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8화 (188/328)

“하, 하지만….”

“염려하지 말렴. 넌 잘해 낼 거야.”

당장이라도 알틴을 찢어 죽일 듯한 눈으로 입으로는 잘도 격려를 했다.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아 있던 알틴이 망설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울음이 끓어오르는 목이 연신 꿈틀거렸다.

“마지막으로 제 아들… 한 번만 안게 해 주세요.”

빤히 그녀를 보던 페기가 고개를 돌렸다. 알틴이 발작하듯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전하,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만요!”

“끌고 나가.”

“전하! 전하!”

알틴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끌려 나갔다. 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가 먼 복도에서도 그치질 않았다. 잠에서 깨어난 아기가 엄마를 찾아 울자 페기는 인상을 찌푸리며 마샤에게 아기를 넘겼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황혼이 짙게 드리워진 붉은 길가로 알틴이 내팽개쳐졌다. 서럽게 울며 다시 들어오려 할 때마다 기사들의 억센 손에 밀려 나갔다. 몸으로 밀고 들어오려 해 봤자 더러운 진흙탕을 나뒹굴 뿐이었다.

“나쁜 년….”

문득 작게 들려오는 욕지거리에 페기가 고개를 돌렸다. 우는 아이를 안아 달래던 마샤가 흉흉한 표정으로 창밖을 노려보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하. 전 저 여자랑 달라요. 설사 누가 천만금을 준대도 절대 전하를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

아직 때 묻지 않은 눈이 결연한 빛을 띠었다. 물끄러미 그 눈을 들여다보던 페기가 말없이 그녀를 외면했다. 마샤가 우는 아이를 어르며 황급히 다가왔다.

“정말이에요, 전하. 전하께서 절 그 지옥에서 꺼내 주셨는데 어떻게 제가 전하를 배반하겠어요!”

“…….”

“전하!”

다급한 외침에 아기가 크게 울었다.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기라도 했는지 알틴이 화들짝 이쪽을 올려다보더니, 문 앞을 가로막는 기사들 틈을 악바리처럼 파고들었다. 그렇게 또다시 진창에 처박히는 꼴을 페기는 물끄러미 지켜만 보았다.

“…마샤.”

“네.”

“만약 누가 천만금으로 널 사주하려 들면 내게 와 고하렴. 나는 그 곱절을 주마.”

마샤의 말문이 막혔다. 페기는 입술을 닫아걸었다. 지치지도 않고 수차례 달려들던 알틴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훌쩍이고 있었다. 저 멀리에서 허름한 차림의 하녀들이 달려왔다.

경악하여 알틴을 에워싼 하녀들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부축했다. 산발이 된 긴 머리, 진흙투성이 맨발로 바로 선 알틴이 허망하게 무너진 눈을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페기는 더없이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했다.

파들거리며 흔들리던 알틴의 눈이 결국에 힘을 잃고 조촐하게 내리깔렸다. 단념하고 돌아서는 등이 참고 참았던 울음으로 조금씩 떨려 왔다. 불어오는 바람에 뒤엉킨 갈색 머리가 초라하게 나부꼈다.

페기는 절뚝이며 멀어지는 알틴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힘없이 끌리는 뒤꿈치 너머로 붉은 노을에 휘감긴 그림자가 고단하게 늘어졌다.

어쩐지 저 뒷모습만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크리상즈 공작의 봉작을 받은 한 기사가 거센 화마에 집을 잃었다. 하인들의 손에 이끌려 대피한 늙은 기사는 살아남았으나, 몇 해 전 들어온 젊은 후처와 갓난아기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기사 앙드레의 후처 나딘느는 그렇게 죽음으로 기록되었다.

