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화 (181/328)

예후르가 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뒷걸음질했다. 이상하게도 그는 몹시 신이 난 것 같았다. 황당하게 그를 보던 페기마저 헛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럼 알아봐. 내 마음이 바뀔 일은 없겠지만.”

그에 만족한 듯 예후르가 다시 다가와 정중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 올렸다. 입술은 담백하게 손등을 누르면서 눈은 장난스럽게 휘어졌다.

페기는 도도하게 손을 물렸다. 단순히 그의 호기심을 채워 주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어울려 줄 수 있었다.

***

클레멘스가 돌아온 것은 동쪽 하늘에 노을이 어리기 시작한 초저녁이었다.

“예하! 도대체 어딜 갔다 이제야 오시는 겁니까!”

공관 앞을 초조하게 서성이던 사제들이 단숨에 그를 둘러쌌다.

“아이고, 예하!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저희가 얼마나 예하를 찾았는데요!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오셨다는 소식은 들으신 게지요?”

“전하께서 도대체 여긴 갑자기 왜 찾아오신 걸까요? 예하께선 혹 짐작하는 바가 있으십니까?”

“그걸 예하께서 어찌 아시겠나! 요샌 노는 것 말곤 관심도 없으신 분인데!”

“…제 생각엔 피, 피의 복수를 하러 오신 겁니다.”

가장 어린 사제가 바들거리며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그, 그렇잖습니까. 그동안 예하께 쌓인 게 얼마나 많으시겠어요!”

“하긴… 그간 예하께서 참 많이 무례하긴 하셨죠.”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아직은 추기경 예하이신데 설마 과격한 짓을 하시겠어요?”

“천사의 성상도 베어 버린 분이 추기경이 대수겠습니까? 밀리토 사제님은 어서 가서 호위병을 더 충원해 오세요! 될 수 있는 한 많이!”

“거참, 대단한 상상력들이야.”

수선 떠는 사제들 사이에서 허름한 밀짚모자를 만지작거리던 클레멘스가 유유하게 끼어들었다.

“나 혼자 들어가 볼 테니 쓸데없는 짓들 말고 다들 들어가 쉬게.”

“하지만 예하!”

“그만 노닥거리고 일 좀 하라 할 때는 내빼기 일쑤더니, 들어가 쉬라 할 때는 왜 이리들 말이 많아? 호위병이니 뭐니, 다 부질없으니 괜히 근처에 있다가 말려들지 말고 꼭꼭 숨어들 계시게나.”

새침하게 쏘아붙인 클레멘스가 뒷짐을 지며 홀홀 공관 안으로 들어갔다. 사제들이 불안하게 그의 뒷등을 주시했다.

“꼭꼭 숨어 있으라는 건 예하께서도 무슨 안 좋은 일이 벌어지리라 예상하신다는 뜻이겠죠?”

“아마도….”

“아이고, 우리 예하를 어쩌면 좋아.”

발을 동동 구르던 어느 사제가 입에 손을 모으며 크게 외쳤다.

“예하! 적어도 옷은 갈아입고 가십시오! 안 그래도 미운털 톡톡히 박히셨는데 잘난 얼굴이라도 말짱하셔야지요!”

그러곤 동료 사제들을 돌아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 우린 이제 얼른 숨읍시다.”

추기경 공관은 평소보다 써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품삯을 받고 잡일을 돕던 마을 사람들도 일찍 물러갔는지 웬일로 깨끗한 옷을 차려입은 하녀와 하인들만이 그를 맞이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던 하인들이 그의 투박한 옷차림을 보고 기함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유자적 식당으로 걸음을 옮기던 클레멘스가 불현듯 멈추어 섰다.

“…자네.”

“예, 예?”

“그 묵주 팔찌 좀 내어 보게.”

하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묵주 팔찌를 빼서 넘겼다. 클레멘스가 유심히 묵주를 들여다보자, 하인이 계면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많이 낡았지요? 워낙 오래되어 끝에 걸린 동심원도 반들반들합니다.”

“마음에 드는군.”

“예?”

“자, 내 것과 교환하지.”

