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야, 그러지 말고 이 할아비를 네 제자로 받아 주련? 너도 언제까지 혼자 일할 순 없지 않겠어?”
“양치기가 혼자 일하지, 그럼 여럿이서 일하나….”
중얼거린 소년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언덕 아래를 가리켰다.
“아이참. 양치기를 하든지 말든지, 저기 할아버지 찾아온 수도사님이나 만나 보세요. 높으신 분이 맨날 이런 데 처박혀 있으니 괜히 아랫사람들만 저리 고생하는 거 아녜요?”
“예하!”
때마침 그를 부르는 애절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사내가 의아한 기색으로 시야를 가리는 밀짚모자를 슬쩍 올려 썼다. 그사이 숨이 넘어갈 것처럼 언덕을 뛰어 올라온 수도사가 사내의 발치에 철퍼덕 엎어졌다.
“추, 추기경 예하!”
“어허. 사람을 잘못 보신 듯한데.”
밀짚모자를 다시 눌러쓴 사내가 게으르게 돌아누웠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된 수도사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부르짖었다.
“여기서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저랑 같이 공관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제발!”
“아, 글쎄. 사람을 잘못 보셨다니까 그러네?”
“예하! 지금 저랑 장난하실 때가 아니라니까요! 누가 오셨는지나 아십니까!”
시뻘겋게 달아오른 수도사의 얼굴에서 거친 숨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엘피도 공작 전하! 뱀을 무찌른 사도께서 지금 예하를 기다리고 계신다고요!”
한가롭게 들꽃이나 매만지던 사내의 손길이 우뚝 멈추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사내, 클레멘스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뭐?”
엘피도 공작의 문장을 단 으리으리한 마차가 페아노라의 추기경 공관 앞에 도착한 것은 한가로운 정오였다.
공관의 앞뜰을 청소하던 하인은 문장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귀한 손님이 오셨겠거니, 자리를 비운 대주교를 대신해 성당의 말단 사제를 불러왔다. 여드름 날 시기를 겨우 벗어난 새파란 말단 사제가 마차에 당당히 새겨진 용 문장을 보고 기절초풍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소문은 순식간에 날개 돋친 듯 페아노라 전역으로 퍼졌다.
교국에서 귀한 분이 오셨대. 맨날 산으로 들로 쏘다니는 우리 추기경 예하께서 돌아오기라도 하셨단가? 예하보다도 더 높으신 분이라던데…. 우리 예하보다도? 그게 누군데?
엘피도 공작, 그 이름에는 심드렁하던 무지렁이 백성들도 뱀을 죽인 사도, 하니 뒤로 넘어갈 것처럼 안달복달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페아노라가 교회 안팎으로 인정받는 대교구요, 일단은 소속된 나라인 세잔에서조차 특별한 취급을 받는 도시라 해도 그네들이 볼 수 있는 귀한 분이란 고작해야 페아노라의 대주교인 원탁 추기경이나 간혹 이곳으로 휴양 오는 세잔의 귀족 나리들뿐이었다.
그마저 추기경이란 작자는 어느 순간부턴가 동네 술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얼굴이 되었으니, 난데없이 들려오는 영웅의 이름은 뭇사람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 충분했다.
“호, 혹시 여기서도 뱀이 발견된 건가?”
“예끼, 이 사람아. 뱀은 이미 몇 년 전에 잡으셨지 않아. 그것도 저기, 저 서쪽에서.”
라발처럼 마귀 떼가 나타나 한바탕 민심이 어지러웠던 것도 아니요, 리누스 도시 연맹처럼 용 기병대가 뱀을 수색한답시고 설치고 다녔던 것도 아니다. 지난 수백 년간 축복받은 것처럼 평화로웠던 페아노라의 사람들은 반쯤은 경외심으로, 남은 절반은 호기심으로 주인 없는 공관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대로 공관에서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던 것은 아니었다.
게으른 추기경의 가호 아래 유유자적 지내고 있던 페아노라의 성직자들은 갑자기 폭탄처럼 떨어진 엘피도 공작의 존재에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미사 집전 중에 끌려 나온 사제들은 공작을 보자마자 그의 발아래 엎드려 눈물을 쏟았고, 어리둥절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도사들은 직면한 상황을 서서히 깨달으며 낯빛이 파리해졌다.
거의 찬송가처럼 터지는 찬양 소리에서부터 시작해 공관이 비좁다는 둥, 전하를 모시기엔 너무 허름하다는 둥, 앓는 소리로 이어지던 사제들의 목청은 예후르가 머물 방에 들어서야 겨우 잦아들었다.
“아, 아이고, 커튼에 다림질이 덜 됐네…. 거참, 미리 연락이라도 좀 주고 오시지….”
촉새처럼 입을 놀리던 늙은 사제가 민망한 듯이 구겨진 커튼을 만지다가 예후르와 눈이 마주치자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예후르를 뒤따라 들어오며 방을 구경하던 페기가 넓은 창을 발견하고 다가오자, 늙은 사제가 얼른 비켜섰다.
사제의 잔심부름을 돕던 젊은 수도사가 얇은 면사로 얼굴을 꼼꼼히 가린 페기를 곁눈질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그런데 실례지만 아가씨는 누구신지….”
늙은 사제가 웃는 얼굴로 수도사의 등짝을 후려쳤다. 그러곤 억 소리를 내며 주저앉은 수도사를 대신해 양손을 비비며 앞으로 나왔다.
“그,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추기경 예하께서 곧 도착하신단 전갈을 받았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그런 전갈이 왔다고요? 언제?”
늙은 사제는 황망히 중얼거리는 수도사의 뒷덜미를 잡아 질질 끌고 나갔다. 지나가듯이 웃던 예후르는 어디선가 빤한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창가에 서 있던 페기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냥… 피곤하겠다 싶어서.”
겨우 둘만 남은 방 안에서 모자와 면사를 벗어 내린 페기가 한숨처럼 말했다.
“어딜 가나 이렇게 찬사와 난리가 뒤따르는 거면 뱀을 죽인 영웅도 못 해 먹겠어.”
“오늘이 좀 심하긴 하지.”
예후르는 푹신한 소파에 삼켜지듯 앉았다.
“클레멘스를 못 찾아서 더 저러는 거야. 추기경이 늦는다고 불호령이라도 떨어질까 봐 지레 겁먹은 거지.”
페기는 시름없이 창가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았다. 멀지 않은 앞뜰을 헐레벌떡 뛰어다니는 어린 수도사들이 눈에 띄었다. 무언가를 묻고 연신 고개를 젓는 것으로 보아 클레멘스는 여전히 행방이 묘연한 듯했다.
시선은 자연스레 더욱 먼 곳으로 뻗어 나갔다. 넝쿨로 둘러싸인 소담한 울타리를 지나자, 야트막한 언덕 아래로 페아노라의 아름다운 전경이 펼쳐졌다. 다갈색으로 칠한 지붕들이 조개껍데기처럼 나지막하게 자리한 가운데, 그 사이를 관통하는 강물이 도도한 흐름을 이어 가고 있었다.
페아노라.
교국 동쪽 미레 강변에 위치한 이 오래된 도시는 일찍이 많은 사도를 배출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천 년 전 뱀을 봉인했던 야누비타 1세의 절친한 벗, 샤를로망 프리울리가 유명했다.
심연의 천사 이슬라의 현신으로, 철학자이면서 음유 시인이었던 그는 수십 년 만에 고향을 찾은 감회를 짧은 시로 써서 남겼다.
어느 밤 꿈에서 낙원을 보았기로
그리운 곳이었나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