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회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에페소스 별궁의 보수 공사는 거의 끝나 가고 있고, 공의회 첫날에 진행될 시가행진 계획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교황 성하께선 일신상의 이유로 행진에 참여하지 않으실 테니, 전하께서 공식적으로 집전하는 첫 행사가 될 것입니다. 부디 만전을 기해 주십시오.”
“여부가 있겠어요.”
퀴테리아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경비대 교체에 대한 안건, 중앙 부처 중진들의 인사이동, 요사이 수상쩍은 클레멘스의 행적, 그녀가 차기 교황으로 우뚝 서자마자 시작될 본격적인 개혁 정책들….
어느덧 빳빳해진 입꼬리를 유지하며 탁자 밑에서 초조하게 손가락을 잡아당기던 비올라가 참다못해 입술을 열었다.
“엘피도 공작은요?”
무미건조하게 설명을 읊어 나가던 퀴테리아가 말을 멈추었다. 비올라가 성급하게 캐물었다.
“그자는 어떻게 처리할 건가요?”
“…모두 물러가라.”
곁에서 차를 따르던 하녀들이 허리를 숙이곤 방을 빠져나갔다. 퀴테리아는 그제야 비올라를 보았다. 비올라는 울상이었다. 조금 전까지 우아하게 미소 짓던 표정은 어디 가고, 죄 허물어져 속의 상처를 모조리 드러낸 얼굴만이 남아 있었다.
“…그분에 대한 여론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뱀을 죽인 만국의 영웅이십니다. 탐보프에서 내전을 공작한 일을 문제 삼아 원탁 추기경의 직위를 해제할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은 무립니다.”
“왜요! 그자가 오라버니를 죽였는데, 왜!”
“오라버니?”
분을 참지 못하고 노성을 지르던 비올라가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는 법이 없던 퀴테리아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전하께선 성가로 입적된 사도이십니다. 전하께서 오라버니라 부를 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엘피도 공작 전하뿐입니다.”
“맙소사, 언니!”
“자중하십시오, 전하. 저는 더 이상 전하의 가족이 아닙니다.”
비올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무너진 표정으로 서러움만 삼키던 그녀가 잠긴 목소리를 간신히 끌어 올렸다.
“그래서… 세르난도 오라버니의 죽음을 모른 척하시려고요? 엘피도 공작, 그자가 오라버니를 죽였다는 걸 세상이 다 알아요. 용이 내지르는 불길에 고통스럽게 가셨을 거라고요, 세상 누구보다 다정하고 올곧으셨던 우리 오라버니께서….”
비올라는 솟구치는 울음을 누르고 또 눌렀다. 눈물이 뿌옇게 얽히는 시야에 상냥하게 웃어 주던 오라비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절대 그자를 용서 못 해요. 그자가 오라버니를 태워 죽였다면, 나 역시 그자를 불길에 태워 죽이겠어요. 시커멓게 탄 시체를 조각내어 들개에게 먹이로 줄 거라고요. 이런 제 마음을 진정 이해하지 못하시겠어요?”
“…….”
“언니의 말씀대로 나는 더 이상 세르난도 오라버니의 가족이 아니겠지만, 언니는 여전히 오라버니의 가족이시잖아요.”
숫제 원망하는 것처럼 들리는 소리에 퀴테리아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내리깔린 눈에 잠시 떠올랐던 권태의 빛은 곧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늘 그렇듯 학습된 품위의 눈빛이 씌워졌다.
“저는 현실적인 가능성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언니, 제발….”
“하지만 전하께서 교황의 자리에 오르신다면, 그때의 현실은 지금과 다르겠지요.”
비올라는 젖은 눈을 멍하니 깜박였다. 퀴테리아가 반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모든 것은 전하께 달렸습니다. 세르난도 오라버니를 죽인 엘피도 공작에게 복수하는 것도,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여 이 땅에 정의를 세우는 것도… 모두 전하께서 교황이 되셔야만 가능한 일들이지요.”