클레멘스는 자신이 끼고 있던 묵주 팔찌를 하인에게 넘겼다. 사파이어와 자수정이 박힌 화려한 묵주였다. 얼결에 묵주를 받아 들었던 하인이 뒤늦게 그의 말을 알아듣곤 불에 덴 듯이 놀랐다.

“예, 예하! 무슨 말씀입니까! 이, 이런 귀한 걸 제가 어떻게…!”

“추기경에게만 허용된 귀한 묵주일세. 소중히 다뤄 주게나.”

“추, 추, 추기경에게만 허용된 묵주를 제가 어찌 다룰 수 있다고요!”

“하긴, 자네가 그걸 썼다간 신성 모독죄로 잡혀갈 수도 있겠군. 그럼 조각내서 보석으로 팔게나. 아, 그 값으로 새로운 묵주를 하나 구하면 되겠군.”

“예, 예하!”

하인이 애타게 불렀으나, 클레멘스는 들은 척도 안 하고 발길을 돌렸다. 손때 묻어나는 낡은 묵주를 만지작거리던 그가 빙긋이 웃었다.

식당 앞에는 그를 기다리며 안절부절못하는 집사가 있었다. 멀리서 유유하게 걸어오는 클레멘스를 보고 순식간에 화색이 되었던 집사의 얼굴이 서서히 흙빛으로 물들었다.

“예하…. 설마 지금 그러고 들어가시려고요…?”

“문제 있나?”

“문제가 너무 많아서 어디부터 지적해 드려야 할지….”

집사가 복잡한 눈으로 그의 차림을 훑었다. 시골 농부나 입을 법한 후줄근한 매무새에 진흙투성이 신발까지. 올이 다 풀려 가시가 뾰족뾰족 솟아오른 밀짚모자는 훌륭한 마침표였다.

“집사가 생각하기엔 어떤가. 옷을 갈아입느라 시간을 더 지체하는 것과 이대로 들어가는 것. 어느 것이 더 전하의 화를 돋울 것 같나?”

“…그만 들어가 보십시오. 건승을 빌겠습니다.”

집사가 한숨을 푹 내쉬며 식당의 문을 열었다. 클레멘스는 충직한 집사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곤 가벼운 걸음으로 식당에 들었다.

촛불이 여럿 오른 성대한 식탁에 예후르가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오, 엘피도 공작 전하.”

종종걸음으로 달려온 클레멘스가 기꺼이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예후르의 반지에 입을 맞추었다. 스르르 눈을 뜬 예후르가 느른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늦었군요, 클레멘스 추기경.”

“송구합니다.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제가 성문 앞까지 전하를 마중 나갔을 텐데요.”

“미리 연락을 보냈으면 도망쳤을 거면서.”

촛불 드리워진 금안이 화사하게 휘어졌다. 클레멘스 역시 웃음으로 화답했다.

“아시면서 절 찾아오신 이유가 있겠지요.”

“일단 자리에 앉아요.”

예후르가 맞은편 자리를 손짓했다. 클레멘스는 순순히 식탁을 둘러 가 의자에 앉았다.

그가 착석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접시가 내려앉는 동안에 묘한 시선이 여러 개의 촛불 사이를 오갔다. 잠깐잠깐 마주칠 때마다 엷은 눈웃음이 스쳤다.

요리가 모두 자리를 잡자, 예후르가 포크를 들며 지나가듯이 물었다.

“못 본 새 취향이 변한 모양이군요.”

슬쩍 올라온 그의 눈이 거친 옷감으로 짜인 클레멘스의 의복을 훑었다.

“일 년의 대부분을 성도에 머물 적엔 성직자들 사이에서 가장 세련되기로 명성이 자자하지 않았던가요?”

“미련했던 시절이지요. 역시 옷은 몸에 편한 것이 제일 아니겠습니까.”

클레멘스가 밀짚모자를 벗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을린 얼굴에 듬성듬성 돋아난 흰 수염까지, 옛날의 섬세하게 관리되던 얼굴과는 천지 차이였다.

예후르가 선웃음을 머금었다.

“변한 건지, 포기한 건지.”

“…….”

“이봐요, 클레멘스 추기경. 내 오늘은 그대에게 궁금한 것이 있어 왔습니다.”

