”

“한 번은 권하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말이 그렇단 거고…!”

갑갑하다는 듯 소리를 높였던 솔란지아가 글리체리아의 손을 만지곤 인상을 구겼다.

“손이 왜 이리 찹니까? 추우시면 난로를 들이라 하겠습니다.”

“아, 아니요, 됐습니다. 여름에 난로는 무슨….”

글리체리아가 황급히 소매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상함을 감지한 솔란지아가 왈칵 미간을 찌푸렸다.

“혹… 긴장하신 겁니까?”

소매에 감추어진 글리체리아의 손이 움찔했다. 파르라니 질려 가는 그녀의 안색을 집요하게 들여다보던 솔란지아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글리체리아, 내 이러실 줄 알았습니다. 분명 나는 추기경이고, 본인은 일개 수도사인데 옛날처럼 계속 편하게 대해도 되는지 고민하고 계시겠지요. 나는 그런 거 신경 안 쓴다고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네?”

솔란지아가 술상을 때리며 호통을 쳤다. 바짝 굳었던 글리체리아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어색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믿어 드리지요.”

“예. 제발 좀 믿어 주십시오.”

퉁명스럽게 대꾸한 솔란지아가 또다시 한입에 술을 털어 넣었다.

“정말이지, 옛날이 그립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시긴 했어도 존재만으로도 원탁의 무게를 잡아 주시던 만달 추기경, 그리고 늘 공명정대하려 애쓰셨던 당신까지… 요새 원탁은 실로 엉망진창이에요. 아십니까, 글리체리아? 이번에 퀴테리아가 내세우려는 새로운 원탁 추기경이 누군지.”

쾅! 솔란지아가 술상을 때려 부술 듯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야손입니다, 야손! 청백회의 간부인 그 야손이요! 그 빌어먹을 작자가 요새 얼마나 설치고 다니는진 그대도 익히 들어 아시겠지요! 허, 소문은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올 초에는 내 비리에 대한 신고가 들어왔다며 감찰이랍시고 내 사저에 침입하려 들었다니까요? 원탁은 그놈에게 감찰의 권한을 내린 적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핏대 선 솔란지아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었다. 글리체리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입에 안주를 넣어 주었다.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어찌 되긴요! 그 길로 퀴테리아에게 달려가 따졌지요! 그 짐승 같은 놈도 퀴테리아 앞에선 아주 얌전해집디다! 사도 앞에서도 그리 맹목적이진 않을 거예요!”

“그럼 그 야손이란 자가 원탁 추기경이 되는 데 반대하면 되지 않습니까? 청백회의 악행이 실로 지나치다면 그자에게 앙심을 품은 사람들이 원탁에도 제법 많을 텐데요.”

“그게… 그럴 수가 없습니다. 당분간은 알비야 공작과 한배를 타야 하니까요.”

꺼진 화산처럼 금세 시무룩해진 솔란지아가 웅얼거렸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 탐보프는 더 이상 엘피도 공작 전하를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아….”

“도대체 전하께선 왜 탐보프에서 그런 짓을…! 됐습니다, 됐어요. 이미 지나간 일에 열을 내 봤자 무슨 소용이겠어요. 문제는 내 쪽에 퀴테리아의 뜻을 꺾고 새로운 원탁 추기경으로 천거할 만한 인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딱 당신 같은 분이 계시면 좋을 텐데….”

솔란지아는 슬그머니 눈을 굴려 글리체리아를 살폈다. 그녀는 글리체리아가 은퇴한 뒤로 꾸준히 복귀를 설득하고 있었다. 비록 그럴 때마다 쌀쌀맞을 정도로 잘라 말하는 거절을 듣긴 했어도, 아직 글리체리아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글리체리아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평소 같았으면 특유의 엄격한 표정으로 자신은 이미 은퇴한 몸이며 어쩌고저쩌고를 설파했을 사람이 가만히 입 다물고 있다니.

잠시 어리둥절하였던 솔란지아는 설마 하는 심정에 한 번 더 찔러보기로 했다.

“…만약에 당신께서 복귀를 천명하신다면 그 누가 반대를 하겠습니까. 나를 따르는 콘체사 추기경과 람베르토 추기경은 물론이요, 지금은 나사 빠진 클레멘스조차 옛 친우가 돌아왔다며 아주 손뼉을 칠 겁니다. 그대의 공명정대함은 모두가 다 아니, 퀴테리아조차 더 이상은 그 야손 놈을 밀고 나갈 수 없겠죠.”

“…….”

“글리체리아. 혹 원탁에 돌아오실 마음이 있는 겁니까?”

글리체리아가 말없이 시선을 피했다. 황급히 술상을 넘어온 솔란지아가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간곡하게 말했다.