“내가, 내가 무엇을 어떻게 더 해야….”
“전하께선 그저 지금까지 하던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 퀴테리아가 맞은편 비올라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화장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오늘은… 치장이 조금 과하시군요.”
비올라가 움찔했다. 퀴테리아의 서늘한 손끝이 이내 큼직한 루비 귀걸이가 매달린 비올라의 귓불에 닿았다.
“전하께서 화려한 치장을 즐기시는 건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전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성하께서 어찌 돌아가신 제네로사 5세를 떠올리시겠습니까?”
수치심에 얼굴이 벌게진 비올라가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일전에 클레멘스 추기경이 원탁에서 이런 말을 했었죠. 성하께선 엘피도 공작에게 교황의 자리를 물려주기 위하여 지금껏 사력을 다해 교국을 재건하셨다고.”
“…….”
“그의 말대로 성하께선 여전히 엘피도 공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셨습니다. 고드릭 수도사를 통해 이번 시가행진에 참여하라는 서신을 보내신 것만 보아도 그래요. 엘피도 공작이 묵살해 주어서 다행이지, 자칫 잘못되었다간 전하께서 주최하시는 첫 행사가 엘피도 공작의 화려한 귀환 행렬이 될 뻔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춘 퀴테리아가 정처 없이 흔들리는 비올라의 눈을 마주했다.
“교황이 되시려면 먼저 성하의 마음을 휘어잡으셔야 합니다. 성하의 마음만 잡으면 성도의 민심은 자연히 따라오게 되어 있으며, 성도의 민심을 잡은 자가 교황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즐기시는 화려한 치장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아요.”
퀴테리아의 매정한 손길에 루비 귀걸이가 거두어졌다.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귀걸이를 보며 비올라는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언니는 쓸모없는 것엔 누구보다도 비정한 사람이었다.
“죄, 죄송해요. 제가 자, 잘못했….”
“어찌 제게 죄송하다 하십니까. 신하 된 자로서 황망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퀴테리아가 힘없이 떨구어진 비올라의 고개를 잡아 올렸다. 그러곤 겁먹은 그녀를 마주 보며 빙긋이 웃어 보였다.
“앞으로 잘하시면 됩니다.”
“네….”
“차라 도련님께도 살갑게 대하시고요.”
정신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던 비올라가 멈칫했다. 저만 보면 퉁명스러워지는 얄미운 얼굴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가시 돋친 말이 튀어나왔다.
“걔는 왜요? 어떻게 사도가 된 건지 모를 정도로 잘난 점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앤데.”
“차라 도련님께서 요사이 엘피도 공작과 교류가 잦으십니다.”
“가족이니 뭐니, 피도 이어지지 않은 남남끼리 소꿉놀이나 하는 모양이죠.”
“전하께서도 하셔야 합니다, 그 소꿉놀이.”
비올라의 입술이 불만스럽게 다물렸다. 퀴테리아는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엘피도 공작과 알고 지낸 세월이 기니 차라 도련님께선 필시 엘피도 공작의 손을 들어 주실 겁니다. 아직 나이가 어리시고 외부 활동이 드물어 영향력이 거의 전무한 분이시니 대세에는 큰 지장이 없겠습니다만, 그럼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왜….”
“순진하신 분이니까요.”
비올라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시다 보면 좋은 정보들을 손쉽게 입수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아무리 평범하다 해도 사도는 사도. 교황 성하나 엘피도 공작에게 그토록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현재로선 저희 쪽에 아무도 없으니까요.”
“잘 모르겠어요. 그런 아무것도 모르는 애까지 이용해도 되는 건지….”
“상대는 뱀을 죽인 영웅입니다. 이 정도 노력은 들이셔야지요.”
