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7화 (187/328)

그녀가 향한 곳은 어린 아들이 잠들어 있는 요람이었다. 행여 아들이 깰까, 촛불마저 멀찍이 두고 온 보람이 없게 아들이 양팔을 뻗으며 안아 달라 보채기 시작했다.

나딘느는 기꺼이 아들을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토실토실한 등을 쓰다듬으며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들. 이 엄마는 아들만 있으면 돼.”

멀리 있는 촛불이 모자의 그림자를 길게 비추었다. 높게 난 창 너머로 조각달이 기울어 가고 있었다.

이튿날부터 나딘느는 칩거에 들어갔다.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부인. 어디가 아픈지 제발 말을 하시오.”

그러나 앙드레의 재촉에도 나딘느는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어디 특별히 아픈 것이 아니라 그저 요사이 손님을 너무 받아 피로가 쌓였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러자 앙드레는 당장에 대문을 걸어 잠그고 처와 함께 칩거할 것을 선언했다. 나딘느도 거기까지 말리진 않았다.

기실 앙드레는 나딘느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지 오래였다. 그녀의 관심은 오직 옹알이도 겨우 하는 아들에게 가 있었다. 나딘느는 아침에 눈을 떠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아들의 곁을 지켰다. 어린 아들의 똥오줌을 치울 때조차 그녀의 얼굴에는 환희가 가득했다.

“아들이 빨리 자랐으면 좋겠어. 그러면 이 엄마랑 나들이도 가고, 파티도 열고… 참 즐거울 텐데….”

나딘느는 생각만으로도 기쁨이 차오르는 상상을 만끽했다. 낮잠이 든 아들은 무슨 꿈을 꾸는지 통통한 입술을 연신 오물거리고 있었다. 나딘느는 아들의 하얀 뺨에 입을 맞추곤 그 옆에서 선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아들은 멋진 기사님으로 자라나 있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세상은 온통 붉은 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아직 졸음기 가시지 않은 얼굴로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던 나딘느가 고개를 돌렸다. 빈 요람에 잠시 머물던 시선이 튕겨져 나가듯 창밖으로 돌아갔다.

“마님! 마님!”

나딘느는 하녀들의 부르짖음도 무시하고 정신없이 저택을 달려 나갔다. 맨발로 수없이 진창을 밟은 끝에 으리으리한 객관 앞에 도착했다.

“추기경! 여기 추기경 있잖아! 당장 비키지 못해!”

나딘느는 머리를 풀어 헤친 광인의 모습으로 객관 앞을 지키던 호위 기사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힘으로는 상대가 안 되자 갑옷 사이로 드러난 기사들의 목덜미를 꼬집고, 있는 힘껏 깨물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뜨악하는 눈빛을 보냈으나 알 바 아니었다.

난동이 잦아든 것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때였다.

“그만하거라.”

나딘느는 거세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 높은 계단 위에서 클레멘스가 뒷짐 지고 점잖게 내려오고 있었다.

“추, 추기경….”

“예하라 불러야지.”

수년 전 헤어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무가치한 존재를 대하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호위 기사들이 설설 그의 눈치를 보며 물러섰다. 휘청거리며 주저앉은 나딘느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아들 어디 있어.”

“…….”

“내 아들 어디로 데려갔냐고!”

악을 지르는 소리에 호위 기사들이 절로 인상을 썼다. 유일하게 표정을 구기지 않은 클레멘스가 뜻 모를 눈으로 나딘느를 응시하더니,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다시는 보지 않는 편이 좋으리라 여겼건만….”

쓴웃음이 미풍처럼 그의 입가를 스쳤다. 그러나 순식간에 표정 없는 얼굴로 돌아온 클레멘스가 몸을 돌리며 객관 안쪽을 고갯짓했다.

“네 아들은 안에 있다.”

클레멘스가 다시 홀홀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의 뒷등을 응시하던 나딘느가 부스스 몸을 일으키곤 절뚝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눈앞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계단이 막막하도록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악착같이 계단을 올라 들어간 방 안에서 그녀는 차마 아들에게 다가설 수 없었다.