예후르의 능숙한 칼질 아래 고기가 잘려 나갔다. 클레멘스는 동강 나는 고기 사이로 흐르는 선혈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하문하십시오.”

“3년 전에는 왜 카타리나 공작의 화형에 동의하지 않은 겁니까?”

선선히 대답하려던 클레멘스가 문득 입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예후르의 등 뒤, 벽을 가리는 검푸른 커튼에 가 닿았다. 늘 꼼꼼히 여며져 있던 커튼이 살짝 들추어져 있었는데, 그가 알기로 커튼 뒤에는 작은 곁방이 있었다.

“개의치 말아요.”

그의 시선을 느낀 예후르가 부드럽게 말했다. 시선을 틀어 그를 쳐다본 클레멘스가 곧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한순간의 광기에 휘말려 그런 중대한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되니까요.”

“성 예리엘 대성당의 성화가 꺼졌고, 카타리나 공작은 끝까지 불을 피우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분께는 성흔이 남아 있었지요. 성화가 꺼진 것은 전례 없는 일이나, 불을 피우지 못하는 사도는 여태 많았습니다. 천 년 간 잠들어 있던 뱀이 깨어났던 판국에 성화가 꺼지는 것쯤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변고였어요.”

“보다 공식적인 절차를 밟았으면 어떠했겠습니까? 예를 들어 종교 재판이라던가.”

클레멘스가 코웃음을 쳤다.

“감히 재판으로 사도에게 죽음을 선고할 순 없습니다.”

“원탁이 비슷한 선례를 만들었는데도?”

“그러니 말세인 것이죠. 본디 원탁은 천 년 전 여덟 명의 사도로 시작한 회합입니다. 참여 인원이 늘어나고, 사도가 줄어 이제는 일개 평범한 인간이 원탁에 앉아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사도의 권능을 수호한다는 원탁의 최초 이념을 부정해서는 아니 될 이야기지요.”

“원탁은 사도의 권능을 수호한다….”

작게 중얼거린 예후르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사람이 잘도 교황 성하를 시해하려 들었군요.”

물 잔을 쥐려던 클레멘스의 손이 멈칫했다. 예후르가 한층 서늘해진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대답해 보세요, 클레멘스. 그토록 사도를 위하는 당신이 어찌하여 성하께 독이 될 수 있는 찻잎을 반입한 겁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통….”

웃음소리를 꾸며 내어 상황을 모면하려던 클레멘스가 서서히 미소를 거두었다. 불빛이 일렁거리는 예후르의 금안이 흡사 파충류의 것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클레멘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 알고 오신 거로군요. 알틴, 그 아이에 대한 것까지.”

“물론.”

예후르가 배부른 사자처럼 포크를 내려놓았다. 잠자코 턱을 매만지던 클레멘스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정 복수를 꿈꾸시는 겁니까? 제가 이런 말씀 드려 봤자 우습기만 하다는 걸 압니다만, 그쯤에서 멈추십시오.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죽음은 누구 하나의 잘못으로 귀착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저 반대하는 것에 그쳤던 저나 끝내 시민들의 뜻에 굴복하셨던 성하께도 분명 일정 정도의 책임이 있어요.”

“추기경이 관여할 문제가 아닙니다.”

“전하.”

간곡한 부름에 예후르가 방어적으로 팔짱을 꼈다. 수려한 눈썹이 꿈틀거리며 조금 일그러졌다.

“클레멘스. 도대체 원탁의 일인자가 되어 무슨 짓을 벌이려던 겁니까?”

클레멘스의 입이 다시금 조개처럼 다물렸다.

“3년 전 그때 나는 뱀을 잡기 위해 성도를 떠나고 없었습니다. 용을 타고 이동하던 탓에 내 쪽에서 일방적인 연락만을 취할 수 있었죠. 만에 하나 성하께서 돌아가시고, 그 죄를 카타리나 공작이 뒤집어썼다 한들 나는 그 소식을 듣고도 성도로 돌아올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

“만일 일이 잘못되었다면, 원탁의 서열에 따라 자연스레 절대 권력은 그대에게로 넘어갔겠지요. 그대가 노린 것이 바로 그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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