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6화 (186/328)

“예전에 네가 뱀을 잡으러 갔을 때도 그랬고, 탐보프에서 네가 날 후방으로 보냈을 때도 그랬고….”

무심결에 중얼거리던 페기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그는 떠나야 했고, 그녀는 다른 곳에서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내가 괜한 말을 했네. 신경 쓰지 말고 잘 다녀와. 나도 조심히 다녀올게.”

페기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애써 씩씩하게 말했다.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던 예후르가 한 발짝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본 페기가 그가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났다.

“클레멘스 추기경이 함께 가 준다니 다행이지. 추기경이 회복하길 기다리는 동안 마샤가 이곳으로 오기로 했으니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난 괜찮을 거….”

그의 손이 불쑥 다가왔다. 흠칫하며 그의 손을 쳐 낸 페기가 자신의 손을 꽉 움켜쥐며 경고하듯 그의 눈을 보았다.

“…이러지 마.”

그의 뒤로 호위 기사들이 한창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공관의 사용인들도 바삐 오가며 그들을 돕고 있었다. 아닌 척하면서 은근하게 이쪽을 훔쳐보는 시선이 숱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예후르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개의치 않고 재차 다가온 그의 손이 면사로 가려진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러곤 페기가 도망갈 틈도 없이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파묻힌 페기가 저도 모르게 바짝 몸을 굳혔다. 예후르는 그런 그녀를 달래듯 다정하게 등을 쓸어 주었다.

“소문 같은 거 신경 안 쓴다고 했잖아.”

페기는 꾹 당겨 물었던 입술을 놓았다.

“…신경 써야지. 넌 교황이 될 사람이잖아.”

“널 안지도 못하게 한다면 교황 같은 건 되고 싶지 않은데.”

예후르가 쿡쿡거리며 웃는 진동이 느껴졌다. 간지러워진 페기가 몸을 살짝 뒤틀었다.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는 하지 마.”

“어차피 네 정체가 밝혀지면 가라앉을 소문들이야. 헤어지면 족히 달포는 보지 못할 텐데, 조금만 봐줘.”

예후르가 어리광을 부리듯 그녀의 머리칼에 뺨을 비볐다. 페기는 거세게 두방망이질하는 심장 박동을 무시하며 애써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가서 괜히 사고 치지 말고.”

“응.”

“몬틸로 백작을 너무 몰아붙이지 마. 절벽 끝에 선 사람에게 무슨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겠어.”

“응.”

“나 걱정된다고 괜히 달려오지도 말고.”

“음….”

예후르가 은근히 대답을 피했다. 페기는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지긋하게 그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얌전히 성도에서 기다려야 해.”

“…….”

“알았지?”

어떻게든 대답하지 않고 버티려던 예후르가 갈수록 뾰족해지는 그녀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허탈하게 웃어 버렸다.

“알았어. 노력해 볼게.”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일단 그를 믿어 보기로 했다. 페기는 그의 어깨 너머로 몰려오는 황혼을 응시하다가 꾸물꾸물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눈을 감자 익숙한 바람 냄새가 풍겨 왔다. 그라는 바람에 실려 그녀는 어느덧 하늘이고 낙원이었다.

***

교국 동쪽에 위치한 왕국 세잔은 예로부터 전쟁이나 재난과는 거리가 먼 평화의 땅이었다. 물론 왕좌를 둘러싼 권력 다툼이나 금싸라기 땅을 두고 벌이는 귀족들의 쟁탈전은 빈번했지만, 그야 까마득한 윗분들의 소임. 소년왕 요앙 오귀스트가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라발의 제좌를 섬겨 고향 땅을 떠난 지 오래이나, 세잔의 근면한 농민들은 변함없이 성실하게 조상의 땅을 일구고 있었다.

“덕분에 올해도 풍년일 것이라지요.”

마차의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밀밭을 보며 클레멘스가 빙긋이 웃었다. 딱정벌레처럼 창문에 붙어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밀밭을 멍하니 내다보던 마샤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저, 저 밭은 다 누구 땅이에요? 왕님의 땅인가요?”

“국왕 전하의 땅도 있고, 인근 영주들의 땅도 있지. 자작농들의 땅도 더러 있고 말이다.”

느긋하게 포도를 한 알 따 먹은 클레멘스가 과일 바구니를 마샤에게 내밀었다.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보며 포도를 삼킨 마샤가 옆자리에 앉은 페기에게 조심히 권했다.

“전하. 전하도 좀 드셔요.”

“…난 됐어.”

과일 바구니와 그 뒤에서 빙글거리고 있는 클레멘스를 흘끗 본 페기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샤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맛있는데….”

“오, 저기 과수원도 보이는구나.”

“과수원이요? 어디요, 어디?”

마샤가 반색하며 다시 창문에 찰싹 달라붙었다. 멀리 보이는 과수원을 손짓한 클레멘스가 입을 헤 벌리고 구경하는 마샤를 보며 정겹게 웃었다. 그 모습이 꼭 사이좋은 부녀 같아 페기는 왠지 못마땅한 기분이 들었다.

“전하.”

공연히 그를 째려보는데, 클레멘스가 귀신같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흠칫한 페기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왜, 왜요?”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아름다운 호수가 나옵니다. 몽세망 호수라고, 이맘때면 여름 물새들이 떼로 모여 장관을 이루는 곳인데….”

“말했잖아요. 여기 놀러 온 거 아니라고.”

페기가 조금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하루빨리 알틴을 만나 해결을 본 뒤 성도로 들어가야 하는데, 자꾸만 다른 길로 새려는 그가 답답했다.

혹 다른 맘을 먹은 건가?

페기는 불신을 숨기지 않는 눈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그런데 순순히 입을 다문 클레멘스가 멋쩍은 듯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마샤에게 이리 속삭이는 것이었다.