***

교국 남쪽에 위치한 보베시아 숲은 일찍이 울창한 수림과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귀부인들은 삼림욕을 즐기고 신사들은 사냥을 위해 찾아오는 이곳은 오래전 라발의 용병대에 의해 쓸려 나갔던 전적이 있는데, 30년의 세월은 지난 상처 위로 이끼를 덮으며 고요한 평화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인근을 다스리는 포렌세 남작 역시 그 시절은 전혀 모르는 젊은이였다. 남작의 주 일과는 각지에서 내려오는 귀족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열거나, 숲지기를 감독하는 일 정도였다. 때로는 무료해도 대개는 한가로운 나날.

그러나 반년에 한 번 정도, 안개가 갈라놓곤 하는 아그레다 산의 세투발에서 경비대 훈련을 알리는 통보가 오곤 했다. 그러면 남작은 숲지기들을 불러 모아 숲의 출입을 통제하였는데, 머지않아 머리털을 쭈뼛 솟게 하는 용들의 울음소리가 아득히 울려 왔다.

거친 날짐승이 싫어 사냥조차 기피하는 남작은 당연히 그런 날들을 끔찍하게 여겼다. 한번 시작되면 몇 날 며칠 이어지는 경비대 훈련에 따라 밤낮없이 들려오는 섬뜩한 용들의 울음소리에 수일씩이나 밤잠을 설치곤 했으니 말이다.

생에 이토록 끔찍한 순간은 다시 없으리라 매해 곱씹던 남작은, 그러나 요 며칠 지속되는 좌불안석에 생각을 달리하고 있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용이 아니었다.

중앙에서 내려오신 귀한 손님이었다.

“이보게, 막시모.”

어젯밤도 뒤척이며 보냈던 남작이 눈 밑에 검은 그늘을 드리운 채로 막시모를 붙잡고 나섰다.

“전하께선 도대체 어찌하실 심산인가? 응? 내가 이러다 간담이 말라 죽게 생겼어.”

“뭐가 그렇게 걱정되십니까. 전하께서 딱히 각하께 무얼 바라고 계신 것도 아닌데.”

“전하께서 이렇게 기약 없이 머물고 계시는데 내가 어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작이 몹시 애타는 심정으로 가슴을 두들겼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어 막시모가 낮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지 말고 자네가 직접 전하께 아뢰는 것이 어떠한가? 전하께서 몸소 몬틸로 백작을 찾아가 모범을 보이시라고 말일세.”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

“뭐가 쉬운 일이 아니야! 몬틸로 백작은 저기, 저 코앞 세투발에 머물고 있는데! 전하께서 진정 사냥이나 하러 여기까지 오셨겠나? 굳이 이 궁벽한 곳까지 찾아오신 이유가 저 경비대가 아니면 무엇이겠느냔 말이야!”

세투발은 교국 경비대의 거점.

막시모는 창밖으로 아득한 능선을 따라 세워진 요새를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라고 해서 며칠째 남작의 성에서 할 일 없이 돌멩이나 차고 싶겠는가.

그럼에도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은 전적으로 그의 주인인 엘피도 공작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눌러앉으시겠다고요?”

닷새 전인가, 엿새 전인가…. 막시모는 이젠 기억도 흐릿한 어느 날을 떠올렸다.

“요새로 올라가기 싫으시다면 제가 가서 몬틸로 백작을 불러오겠습니다. 그마저 싫다고 하진 않으시겠죠?”

“싫다면?”

“전하….”

그는 카타리나 공작을 되찾은 뒤로 확실히 예전의 뻔뻔스러운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자칫하면 베일 듯 예리한 단면이 사라진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나, 이럴 때마다 맘속으로 한 대 콱 쥐어박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기르는 개도 가끔은 이름을 불러야 옵니다. 몬틸로 백작은 개도 아닌데 왜 알아서 찾아오기만을 바라시는 겁니까?”

“막시모. 나와 몬틸로 백작은 어떤 관계였지?”

“그렇게 물으실 것도 없는 관계였죠.”

