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4화 (184/328)

천천히 몸을 일으킨 클레멘스가 숭배하듯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핏줄이 솟도록 전율했던 그는 어느새 고요한 호수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가만히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더니, 문득 순순히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는 식탁으로 손을 뻗어 접시를 끌어 내렸다. 접시에 놓여 있던 포크와 나이프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겸허히 무릎 꿇고 앉아 식기들을 마치 성물처럼 조심스레 다루던 그가 천천히 나이프를 감아쥐었다. 그러곤 일절 고민의 여지도 없이 눈알에 찔러 넣었다.

숨죽인 신음 소리가 정적을 깨고 사위를 휘돌았다. 까득, 이를 악무는 소리와 함께 눈알이 생으로 뜯겨 나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바로 코앞에서 그 광경을 목도한 페기가 쩡 하니 얼어붙었다. 나이프를 문 채 혈관을 뜯고 나오는 눈알이 마침내 작은 접시 위로 굴러떨어졌다.

벌건 핏물이 그의 얼굴 반쪽을 덮으며 턱 아래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피 웅덩이를 짚은 그가 손바닥에 묻은 피를 느릿느릿 바지에 닦아 내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접시를 그녀의 발치에 바쳤다. 그러면서도 고분고분 그녀를 우러르는 얼굴에 실낱같은 미소를 올렸다.

“돌아오신 사도를 맞이합니다.”

페기는 토할 것 같은 기분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직 예후르만이 흔흔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

페아노라의 추기경 공관은 밤새도록 난리가 났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사제들은 피범벅으로 혼절한 클레멘스를 보고 아연실색했는데, 자연스레 이 난리 통의 주범으로 예후르가 지목되었다.

“저, 저, 저, 전하께서 호, 혹시 예하를 저, 저렇게….”

사제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기어이 예후르를 에워싸고 나섰다. 예후르가 침착하게 자신이 벌인 짓이 아니라고 밝혔으나 의심은 좀체 가시질 않았다. 말 한마디로 정리되기에 예후르와 클레멘스의 악연은 지나치게 길고 끈질겼다.

“아, 아무리 우리 예하께서 저, 전하를 추방해야 한다는 둥, 자질이 의, 의심스럽다는 둥 망언을 일삼으셨다곤 하나 그래도 사람을 저,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으시면 안 되죠!”

“아니, 그러니까 내가 한 짓이 아니라고….”

“마, 맞아요! 우리 예하께서 가끔 헛소리를 하셔서 그렇지, 평소에는 어, 얼마나 좋은 분이신데요!”

“무심도 하시지, 우리 예하 이제 은퇴하시면 남는 건 얼굴밖에 없는데 저 잘난 눈이 망가져서 어떡해….”

어떤 사제는 흡사 통곡할 기세로 주저앉았다. 거듭 부정하던 예후르도 오래지 않아 그들을 설득하길 단념하곤 사제들의 우는소리를 자비롭게 들어 주었다.

공관을 가득 메우던 울음소리가 가신 것은 클레멘스가 겨우 의식을 차린 뒤였다.

“내가 한 짓일세.”

그러자 침대맡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사제들이 어리둥절하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예?”

“내 손으로 직접 내 눈을 뽑았다고. 알았으면 무고하신 분 괜히 귀찮게 하지 말고 어서들 썩 물러가게나. 곧 새벽 예배 집전할 시간인데 아주 헛짓들을 하고 있어.”

혀를 찬 클레멘스가 끙끙거리며 돌아누웠다. 얼결에 내쫓긴 사제들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니, 멀쩡한 눈을 대체 왜…?”

“기어코 미치신 게지….”

이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강력한 권고로 공관은 외부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소수의 사용인들만이 오가는 공관은 순식간에 평화로운 적막을 되찾았다. 페기는 인적 없이 휑한 공관을 제집처럼 쏘다니며 오래간만의 여유를 즐겼다.