불길한 노을이 집어삼킨 방 안에는 젊다 못해 어려 보이는 여자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여자가 등진 창으로 들이치는 노을빛에 방 안 빼곡히 들어선 가구들의 그림자가 하느작거리며 춤을 추었다.

나딘느는 귀신을 본 듯한 표정으로 그늘진 여자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만 보았다.

“오랜만이구나, 알틴.”

품에서 잠든 아이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여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물린 여자의 입술이 고아한 선으로 휘어졌다.

“그동안 잘 지냈니?”

알틴은 그만 목매어 죽고 싶어졌다.

페기는 하얗게 얼어붙은 알틴을 응시하다, 사선으로 시선을 미끄러트렸다. 클레멘스가 문을 살짝 열고 호위 기사들을 손짓하고 있었다. 소리 없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기사들을 눈여겨보던 페기는 별안간 들려오는 철퍼덕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알틴이 망연자실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산발이 된 머리칼 사이로 정처 없이 흔들리는 눈이 보였다. 그러고는 별안간 주체할 수 없이 온몸을 떨며 흐느끼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흐흐….”

우는 듯 웃는 듯 기묘한 소리였다. 그치지 않는 흐느낌에 목이 메는지 컥컥거리는 기침 소리가 섞여 들었고, 기괴하게 올라붙은 광대뼈에 짓눌려 일그러진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길게 찢어진 입술이 연신 파들파들 떨렸다.

돌연 알틴이 네 발로 습격해 왔다. 곤두세운 손끝으로 페기의 얼굴을 긁어 버리려는 찰나, 기사들이 달려들어 그녀의 사지를 속박했다. 기사들의 육중한 몸집에 깔린 알틴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발버둥을 쳤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얕은 한숨을 내쉰 페기가 잠든 아기를 품으로 끌어당겨 귀를 막아 주었다. 그 모습에 알틴이 희번덕 눈을 부릅뜨며 안간힘을 다해 손을 내뻗었다.

“내 아들…!”

“불쌍하기도 하지. 너 같은 악질을 어미로 두었으니.”

무심하게 읊조린 페기가 잠결에 미간을 찌푸리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다행히 너와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구나.”

“너, 너 뭐야! 네가 뭔데 여기 있어! 넌 죽었잖아! 칼 맞아 뒈졌잖아!”

고래고래 내지르는 소리에 페기가 얌전히 혀를 찼다. 알틴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모습으로 미친 듯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직 꿈이지, 그런 거지. 내가 아직 잠에서 못 깬 거야. 세상에, 무슨 악몽이 이래. 미친년아, 빨리 깨! 깨어나라고!”

알틴은 악을 쓰다 못해 바닥에 이마를 쿵쿵 찧기 시작했다.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나온 피가 얼굴을 시뻘겋게 적셨다. 그녀를 억누르던 기사들이 조금씩 질린 표정을 했다.

“알틴.”

“제발 좀 깨어나자, 응?”

“알틴.”

“왜 안 깨어나는 거야, 왜!”

“알틴.”

“젠장, 닥쳐! 그 입으로 날 부르지 말란 말이야!”

“네 눈앞에서 이 아이를 죽여야 좀 얌전해지겠니?”

알틴의 몸부림이 멈추었다. 석상처럼 굳어 버린 알틴이 허옇게 죽어 버린 눈으로 페기를 바라보았다. 메말라 갈라진 입술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토할 것처럼 부들거렸다. 그러다 맥없이 허물어진 얼굴에 문득, 실낱같은 미소 한 자락이 가까스로 올라왔다.

“저, 전하….”

알틴이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손을 뻗었다.

“전하, 전하….”

페기는 힐끗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악착같이 내뻗은 손끝이 그녀의 치맛자락 앞에 당도해 있었다. 페기는 미련 없이 발을 뒤로 당겼다. 순식간에 치맛자락이 저 멀리로 물러나자, 알틴의 손이 움찔하며 오므라들었다.

파들거리는 주먹을 갈무리한 알틴이 순식간에 환한 웃음을 머금고 얼굴을 들어 올렸다.

“정말 전하세요?”

“…….”

“정말 돌아가신 전하가 맞아요? 살아 돌아오신 거예요? 어떻게요? 왜?”

