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색 눈이 도로 뜨였다. 클레멘스는 평온하게 예후르를 마주했다.
“성하의 맞수로 원탁을 지킨 것이 벌써 스무 해 가까이 되어 갑니다. 성하께선 저와 라발에 맞서 교국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셨지요. 그분의 고통을 가까이서 지켜봤기에 감히 탓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그분이 변해 가시는 모습에 늘 마음이 아렸습니다.”
본국으로부터 착취당하던 탐보프 동부에서 어느 날 무명의 수도사가 찾아왔다. 고통받는 동부의 실상을 알리며 애처롭게 도움을 청해 왔으나, 레오폴트는 단칼에 그 청을 묵살했다. 라발을 적대하는 그로선 탐보프와 각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레오폴트가 교황의 자리를 지켰던 지난 수십 년, 그런 일들은 무수히 많았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사도의 본분을 외면했고, 발 벗고 나가 고통에 신음하는 민중을 돌보기보단 성궁의 밀실에 틀어박혀 정치적 수 싸움을 펼치는 데 골몰했다.
그로선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사도로서 올바른 길이었느냐 묻는다면 쉽사리 대답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전하, 원탁에서는 그 어떤 훌륭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라 하여도 끝내 괴물로 변하고 맙니다. 글리체리아 추기경이 그랬고, 만달 추기경이 그랬지요. 성하께서도 그러셨고, 또 이제 보니 전하께서도 이미 괴물이 되어 버리셨더군요.”
클레멘스가 고개를 내둘렀다.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한낱 인간은 괴물이 될 수 있지만 사도는 그래서는 아니 됩니다. 적어도 그때는 아직 때 묻지 않았던 카타리나 공작 전하와 차라 도련님만큼은 순수한 상태로 계셔 주시길 바랐으니까요.”
“그걸 그대가 독단적으로 판단했단 겁니까?”
“예.”
클레멘스가 빙긋 웃었다.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원탁은 괴물을 잉태한다고. 저 역시 원탁이 낳은 훌륭한 괴물이지요.”
모든 사람에겐 꿈이 있다. 설령 꿈을 모르던 사람도 권력을 쥐게 되면 꿈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사람은 꿈을 이루기 위해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클레멘스의 꿈은 사도의 존속을 위해 사도를 원탁에서 퇴출하는 것이다. 아나클레토의 꿈은 끝을 모르는 욕망을 채우는 것이고, 글리체리아의 꿈은 가족들의 안전과 번영이었다. 원탁에 오래 앉은 사람 치고 자신의 꿈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렇게 원탁은 괴물을 낳는 것이다.
예후르는 아랫입술을 매만지며 잠시 상념에 빠졌다. 반쯤 녹아든 양초 너머로 그의 얼굴이 고요하게 잠겨 들었다.
“…카타리나 공작의 하녀였던 알틴을 이용했다고 들었는데.”
“본디 내전의 내밀한 사정을 엿듣기 위해 오랫동안 제 사주를 받고 있었지요. 그런 일에 쓰일 줄은 몰랐습니다만.”
“성하께 치명적일 수 있는 찻잎을 복용케 하고, 그 죄를 카타리나 공작에게 덮어씌우는 것. 나중에 들여다보니 그대의 수라기엔 다소 허술하던데요.”
“당시 성하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으셨지요. 전하를 대신해 국정을 맡고 계시던 카타리나 공작 전하만을 원탁에서 탈락시키면 되겠다 싶어, 원래는 전하의 친부모라 주장하던 라발의 하급 귀족을 매수했었습니다. 생각보다 그 일이 크게 비화하지 않아 부랴부랴 차선책을 선택했던 거지요.”
당시의 일을 회상하며 클레멘스가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어차피 기회는 전하께서 뱀을 죽이러 가신 그때밖에 없었습니다. 성하께는 건강이,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는 부족한 경험이 약점이었지만 솔직히 전하께선 무결하셨으니까요. 전하께서 계시지 않은 틈을 타 어떻게든 밀어붙이면 해 볼 만하다고 여겼습니다. 다만 후일에 전하께서 돌아와 제 목을 치시는 것은 상상했어도, 성하께서 그리 이르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줄은 조금도….”
클레멘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사도의 권능은 달라도 무언가 다른 모양입니다.”
예후르는 가타부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고요하게 내려앉은 적막 속에서 클레멘스가 흘끔흘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는 예후르가 결단을 내릴 차례였다.
“전하.”
“…….”
“혹 제 어딜 찔러야 가장 고통스러울지 재고 계십니까?”
그제야 예후르가 나지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클레멘스 추기경. 나는 그대를 죽이러 온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죽음으로도 면치 못할 신성 모독적인 발언을 일삼았지요.”
“그리 죽고 싶거든 종교 재판장에 가서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읊으십시오. 원하는 죽음이 내려질 겁니다. 하지만….”
불현듯 예후르의 눈이 살짝 휘어졌다.
“나는 그대가 재판장에는 가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예?”
“앞으로 큰일을 하나 벌일 생각입니다. 그대가 도와주길 바라고요.”
클레멘스가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았다. 예후르가 우아하게 손으로 허공을 휘저으며 선심 쓰듯 말을 보탰다.
“요앙 오귀스트의 개로 지난 십수 년간 나와 성하를 지독하게 괴롭혔던 것처럼, 이번에는 나를 위해 충실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그대의 숙원을 내가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
“사도를 원탁에서 영원히 추방해 달라 하였나요? 좋습니다. 그리해 드리죠.”