먼 사막에서 온 예후르는 같은 사막 출신인 이스파갈족을 의식적으로 멀리해 왔다. 사막인 특유의 그을린 피부를 이유로 엮어 대는 이들이 그렇지 않아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갑자기 찾아간다면 몬틸로 백작이 무슨 생각을 하겠어?”

“알비야 공작에게 밀리니 이제야 날 찾아오는구나 싶겠죠.”

“그리고?”

“사정이 급한 건 저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으니 좀 더 주도적으로 협상을… 아.”

그가 묘한 미소를 지어 올렸다.

“알았으면 나가 봐.”

그렇게 입 다물고 나왔던 기억을 떠올리며 막시모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판단이 옳다는 건 안다. 하지만 공의회가 하루하루 다가오는 이 시점에 변방에 눌러앉아 버리니 마음이 초조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주인께선 이 속 깊은 수하의 마음도 몰라주시고, 산이고 들이고 고삐 풀린 듯이 나돌아만 다니시니.

세상 모든 근심을 짊어진 얼굴로 한숨만 짓던 막시모는 층계참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니체타를 발견하곤 툭툭 찼다.

“일어나라.”

“아으… 클로디아, 그만해….”

“이 녀석은 왜 이런 데서 자고 난리야…. 야, 안 일어나?”

오만상을 찌푸리며 애벌레처럼 몸을 둥글게 만 니체타가 슬쩍 실눈을 떴다. 팔짱을 낀 막시모가 한심하단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막시모 씨?”

“그래, 막시모 씨다. 전하께선 어디 계셔?”

“전하야 사냥 나가셨죠….”

“또?”

막시모가 인상을 썼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평생 사냥을 즐기는 법이 없던 사람이 근래 들어 사냥에 미친 것처럼 눈만 뜨면 활을 들고 나가니, 원.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으신 게 분명한데….”

“늦바람이라도 드신 거겠죠, 뭐.”

까치집이 된 머리를 긁적이며 허허 웃던 니체타가 반색하며 막시모의 등 뒤를 가리켰다.

“어, 돌아오신 모양인데요?”

막시모는 입에 문 갈대를 질겅거리며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렸다. 구름이 가득 낀 흐린 하늘 아래, 호위 기사들을 조촐하게 거느린 무리가….

그의 입에서 갈대가 툭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건너편 계단으로 뛰어내린 막시모가 급박하게 외쳤다.

“니체타! 빨리 나가서 전하 모셔 와!”

성문을 넘은 무리의 선두에 선 자는 다름 아닌 몬틸로 백작이었다.

몬틸로 백작.

이스파갈족의 젊은 족장으로 십수 년 전 사막의 권력 투쟁에서 패하여 오갈 데 없어진 무리를 이끌고 교국으로 귀순한 자였다.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교황의 신뢰를 얻어 낸 그는 경비대장의 직무와 백작의 작위를 받아 순식간에 교국의 심부로 진입했다. 고속 출세와 출신으로 말미암아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의외로 그와 관련해 쓸데없는 소란이 일어난 적은 거의 없었다.

모두 백작이 영리하게 처신한 덕분이었다.

그는 자신의 위태로운 처지를 잊지 않았으며, 온통 적뿐인 교국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오로지 교황에게 충성하고, 직무에 성실한 모습을 보이는 것뿐임을 알았다. 그들이 데려온 용은 사막 이북의 유이한 용 부대가 되어 타국의 두려움을 샀으며, 이 점이 바람 앞의 등불 같던 교국의 방비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막시모는 오래전부터 몬틸로 백작을 주시해 왔다. 언젠가 예후르가 교황이 되면 필연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관찰했던 몬틸로 백작은 호방하면서도 섬세한 의인. 기회만 닿는다면 자신의 주인과도 큰 무리 없이 어울릴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이제 와 보는 몬틸로 백작은 예전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접견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수척한 뒷모습을 훔쳐본 막시모가 조용히 복도로 나가 부하를 채근했다.

“전하께선?”

“지금 오고 계신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