“안 되겠구나. 몽세망 호수는 다음을 기약하렴.”

“네에….”

누가 봐도 기대에 부풀었던 모습으로 마샤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그러다 빤한 페기의 시선을 느끼곤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저, 전 정말 괜찮아요, 전하! 여름 물새가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호수 같은 거, 정말 하나도 안 궁금해요!”

“…….”

페기는 울컥울컥 치솟는 역정을 짓누르며 고개를 홱 돌렸다. 며칠 전부터 묘하게 신경에 거슬린다 싶더니 오늘도였다. 그저 클레멘스 하나 끼어들었을 뿐인데 악역은 자신이 다 도맡게 된 것이다.

어지러운 심기를 다스리기 위해 그녀는 창문을 열어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등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마샤도, 그런 마샤를 위로하는 클레멘스도… 아니, 정확히는 저 보란 듯이 위로하는 클레멘스만 싫었다. 예후르가 저자를 받아들인 것을 어떻게든 납득해야 하는데도 도저히 잘 지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마샤도 보는 앞에서 이 애매하고 철없게 들리는 말을 모조리 쏟아 낼 수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클레멘스에게 철모르는 어린애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직 지난날의 앙금이 남아 있는 페기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에게만큼은 우스워 보이기 싫었다.

그러니 참아야지 별수 있나.

페기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들을 죄 삼켜 내며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었다. 밝은 녹빛의 밀밭 위로 황금빛 볕이 눈부시게 어른거리고 있었다. 시름없이 창밖을 응시하던 페기가 문득 허물어져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창밖을 확인한 클레멘스가 유쾌하게 말했다.

“곧 도착하겠군요.”

드넓은 밀밭 너머로 지평선에 걸쳐 우뚝 세워진 성채. 돌을 쌓아 올린 각진 형태의 성벽 위, 굵은 원통형의 탑들이 나지막한 구름 사이로 점차 웅장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페기는 그중 가장 높은 탑 위에서 휘날리는 녹기(綠旗)를 응시했다.

“크리상즈 공작성입니다.”

***

크리상즈 공작가는 세잔에서 유서 깊기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가문이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자연히 뻗어 나간 방계도 다양했는데, 더러는 본가와의 맥이 끊긴 채로 초야에 묻혔으나 대부분은 악착같이 본가와의 연에 매달리고 있었다. 대륙에서 가장 드넓은 평야, 메르시에 평원의 서부를 지배하는 공작가는 몹시 부유했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 크리상즈 공작으로부터 기사로 봉작 받은 앙드레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어나서 검을 잡아 본 기억조차 드문 그는 귀족 작위를 주자니 넘치고, 어물쩍 넘어가자니 뒷맛이 안 좋을 것 같다는 공작의 개인적인 판단하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내심 귀족으로 출세할 것을 기대했던 앙드레에겐 실망스러운 일이었을지 모르나, 삼대 가까이 소작농 노릇을 했던 과거를 참작하자면 그마저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늦은 나이에 기사가 된 앙드레는 점차 과거의 출세욕을 잊기 시작했다. 더 높은 자리를 탐하기에 이미 생활은 윤택해졌으며, 장성한 아이들도 모두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아내가 죽은 뒤로는 젊고 어여쁜 후처를 들여 여생을 즐기는 것만이 인생의 유일한 낙이 되었다.

그런 그의 소원은 약 3년 전 우연찮게 중매를 받아 만난 나딘느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녀는 세잔 동부의 대귀족 그리모아 후작가에 의탁하던 처녀로, 본디 교국에서 태어나 수도원에서 한평생을 보냈다고 했다.

한눈에 나딘느가 마음에 들었던 앙드레는 기꺼이 그녀를 후처로 들였다. 부인이 죽은 뒤로 적적하던 저택에는 순식간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작년에는 귀여운 늦둥이까지 보았으니 앙드레로선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하루하루였다.

자연히 앙드레가 늘그막에 들였다는 후처를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러나 의심하는 마음으로 찾아갔던 사람들마저 나딘느의 선한 마음씨에 감복하여 돌아가니, 이제 이 근방에 나딘느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 땅에 온 지 고작 3년 만에 나딘느는 사교의 중심이 된 것이다.

그날도 앙드레의 저택은 나딘느를 찾아온 인근의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손님들이 가져온 선물을 받고, 또 손님들에게 맛있는 요리를 접대하면서 정신이 하나도 없던 나딘느는 별안간 하녀로부터 이상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니? 클레멘스 추기경이라니?”

하얗게 굳은 나딘느의 얼굴을 눈치채지 못한 손님들이 요란을 떨기 시작했다.

“어머나, 클레멘스 추기경과도 안면이 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결혼하기 전엔 그리모아 후작가에 있었다면서요? 클레멘스 추기경의 외가가 그리모아 후작가잖아요!”

주인보다 더 신이 난 손님들이 소식을 가져온 하녀를 재촉했다.

“그게, 당분간 이 근방에 머물 테니 혹 어려운 일이 생기면 찾아오시라고….”

“어머머!”

손님들은 역시 예하께서 자비로우시다는 둥, 나딘느가 부럽다는 둥 연신 감탄만 했다. 나딘느는 차갑게 굳어 버린 얼굴로 애써 입꼬리만 끌어 올렸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뒤 나딘느는 고요히 생각에 잠겼다. 나이 먹어 비대해진 몸으로 산책을 하고 돌아온 앙드레가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만 자요.”

두 사람은 곧 한 침대에 같은 이불을 덮고 누웠다. 드르렁드르렁, 앙드레가 코 고는 소리가 웅장하게 울리는 가운데 어두운 천장을 물끄러미 노려보던 나딘느가 이불을 걷고 살그머니 침실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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