흡사 순진한 어린애처럼 캐묻는 알틴을 응시하던 페기가 음울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따위로 죽고, 내가 눈이나 제대로 감을 수 있었겠니?”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어디 전하뿐이에요? 왜 하필 전하만 살아 돌아오신 건데요, 왜?”

클레멘스가 다가오려 하자 페기가 눈짓으로 그를 제지했다. 그러고는 알틴에게로 흘끗 시선을 던졌다.

“네가 한 짓은 다 들었다. 감히 성하를 독살하려 들고도 죗값을 치르지 않고 도망쳤다지.”

“그건…!”

휘둥그레 눈을 뜬 알틴이 꿈틀거리며 힘겹게 클레멘스를 돌아보았다.

“그건 다 저자가 시킨 짓이에요! 전 그저 높으신 분의 명령을 따랐을 뿐…!”

“다 들었다 하질 않아.”

페기가 슬그머니 눈살을 찌푸렸다.

“넌 수년 동안 클레멘스 추기경에게 돈을 받고 내전의 비밀스러운 정보들을 유출했으며, 심지어는 성하를 독살하려 하기까지 했어. 게다가 가장 힘들 때 나를 배신했지.”

“…….”

“왜. 성난 시민들 앞에서 내가 성하를 시해하려 한 진범이며, 마귀를 불러온 뱀이라 주장한 것도 누가 시킨 짓이라 고할 거니?”

바닥을 짚은 알틴의 손이 경련하듯 오므라들었다. 어느덧 주먹 쥔 손에 파르라니 혈관이 섰다. 페기는 땅을 기는 벌레처럼 낮게 엎드린 알틴을 멸시하듯 차갑게 쏘아붙였다.

“알틴, 너를 믿었던 만큼 배신감도 크구나.”

“…그래도 절 살려 주실 거잖아요.”

알틴이 떨듯이 웃으며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전하께선 그런 분이시잖아요. 추기경도 저렇게 살려 두셨는데 저라고 다르겠어요. 결국에 용서해 주실 거잖아요. 그렇죠?”

비틀린 근육이 자아 내는 미소가 기괴했다. 페기는 경멸을 숨기지 않는 눈으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하잘것없는 네 목숨을 받아 무엇 하겠니.”

검게 죽어 가던 알틴의 얼굴에 겨우 화색이 돌았다. 페기는 고개를 틀어 마샤를 눈짓했다. 어쩐지 몹시 불편한 기색으로 서 있던 마샤가 종종거리며 다가와 알틴의 눈앞에다 검은 수도복을 휙 내던졌다.

“청백회로 가렴.”

“…네?”

알틴이 얼빠진 표정으로 멀거니 페기를 올려다보았다.

“당연하지만 네 정체도, 내 사주를 받았다는 것도 밝혀지면 안 된다. 가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청백회의 중추로 파고들어 기밀을 끄집어내. 성궁에서 일한 전적이 있으니 그 얼굴부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구나.”

“처, 청백회라니요…. 농담이시지요? 네?”

알틴이 울면서 매달렸다.

“거긴 미친놈들의 소굴이잖아요. 만약 정체가 탄로 나면 전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말 거예요. 들키지 않는다 한들, 그놈들을 속이기 위해선 그놈들과 똑같은 고행을 반복해야 하는데, 그럼 망가질 제 몸은요. 천운으로 살아 나와도 평생 제구실 못 할 거예요.”

“그래도 가야지. 어쩌겠니.”

페기의 눈이 매끄럽게 휘어졌다.

“그래야 네 아들을 다시 볼 수 있을 텐데.”

알틴이 쩡하니 굳었다. 자세를 틀어 아이를 고쳐 안은 페기가 물 흐르듯 말을 이었다.

“클레멘스 추기경은 스스로 눈을 뽑아 결의를 보였단다. 남은 죄는 평생을 몸 바쳐서 갚기로 했지. 그의 능력을 높이 사 곁에 둔 것처럼 나는 너의 능력도 높이 산단다. 수년이나 감쪽같이 사도를 속이고도 살아남았으니, 쥐새끼처럼 첩자 노릇이나 하는 것이 네 천직 아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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