교국과 인접한 페아노라의 공관은 대리석을 중심으로 한 교국 특유의 건축 양식을 모방하고 있었다. 페기는 아치형으로 뚫린 창문에 색을 입힌 스테인드글라스나 하늘에 닿을 듯 높은 첨탑을 종일 물끄러미 올려다보곤 했다. 새삼스러울 정도로 진한 향수가 문득 썰물처럼 몰려왔다.

죽음에서 돌아오자마자 묵었던 이시도르의 별장은 돔을 골자로 한 라발의 건축물이었고, 북방에서 잠시 머물렀던 페임하른 공작의 성은 화강암을 쌓아 올린 투박한 성채였다. 하다못해 예후르의 영지에 있었던 문도성조차 반쯤은 요새로 기획된 것이라 그녀의 고향과도 같은 성궁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앙겔리카 성궁의 흔적은 생각지도 못한 페아노라에 있었다.

페기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한여름 뙤약볕이 그려 내는 오색찬란한 성화 속에 몸을 담그고, 땀을 흘리며 수백 개의 계단을 올라 종탑에 섰다. 오래되었지만 구석구석 잘 관리된 공관에는 성궁을 모방한 흔적이 더러 남아 있었다. 그런 흔적들을 발견할 때마다 페기는 마치 보물찾기에 성공한 어린애처럼 기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오후.

페기는 외진 복도에 놓인 조각상 앞을 종일 지키고 있었다. 멀리서 뚜벅거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싶더니, 갑자기 익숙한 팔이 와락 그녀를 끌어당겼다.

“예후르?”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던 페기가 조금 불안한 기색으로 주위를 살폈다.

“누가 보면 어떡해.”

“괜찮아.”

“괜찮긴. 또 이상한 소문이 돌지도 모르잖아.”

페기가 낑낑거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자, 예후르는 도리어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부스스한 은빛 머리칼에 콧대를 비볐다.

“돌라고 해.”

“예후르.”

“어차피 너 데리고 왔을 때부터 소문은 퍼졌을 텐데.”

할 말이 없어진 페기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예후르는 그녀의 머리에 코를 박은 채로 숨죽여 웃었다.

“걱정하지 마. 막시모가 알아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을 테니까.”

그 말에 겨우 바동거림이 멈추었다. 페기는 그의 품에 얌전히 등을 기댄 채로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얇은 머리칼을 매만지며 한가롭게 시간을 죽이던 예후르가 문득 들려오는 질문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성궁에도 비슷한 것이 있었지?”

“겔랑수스의 조각 ‘죽어 가는 코르넬리우스’와 비슷하네. 모작인가?”

“죽어 가는 코르넬리우스….”

페기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 모든 예술을 사랑하는 레오폴트가 유독 극찬을 아끼지 않던 조각상이었다.

“기억나? 왜 어릴 때, 레오가 조르르 우리 모아 놓고 그 조각의 어디가 가장 훌륭한지 말해 보라고 했잖아.”

예후르는 인체의 이상적인 비율을 정확하게 표현했다고 말했다. 안드레아는 팔면 꽤 돈이 될 것 같다고 했으며, 마지막으로 페기는 어디가 훌륭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저 검에 찔린 남자가 너무 불쌍하다고 답했다.

예후르와 안드레아의 대답을 들으며 눈에 띄게 처져 가던 레오폴트의 어깨는 페기의 대답에 이르러서야 비쭉 솟아올랐다. 그날, 페기는 레오폴트의 품에 안겨 한순간도 바닥에 발을 딛지 못했다. 샘이 난 안드레아가 페기의 치맛자락을 죽죽 잡아당기던 것을 예후르가 웃으며 말려 주었었다.

“음… 기억난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던 예후르가 키득거렸다. 페기도 설핏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레오가 차라한테도 똑같이 물어봤었어. 왜 여기 조각상들은 다 흉측하게 벗고 있냐는 대답만 돌아왔지만.”

“레오가 또 실망했겠네.”

“그래서 내가 위로해 줬지.”