드르륵! 클레멘스가 벌떡 일어나자, 뒤로 밀려난 의자가 나동그라졌다. 부릅뜬 올리브색 눈이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어차피 난 교황의 자리에 별다른 욕심도, 교황이 되어 이루고픈 원대한 뜻도 없습니다. 내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으로 그대의 충성을 얻을 수만 있다면 족히 남는 장사지요.”
“하지만 저는 감히 성하를 해하려 들었는데….”
클레멘스가 넋 나간 듯이 중얼거렸다. 예후르는 턱을 괴고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대를 용서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는 그저 그대의 능력이 탐이 나고, 숙원에 대한 그대의 집념을 알았으니 숙원이 걸린 이상 나를 배반하지 못하리라 장담할 뿐이죠.”
“…….”
“그대가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어요.”
예후르가 스푼을 들어 접시를 두드렸다. 맑은 소리가 번져 나가며 어디선가 또각거리는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클레멘스는 넓은 식당을 울리는 소리를 쫓아 멀거니 주위를 돌아보았다. 촛불이 어렴풋이 닿는 맞은편 벽에서 커튼이 치워지며, 누군가 식당으로 발을 들였다.
클레멘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불청객이 서서히 환한 불빛 안으로 들어왔지만, 그녀를 마주하면서도 달리 새로운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반가움도, 경악도 없이 그저 무표정한 그대로.
마침내 페기가 몇 발짝을 남겨 두고 멈추어 섰다.
그녀는 미미하게 찡그린 낯으로 클레멘스를 응시했다. 여전히 그에 대한 거부감이 가시지 않은 듯했다.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고역이라는 것처럼 넌지시 그를 외면하고 있던 페기는 별안간 들려오는 쇳소리에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뒷걸음질하던 클레멘스가 등 뒤에 나동그라져 있던 의자를 잘못 밟아 넘어진 것이었다. 멍하니 주저앉아 그녀를 올려다보던 클레멘스가 문득 눈 밑 근육을 짧게 경련했다. 표정 없던 얼굴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살짝 벌려진 그의 입술 사이로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하….”
신음처럼 들려오는 말을 주워듣기도 전에 갑자기 클레멘스가 네발로 기어 왔다. 페기가 지레 놀라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자, 오히려 클레멘스가 기함할 듯 몸서리치며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순식간에 달아오른 그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었다. 목에 뚜렷이 선 핏대가 어느새 눈 밑까지 올라왔다.
“전하, 전하….”
시뻘개진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벌어진 입은 끊임없이 그녀만을 목 놓아 불렀고, 차마 닿을 수 없다는 듯 양손은 부질없이 허공만을 스쳤다. 페기는 아연한 기분을 삼키며 가까스로 입술을 열었다.
“클레멘스 추기경.”
“전하…. 제가, 제가 지금 제정신이 맞습니까. 진정 제가 보고 계신 분이 전하십니까.”
클레멘스는 숫제 통곡할 기세였다. 페기는 당혹감을 어쩌지 못하고 황급히 예후르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저 웃는 얼굴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결심한 페기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클레멘스를 다시 돌아보았다.
“클레멘스 추기경.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예, 전하, 하문하십시오. 부디 아무 말씀이라도 해 주십시오, 제발….”
“성하의 시해 혐의를 씌워서 날 죽일 셈이었나요?”
그에 클레멘스가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그저 원탁에서 물러나시게 하려는 요량이었습니다. 제가 어찌 전하를 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럼 성하는요.”
“…….”
“그대는 성하를 해하면서까지 목표를 이루려 했죠. 만일 3년 전에 정말로 성하께서 돌아가셨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요? 진정으로… 성하를 시해하려던 건가요?”
바닥에 낮게 엎드린 클레멘스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페기는 거북한 마음을 다스리며 최대한 침착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조차 곧 들려오는 말에 무너지고 말았다.
“…만일 제 계획대로 되었다면 성하께선 승하하셨을 테고, 제가 원탁의 권력을 잡았겠지요. 저는 사도를 원탁에서 몰아낸 뒤, 감히 사도를 모시는 몸으로 사도를 죽인 저의 죄를 청했을 것입니다.”
클레멘스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이어졌다.
“그러니, 예. 저는 진심으로 성하께서 돌아가시길 바랐습니다.”
페기는 당장이라도 찢어 죽일 듯한 눈으로 그의 마른 등을 노려보았다. 그에 대한 분노가 화르륵 되살아났다.
“사도를 죽여 사도를 위하다니. 그것참 원대한 뜻이군요.”
차갑게 씹어 뱉은 페기가 꼴 보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휙 돌렸다. 노여움을 고르는 가슴이 벅차게 오르내렸다.
“난 여전히 그대가 끔찍해요.”
그녀가 건넨 잔을 받아 마신 레오폴트는 온몸에서 피를 뿜어내며 쓰러졌었다. 의사가 말하길 그가 죽지 않은 것은 기적이라 했다.
“또한 그대가 그리도 갈망하는 숙원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페기는 고개를 틀어 기꺼이 훗날의 권력을 포기하겠다는 예후르를 쏘아보았다. 그는 그녀의 이런 착잡한 마음도 모르고 속없이 웃고만 있었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 페기는 아예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럼에도 그대의 진심은 잘 알겠어요. 일그러진 순정도 순정이니, 열심히 닦아 보면 어여쁜 구석이 있겠죠.”
“…….”
“그러니 증명해요.”
페기가 얼음장 같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당신이 신나게 떠들었던 말들, 죽음이 두려워 꾸며 낸 거짓이 아니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