“그런 마음이 티끌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제발, 내 얼굴을 봐서라도 제발 돌아와 주십시오. 작금의 원탁에는 제대로 된 성직자가 하나도 남아 있질 않습니다! 죄다 정치꾼 아니면 사기꾼뿐이에요! 이대로 가다간 교회 전체가 청백회의 소굴이 되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이미 은퇴한 몸입니다. 원탁에는 다른 훌륭한 분들이 계시고요.”

“훌륭한 분들, 누구요. 클레멘스? 그자는 이미 돌아 버린 작잡니다. 멍청한 보나벤투라는 저 죽을 자리인지도 모르고 퀴테리아의 등만 졸졸 따라다니고 있으며, 다른 이들은 그저 시류에 편승해 제 살길만 궁리하는 머저리에 불과합니다. 그대처럼 교회의 앞날을 헤아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솔란지아가 울먹이며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쳤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요!”

글리체리아가 슬픈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솔란지아는 속에 맺힌 서러움을 토해 내듯 울부짖었다.

“당신께서 은퇴하실 적에 내게 원탁을 부탁하셨지만… 나는 그럴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난 그럴 수가 없어요. 도저히 폐하의 뜻을 거스를 수가… 나한텐 무립니다. 더는 내게 그런 무거운 짐을 떠넘기지 마세요. 원탁은 그대 같은 사람이 지켜야만 합니다.”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보다 못한 글리체리아가 솔란지아를 품에 안아 보듬어 주었다.

“내 잘못입니다. 그대의 사정을 알면서도 지나친 부탁을 했어요.”

품에 안긴 솔란지아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지그시 입술을 깨물던 글리체리아가 결심한 듯이 솔란지아의 어깨를 잡아 눈을 맞추었다.

“돌아가겠습니다.”

“…예?”

“원탁으로 돌아가겠어요. 부디 길을 터 주십시오. 그대의 짐을 나눠 들겠습니다.”

눈물이 번지던 솔란지아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파르르 떨리던 입술이 열렸다.

“진심…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정말로 돌아오시는 거죠? 예?”

“한 입으로 어찌 두 말을 하겠습니까. 진실입니다.”

글리체리아는 남몰래 주먹을 틀어쥐며 간신히 미소를 지어 올렸다.

“미약한 힘이나마 그대를 도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멀거니 글리체리아를 바라보던 솔란지아가 활짝 만개한 얼굴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귓가에서 기쁨에 가득 찬 솔란지아의 환호성이 터졌다.

그러나 그녀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글리체리아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는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주먹 쥔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가며, 손톱이 손바닥의 여린 살을 쿡쿡 찔러 왔다.

재회의 술자리는 야심한 새벽에 이르러서야 막을 내렸다. 혼자서 술독을 다 비운 솔란지아는 고주망태가 되어 실려 나갔고, 글리체리아는 하녀들의 조촐한 배웅을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장식 없이 소박한 마차가 성도의 고요한 밤거리를 내달렸다.

마차는 수목이 우거진 피아제 가문의 저택에 이르러 멈추었다. 미리 연락을 받은 이시도르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하인의 부축을 받아 겨우 마차에서 내리던 글리체리아가 갑자기 왈칵 토악질을 했다.

“이모님!”

깜짝 놀란 이시도르가 달려가 휘청거리는 글리체리아의 몸을 부축했다. 횃불이 번지는 그녀의 안색이 백지처럼 창백했다. 이시도르가 다급히 하인을 돌아보았다.

“의사를 불러와! 어서!”

“이시도르.”

글리체리아가 만류하듯 그의 소매를 잡았다. 가물거리며 뜨이는 눈에 쓰라린 고통이 가득했다.

“이모님….”

“내가…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솔란지아는 진심으로 나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다. 이건 내가 그녀를 기망하는 꼴이지 않니?”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가만히 글리체리아를 응시하던 이시도르가 그녀를 도로 마차에 들여보내곤, 자신도 뒤이어 올라탔다.

“일은 잘 풀렸습니까?”

“이건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모님. 솔란지아 추기경이 이모님의 복귀를 돕겠다 약속했느냔 말입니다.”

이시도르가 자꾸만 시선을 피하려는 글리체리아의 어깨를 꽉 붙잡고 또박또박 물었다. 얼결에 그를 마주하게 된 글리체리아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장 내일 날이 밝자마자 내 복귀를 추진하겠다더구나.”

이시도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고개를 편히 기대었다.

“이제야 마음을 좀 놓겠습니다. 솔란지아 추기경이 나서 준다면 퀴테리아도 크게 반대하진 못할 테죠. 탐보프가 위스누아와 한배를 탔다곤 하나, 어디까지나 엘피도 공작 전하와 척을 지게 된 상황에서 내린 어쩔 수 없는 결정. 탐보프의 지지가 반드시 필요한 퀴테리아는 솔란지아 추기경의 의견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이시도르, 난….”

글리체리아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멈칫한 이시도르가 순식간에 안타까운 표정을 꾸며 냈다.

“이모님. 가슴 아프지만 이리하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별 탈 없이 원탁으로 돌아가실 수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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