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부하가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속이 갑갑해진 막시모가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굼뜬 니체타의 엉덩이를 걷어차서 쫓아 보낸 지 벌써 반나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뉘엿뉘엿 지는 해를 보자니 가시 방석 같은 이 상황이 더욱 불편하게만 다가왔다.
“너도 가서 최대한 빨리 오시라 전해.”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부하가 잽싸게 복도를 달려 나갔다.
막시모는 바윗덩이를 얹은 듯 무거워진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벌겋게 지는 노을 사이로 성문의 그림자가 무디게 내려앉고 있었다.
예후르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또다시 한참이 지난 후였다.
고요한 야밤에 작은 소란을 피우며 나타난 그는 느긋하게 가죽 장갑을 벗으며 막시모를 맞이했다.
“손님이 와 계신다고?”
기약 없는 기다림 끝에 쏘아붙일 분노의 동력조차 잃어버린 막시모는 맥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예후르는 말고삐를 그에게 넘기곤 성안으로 들어갔다. 촛불이 드문드문 밝히는 어두운 복도를 거침없이 나아가던 구둣발이 예기치 않게 멈추었다.
몬틸로 백작이 접견실 앞에 몸소 나와 있었다.
“전하.”
백작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던 예후르가 다시 발걸음을 뗐다. 그러고는 고개 숙인 백작을 스쳐 접견실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오셨다더니 백작이었군요.”
예후르는 망토를 벗어 소파 등받이에 걸쳐 놓았다. 백작은 그제야 숙였던 고개를 들고 접견실로 들어왔다. 어두운 사위에 딸깍, 문 닫히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파묻히듯 소파에 앉은 예후르가 편안하게 턱을 괴며 백작을 돌아보았다. 백작은 여전히 어두운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사냥을 다녀오셨습니까?”
“네.”
창밖에선 횃불을 든 하인들이 바삐 사냥물들을 나르고 있었다. 백작의 시선이 밧줄에 묶여 줄줄이 끌려가는 죽은 새들의 사체에 닿았다.
“새는….”
“천사가 깃든다 하여 성도에서는 사냥이 금지되죠.”
“…….”
“비밀로 해 줘요.”
횃불이 닿아 신비롭게 일렁이는 금빛 눈이 매끄럽게 휘어졌다. 백작의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급한 걸음으로 다가온 백작이 갑자기 예후르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전하. 저희를 살려 주십시오.”
예후르는 턱을 괸 채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낮게 억눌린 백작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알비야 공작 전하와 퀴테리아 추기경 예하께서 저와 저희 부족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계십니다. 이미 바스토뉴의 용병대와 접선을 마치셨다고 하니, 당장 이번 공의회에서 저희 이스파갈족을 추방하란 의견을 개진하실 겁니다. 이대로는 추방을 면치 못합니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백작의 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예후르가 크게 감흥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에겐 사막 이북의 유이한 용 부대가 있습니다. 라발이든 탐보프든 그대를 원하는 곳은 많을 텐데요.”
“백여 년간 벌어졌던 성전의 상처가 아직 이 땅에 남아 있습니다. 교회의 윤허가 없다면 저희는 이 땅의 어딜 가든 죽어 마땅할 이교도이며, 대대로 조상들의 원수였던 이민족일 뿐입니다. 교회에서 추방되어 오갈 데 없어진 저희는 결국에 타국 황제들의 노예가 되어 골수까지 빨아 먹힐 겁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사막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들이 적국의 땅에서 사람으로 발붙이고 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교회가 방패막이 되어 준 덕분이므로. 교회의 보호를 잃고 교국에서 추방된 그들이 어떤 종말을 맞이할지는 빤했다.
“하필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이유는 뭡니까?”
“알비야 공작 전하와 척을 지셨으니까요.”
“나는 교황의 자리에 관심이 없습니다.”
“전하의 의사가 어떻든, 알비야 공작 전하께선 사력을 다해 전하를 축출하려 드실 겁니다. 전하께서 원탁에 버티고 계신 이상 교황의 자리는 요원할 테니까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생각에 잠긴 듯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예후르의 시선이 미끄러지듯 그에게로 내려왔다.
“만약 내가 그대를 돕는다면, 그대는 내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제 모든 것을요.”
슬그머니 들린 백작의 눈이 선득하게 일렁였다.
“교황 성하께 드렸던 충성, 모두 전하께 바치겠습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사막의 전사들과 하늘 아래 무서울 것 없는 용들이 전하의 뒤를 받칠 것입니다.”
“이스파갈족의 용맹함은 나도 압니다. 하지만 그대라면 내가 지금껏 경비대를 멀리했던 이유도 잘 알고 있겠지요.”
횃불이 들이치는 백작의 얼굴 한쪽이 무섭도록 딱딱하게 굳었다. 예후르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나는 그대를 도울 수 없습니다.”
백작이 힘껏 주먹을 쥐었다. 으득, 이가 세게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온 듯도 했다. 예후르는 핏대 선 백작의 목 언저리를 응시하며 무심히 말을 이었다.
“그대가 충성을 바쳐야 할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예?”
고개를 푹 수그려 좌절감을 삼키고 있던 백작이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공의회에서 일을 하나 벌일 작정입니다. 이스파갈족을 추방하자는 안건쯤이야 순식간에 날려 보낼, 아주 큰 일.”
비밀을 속삭이듯, 묘한 미소를 머금은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겁니다. 그대가 온 힘을 다해 지켜야 하는 주인이 누구인지.”
백작은 멀거니 그를 바라보았다. 절반은 횃불에, 절반은 어둠에 잠식된 그의 얼굴이 기묘하게 다가왔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먼 고향, 모래 바람 휘날리는 사막에 세워진 신상처럼 한없이 경배하게 되는, 이 기이한 감각.
