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 말을 잇는 클레멘스의 눈에 진지한 빛이 감돌았다.
“게다가 몇 달 전부터는 전하께서 탐보프의 내전을 조장하신 것을 빌미로 전하의 타락에 대한 흉문을 퍼트리고 있습니다. 이는 청백파에만 국한된 사안이 아닙니다. 알비야 공작에게 미온적인 이들조차 더 이상 전하만이 유일한 해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으니까요.”
“…….”
“이는 결국에 전하께서 성도를 비우고 계시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 하루빨리 성도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전하께서 성도로 가셔야만 알비야 공작에게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결집할 것이며, 그래야만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성공적으로 귀환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그의 말을 경청하던 예후르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에 관해 알려 둘 것이 있습니다. 퀴테리아 추기경이 근래 바스토뉴 용병대와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는다고 하더군요.”
“바스토뉴와?”
클레멘스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위스누아를 비롯한 리누스 도시 연맹은 오래전부터 바스토뉴 용병대의 단골손님이었긴 합니다만, 명색이 추기경이 되어 용병대와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을 이유가… 설마.”
“짐작하는 바가 맞을 겁니다. 십중팔구 교국의 경비대를 바스토뉴의 용병대로 교체할 속셈이겠지요.”
현재 교국의 외곽을 지키는 경비대는 먼 사막에서 온 이스파갈족이 맡고 있었다. 수많은 신을 섬기는 이교도라 하여 반대가 들끓었으나, 30년 전 오스피나 참극으로 병력의 태반을 잃은 교국으로선 다른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그들은 교황 레오폴트에게 충성하며 든든히 교국을 방비하고 있었다.
아연해하던 클레멘스가 점차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감싸 쥐었다.
“생각해 보면… 달리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퀴테리아 추기경은 오래전 청백 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교회가 타락했다는 근거로 피부 검은 이민족에게 경비를 맡겼다는 점을 들었지요. 알비야 공작과 퀴테리아 추기경이 권력을 잡은 뒤로 이스파갈족에 대한 차별과 냉대가 더욱 심화되었고요.”
“퀴테리아는 지나치게 원리주의적인 인물입니다. 여러 경전에 적이라고 언급되어 있는 이교도를 용납할 리 없지요.”
“만일 퀴테리아 추기경이 이번 공의회에 경비대 교체를 안건으로 들고나오면 상황이 심각해집니다. 알비야 공작의 세력은 당연히 찬동할 것이며, 알비야 공작에게 미온적인 이들조차 적극적으로 이스파갈족을 옹호하지 못하겠죠. 옹호하는 순간, 청백파로부터 당신도 다른 신을 모시는 이교도냐는 비난을 들을 테니까요.”
그리고 무리 없이 안건이 통과되는 순간, 알비야 공작은 교회의 일인자로 우뚝 서게 되리라.
“이미 퀴테리아와 보나벤투라가 알비야 공작의 편이며, 솔란지아 역시 전하에 반하여 알비야 공작을 지지할 것이니 그 세력을 모두 합하면 원탁의 절반이 됩니다. 별다른 난관이 없다면 아나클레토의 후임 역시 알비야 공작의 뜻에 따라 결정되겠지요. 원탁과 군권이 모두 알비야 공작의 손에 들어가는 셈인데… 그럼 교황과 진배없어집니다.”
심각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클레멘스가 다급히 예후르를 돌아보았다.
“전하, 막으셔야 합니다. 근위대의 실권을 장악한 부단장 본시오가 알비야 공작의 개로 전락한 마당에 경비대마저 바스토뉴의 용병대로 교체된다면, 더 이상 교국에는 알비야 공작을 막을 만한 세력이 없어집니다. 아무리 성하께서 전하를 후임 교황으로 염두에 두셨다 한들, 지지 세력이 없으시다면 어찌 성하께서 전하를 도우실 수 있겠습니까?”