병상에 누워선 너 말고는 다들 감성이 메말랐다며 한탄하던 레오폴트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페기의 표정이 점차 애잔하게 물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런 때가 있었다. 그런 때가 참 많이….

그러나 단 한 번의 깜박임으로 눈앞을 가로막던 불투명한 기억의 잔상이 사라졌다.

페기는 어느새 또렷해진 모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타고나길 모작의 숙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조각상은 세월이 흐를수록 덧없이 풍화되고 있었다. 변함없이 완전한 모습으로 성궁의 가장 고귀한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겔랑수스의 조각과는 정반대.

페기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 애는 어떤 사람이야?”

“그 애?”

“내가 죽은 뒤에 천사 예리엘의 성흔을 받았다는, 그 애.”

예후르가 흐음, 하고 깊은 숨을 내뱉었다.

“나름대로 똑똑하고 야망도 있고 처세에 능한… 가짜.”

그는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그녀를 뒤에서 꽉 끌어안았다.

“걱정하지 마, 페기. 진흙 속에서도 진주는 빛나는 법이야. 그 밑바닥에서 피아제 백작이 널 찾아내고 결국에 내가 널 만난 것처럼, 머지않아 진짜를 알아본 사람들이 네 발에 입 맞추게 될 테니까.”

“…….”

“그러니 곧 돌아갈 수 있어.”

예후르가 귓가에 입술을 붙이며 속삭였다. 페기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회랑으로 해가 길게 들며 한 줄기 빛이 모작을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페기는 꼼지락거리며 예후르의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몇 걸음을 남기고 멈추어 선 막시모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고했다.

“전하. 클레멘스 추기경 예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공중에서 페기와 예후르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며칠 동안 굳게 닫혀 있었던 침실 안 클레멘스는 생각보다 멀쩡해 보였다. 그는 가운을 입은 채로 단정히 침대에 앉아 있었는데, 페기는 조금 초췌해졌을 뿐 여전히 반들반들한 그의 낯짝을 보며 열병이라도 끓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모시게 되어 송구합니다. 맘 같아선 발 벗고 나가 맞이해 드리고 싶었는데 의사가 안 된다며 죽어라 말리더군요.”

클레멘스가 기침 섞인 소리로 낄낄거렸다. 침대맡 의자에 앉은 예후르가 우아하게 다리를 꼬았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이젠 열도 내렸고…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엊그제는 의사 몰래 좀 걸으려다가 그만 책장에 부딪히고 말았지요. 아직 거리감이 익숙지 않나 봅니다.”

클레멘스가 성한 눈을 짐짓 가늘게 뜨며 너스레를 떨었다. 고개를 돌려 몰래 코웃음을 치려던 페기는 귀신같이 절 돌아보는 클레멘스를 보곤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전하께서도 앉으시지요.”

클레멘스가 하나 남은 올리브색 눈을 둥글게 휘었다. 차마 웃는 얼굴에다 욕은 못 하겠기에 페기는 공연히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됐어요.”

“전하께서 혹 거북해하실까 봐 불편한 안대까지 착용한 것인데….”

“그럼 벗든가요.”

톡 쏘아붙인 페기가 보란 듯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클레멘스가 눈썹을 축 늘어트리며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으나, 예후르도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푹 한숨을 내쉰 클레멘스가 맥이 다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모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현재 성도의 정세가 심상치 않기 때문으로….”

죽죽 늘어지는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페기는 고집스레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클레멘스라면 그녀도 이가 갈리도록 겪어 보았다. 불쌍한 척 연기하는 것쯤이야 저자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하릴없이 화초나 구경하던 페기의 귀가 번뜩 뜨였다.

“…퀴테리아 추기경 산하의 청백파 일당을 중심으로 알비야 공작이 위기에 빠진 교회를 구원할 사도라는 소문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필시 이번 공의회에서, 실각한 아나클레토의 후임으로 그들의 사람을 앉힌 뒤 알비야 공작을 차기 교황으로 선포할 심산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