백작은 홀린 것처럼 입을 열었다.
“전부터 여쭙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메마른 바람결에 실려 온 어느 사막의 소식.
“수사에서 왔다고 하셨지요. 수사라면 저도 좀 압니다. 사막을 지배하는 대부족 중 하나인 헤라트족의 거점이죠. 전하께서 교황 성하의 인도를 받아 교국으로 오셨을 즈음, 저도 사막으로부터 이상한 소문을 하나 들었습니다.”
“…….”
“죽어 태어난 소년에 대해 말입니다.”
절반만 보이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백작은 말라붙은 입술을 혀로 축이며 말을 이었다.
“듣기론 어미의 배에서 이미 숨이 멎은 채로 나왔으나, 도래한 새벽과 함께 숨이 돌아와 우렁찬 울음을 터트렸다지요. 족장은 그 아이를 악마로 규정하여 죽이려 들었지만, 수사의 빈민들이 아이를 숨겨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신을 숭배할 기회조차 잃어버린 빈민들에게 살아 있는 신으로 대접받았다고요.”
사막의 신전은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신 하나에 신전 하나. 수많은 신을 모시는 사막에는 그만큼 신을 모시는 신전도 많았으나, 빈민들이 닿기엔 지나치게 높고 정결했다. 기적을 일으킨 소년이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받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백작은 숨을 고르며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예후르의 금안을 집요하게 마주 보았다.
“전하께선… 이 소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생각하냐니요.”
“죽어서 태어난 소년이 되살아난 것 말입니다.”
미동 없던 예후르의 입술이 살짝 뒤틀렸다.
“망자가 되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백작이 움찔했다. 뒤틀렸던 입술이 점차 기묘한 선으로 미소를 그려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문이 맞다면… 죽은 몸에 새 생명이 깃든 것이겠지요.”
횃불이 일렁였다. 고요한 미소가 깃든 그의 얼굴은 여전히 절반만이 보였다. 하지만 보이는 곳 역시 보이지 않는 곳과 마찬가지로 깊고 아득했다.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던 백작이 무릎 꿇은 그대로 고개를 숙여 낮게 읍했다.
“방금의 대화는 모두 잊겠습니다.”
둥글게 굽어진 백작의 등 위로 까마득한 시선이 내려앉았다. 공손하게 몸을 일으킨 백작이 시선을 내리깔곤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나가기 직전, 등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몬틸로 백작. 이 땅의 사람들이 어찌 신이 아닌 천사를 섬기는지 압니까?”
백작이 뒤를 돌아보았다. 소파에 파묻혀 비스듬히 턱을 괸 어두운 옆모습이 창밖의 횃불을 배경 삼아 불그스름한 윤곽을 그려 내고 있었다.
“수많은 신을 모시던 그대의 눈엔 조금 이상하게 비쳤을 텐데요.”
“…그저 문화의 차이라고만 여기고 있습니다.”
“현명한 대답입니다. 하지만 정답은 아니군요.”
그가 고개를 돌렸다. 시커먼 역광이 드리운 얼굴이, 어째서인지 웃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은 내려오시지 않습니다. 그저 그곳에 존재하실 뿐이죠.”
“…….”
“하지만 천사는 다릅니다. 이 낮은 곳으로 내려와 사람을 돌보고 이끄시지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대의 눈엔 어떤 세상이 더 나은 것 같습니까?”
백작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
공의회를 한 달 남짓 남겨 둔 앙겔리카 성궁은 날이 갈수록 분주해지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공의회를 준비해야 하는 중앙 부처의 실무진들은 물론이요, 성궁 방비에 만전을 기해야 하는 근위대도 그러했다. 거기에 성궁에서 가장 바삐 움직이고 있는 세력을 하나 더하자면, 누구나 청백회를 들 것이었다.
타락한 교회를 정화하자는 청백 운동에서 시작된 청백회는 작금에 이르러선 퀴테리아 추기경의 든든한 세력 기반이 되어 주고 있었다.
그들이 퀴테리아 추기경의 동생인 알비야 공작을 교황으로 추대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 다행히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엘피도 공작이 탐보프에서 헛발질을 해 준 덕분에, 다가오는 공의회에서 알비야 공작을 차기 교황으로 세우려던 그들의 계획은 장밋빛 미래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나클레토의 후임으론 야손을 천거할 생각입니다.”
퀴테리아가 차를 마시며 넌지시 흘리는 말에 비올라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야손이라면, 청백회의 그 간부요?”
“네. 일전에 전하께도 인사를 시킨 적이 있지요.”
비올라는 망설이며 입술을 조금 달싹였다. 그녀는 친언니인 퀴테리아를 누구보다 믿고 따랐지만, 퀴테리아가 거느린 청백회의 일원들은 못내 거북했다. 광적으로 골몰하는 그들의 신앙은 자칫 잘못하다간 주인도 벨 것처럼 위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솔란지아 추기경에게도 이미 동의를 받아 냈습니다. 솔란지아 추기경을 따르는 콘체사 추기경과 람베르토 추기경의 표까지 합하면 원탁의 과반을 차지하니, 무리 없이 통과될 것입니다.”
“…….”
“전하?”
“네?”
화들짝 놀라 반문했던 비올라가 애써 미소를 지어 올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추기경의 뜻대로 하세요.”
그래도 언니가 청백회의 목줄을 단단히 잡고 있으니 별일은 없겠지.
비올라는 애써 태평하게 생각하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감미로운 차향이 마음속에 잔재하던 불안감의 찌꺼기까지 모두 녹여 버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