“괜한 걱정입니다. 어차피 성하께서 날 도우실 일은 없을 테니.”
“예?”
예후르는 가벼운 손짓으로 클레멘스의 반문을 넘겼다.
“아무튼 추기경의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공의회에서 일을 벌이려던 참이었으니까요. 아나클레토의 후임으로도 적당한 분을 물색해 두었으니 그 점은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후르는 그리 말하며 페기를 돌아보았다. 잠자코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페기가 움찔하자,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옆자리를 권했다. 페기가 조심스레 다가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예후르가 말을 이었다.
“공의회까지 남은 시간은 약 한 달 반. 그전까지 알비야 공작에게 대항할 세력을 규합해야 합니다. 그러나 탐보프까지 저쪽으로 넘어가 버린 상황에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얼마 없지요. 일단 클레멘스 추기경은 누미디아의 대주교인 도미시오 추기경에게 서찰을 보내 공연히 흔들리지 말라 전하십시오. 심약한 성정에 지금쯤 떨고 있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전하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나는 이 길로 경비대장을 만나 볼 생각입니다.”
“경비대장이라면… 몬틸로 백작?”
페기가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았다. 오래전 차라의 옛 가족들을 불러오고 싶어 무리한 부탁을 했을 때, 난감해하던 사내의 얼굴이 잠시 떠올랐다.
클레멘스가 조금 난처한 기색으로 만류했다.
“확실히 필요한 일이긴 합니다만, 굳이 전하께서 직접 가실 필요는…. 위기에 몰리니 똑같이 피부 검은 이교도들끼리 힘을 합친다는 비아냥을 들으실 겁니다.”
“지난날 추기경이 그랬던 것처럼요?”
예후르가 장난처럼 묻는 말에 클레멘스는 능구렁이처럼 받아쳤다.
“제가 길을 너무 잘 닦아 놓았지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쉬엄쉬엄 좀 일할 걸 그랬습니다.”
경쾌한 웃음소리가 번졌다. 오직 페기만이 마주 웃는 두 사람을 질린 눈으로 보았다. 이쯤 되니 옛날 일에 태연자약할 수 없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비밀리에 가신다고 해도 소문이 퍼지는 걸 막으실 순 없을 겁니다. 전하께서 교국으로 돌아오신 이후로 알비야 공작은 전하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이를 다 아실 만한 분께서 구태여 몸소 가시려는 이유가 있겠지요.”
클레멘스의 눈에 호기심이 반짝였다. 예후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진짜 패는 페기니까요. 내가 경비대와 접선을 하고 다니는 동안 알비야 공작은 군권을 틀어쥐는 데에만 골몰하게 될 테니, 내가 북방에서 데리고 왔다는 여자에게 관심을 쏟을 여유는 사라질 겁니다.”
“…….”
“게다가 그편이 더 재미있지 않겠어요?”
황금빛 눈이 매끄럽게 휘어졌다.
“나에 대한 여론은 바닥을 길 것이며, 그럴수록 알비야 공작과 퀴테리아 추기경은 방심하게 되겠지요. 내가 이스파갈족과 접선하고, 그대와 같은 철 지난 권력가까지 끌어들이며 발버둥 치는 모습을 즐길 겁니다.”
“오….”
클레멘스가 고개를 살짝 뒤로 물리며 인상을 썼다. 예후르는 의자에 편하게 등을 기대며 흔흔하게 웃었다.
“무릇 낙상은 정상에 오르기 직전 입는 것이야말로 심각한 법입니다. 파국도 마찬가지지요. 눈앞에서 놓친 승리는 열렬하게 몰아치던 그들의 열정을 꺾을 것이며, 손상 받은 알비야 공작의 권위는 쉽사리 수복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구심점을 잃은 세력은 내전 끝에 와해되겠지요.”