비올라는 못내 불편한 마음을 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퀴테리아는 이후로 몇 마디 더 이어 가다가 업무를 핑계로 돌아갔다. 접견실에 혼자 남아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던 비올라는 답답한 마음을 풀고자 가까운 후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전부터 내리는 이슬비로 공기 중엔 축축한 습기가 가득 끼어 있었다. 엷은 안개 속에서 물 먹은 녹음이 풍성하게 부풀어 오르고, 젖은 흙과 젖은 풀잎에서 흘러나오는 산뜻한 향취가 갈수록 짙어졌다.
금세 기분이 좋아진 비올라는 드물게 편안해진 얼굴로 회랑을 거닐었다. 오롯이 혼자 된 것 같은 적막감이 아늑하게 그녀를 감싸 왔다. 사도가 되어 성궁에 들어온 뒤로 거의 느껴 보지 못한 평화였다.
그렇게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던 비올라는 문득 저편에서 걸어오는 차라를 발견했다. 차라는 시선을 발끝에 매달고 골똘히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팔짱을 끼고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올라는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뜨악하는 그를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쟤는 꼭 나만 보면 저런 표정을 짓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던 퀴테리아의 충고는 어느덧 까맣게 잊혔다. 비올라는 습관처럼 눈에 힘을 주며 매섭게 쏘아붙였다.
“뭐가 그렇게 바쁘신지 백날 밖으로 쏘다니던 분께서 오늘은 어쩐 일로 성궁에 붙어 계신다니?”
“뭐, 뭐라고?”
“나 지금 굉장히 기분 좋으니까, 방해하지 말고 못 본 척 지나가 줘. 제발 부탁이야.”
비올라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기가 막혀 부들부들 삿대질만 하던 차라가 차마 말은 잇지 못하고 둥그런 물체만 홱 던졌다.
“이게 뭐야?”
얼떨결에 물건을 받은 비올라가 얼굴을 구겼다. 어디서 주워 왔는지 아주 못생긴 인형이었다.
“뭐긴 뭐야, 선물이지!”
“선물? 이딴 게?”
“그래, 너한텐 그딴 게 잘 어울리니까 선물이다!”
분에 차 애꿎은 발만 굴리던 차라가 꽥 소리를 지르곤 모퉁이를 돌아가 버렸다. 어이없다는 듯 그 뒷모습을 응시하던 비올라가 다시 못생긴 인형을 보았다. 바닥에 미에투넨이 적혀 있는 걸 보니 일전에 탐보프에 갔을 적에 사 온 모양이다.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멀리서 뒤따라오던 하녀들이 소란을 듣고 달려왔다. 비올라가 짜증스럽게 인형을 내던졌다.
“저거 갖다 버려.”
“네.”
“잠깐.”
인형을 주워 들던 하녀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비올라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버리진 말고, 창고에 박아 놔.”
하녀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산책이고 뭐고 흥이 다 깨져 버린 비올라는 한숨을 삼키며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후원의 무성한 수풀 사이로 익숙한 태가 언뜻 비쳤다.
“솔란지아 추기경이랑….”
누구지?
비올라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성도에 올라오셨으면 나한테 먼저 연락을 주셨어야지요!”
흥분한 솔란지아가 목청을 높였다.
“내가 봄에 연락을 드렸을 땐 이번 공의회에 절대 참석하지 않겠다고 못 박으셨잖습니까! 어떻게 나한테까지 비밀로 하실 수가 있어요? 내가 그리도 못 미더우셨습니까? 정말 너무하십니다, 너무하세요!”
“솔란지아, 그때는 진심으로 참석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갑자기 마음이 변한 것을 갖고 이렇게 타박하시면 참 곤란해요.”
“곤란하시라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글리체리아 추기경이 이토록 나와의 우정을 가볍게 여기실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요!”
“내가 언제 그대와의 우정을 가볍게 여겼다고 이러는 건지…. 그리고 솔란지아, 나는 더 이상 추기경이 아닙니다. 은퇴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그래요.”
글리체리아가 힘없이 웃었다. 씩씩거리며 정면만을 쏘아보던 솔란지아가 흘끗 눈을 굴려 그녀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