페기의 등장은 위기에 빠진 교회의 구원자라는 알비야 공작의 위신에 중대한 내상을 입힐 것이다. 손상된 권위와 타격 입은 세력을 추스를 틈도 없이 둘 중 누가 진정한 사도냐는 시험에 빠질 것이며, 정처 없는 혼란 속에서 그들의 세력은 누가 적인지조차 헷갈리는 고비에 봉착할 것이었다.
“이제 보니 전하께서도 참 잔인하십니다.”
“그대만 할까요.”
예후르가 느른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여하간 내 계획은 그러합니다. 추기경께선 내가 경비대와 접선하는 동안 사람을 하나 찾아 주십시오.”
“사람이라면….”
“청백회에 은밀히 꽂아 넣을 간자를 찾고 있습니다. 몇 번 시도해 보았는데 광신도 집단의 중추로 파고들기에 내 수하들은 영 적합하지 못하더군요. 어디 적당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간자….”
페기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찌푸린 얼굴로 잠시 고민에 잠겨 있던 클레멘스가 안대를 조금 뒤척였다.
“한번 찾아는 보겠습니다. 하지만 청백회는 워낙에 배타적인 집단이라 엔간한 인물로는 제대로 잠입하기도 전에 문전 박대나 당할 겁니다. 어디서든 주눅 들지 않을 배짱과 광신도들도 속여 넘길 수 있는 광기를 가진 이가 과연 있을는지….”
“…저기, 간자라면.”
무심코 말을 꺼낸 페기가 즉각 자신에게로 모이는 시선을 느끼고 움찔했다. 그러나 이내 결심을 굳히곤 클레멘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이 그랬죠. 알틴도 당신의 간자였다고.”
멈칫한 클레멘스가 다시 유유한 미소를 지어 올렸다.
“예, 그랬었지요.”
“나와 예후르와 성하마저 속여 넘겼던 그 배짱이라면 청백회에서도 능히 활약할 수 있겠고요.”
“…전하.”
클레멘스가 조금 굳은 얼굴로 만류했다. 페기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알틴, 지금 어디 있어요?”
“이것 참….”
클레멘스가 난처한 기색으로 예후르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예후르는 흥미진진하게 둘의 언쟁을 관망할 뿐이었다.
“전하… 알틴에게 쌓인 원한이 많으신 거야 저도 잘 알지만, 그렇게 감정적으로만 접근하실 일은 아닙니다. 알틴은 훗날 제가 따로 불러 전하께 사죄하라 명할 터이니….”
“잘 지내요, 그 애?”
“…….”
“잘 지내면 안 될 텐데.”
고개를 낮게 기울인 페기가 무미건조하게 읊조렸다.
“나도 나중에 들어서 알아요. 내가 옥에 갇혔을 때, 도망친 알틴이 성난 시민들 앞에서 내가 뱀이고 성도에 마귀를 끌어들였다는 연설을 했다죠. 그대는 내 화형에 반대하던 사람이니 그건 알틴이 자의로 한 짓일 테고….”
“전하.”
“사죄 같은 거 필요 없어요. 나는 알틴을 용서할 수 없고 알틴 역시 내게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을 테니,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끊어 낼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겠죠.”
페기는 클레멘스를 직시했다.
“그러니 말해요, 클레멘스.”
“…….”
“알틴은 지금 어디 있어요?”
***
이른 저녁이 몰려오고 있었다. 벌써부터 거뭇해지는 동쪽 하늘을 주시하던 페기가 고개를 돌려 말갈기를 어루만지는 예후르를 보았다.
그녀와 동행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페아노라까지 왔던 그는 이제 경비대의 본거지인 세투발까지 말을 타고 한참을 달려야 했다. 강건한 그의 몸이야 며칠의 힘든 여정도 끄떡없을 테지만, 그와 이별해야 하는 잠깐의 시간은 못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생각해 보면 너와 헤어질 때마다 좋지 않은 일들이 벌어졌던 것 같아.”
페기는 부러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말갈기를 쓰다듬던 그의 손길이 점차 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