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적인 투에 차라가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다. 예후르는 별다른 첨언 없이 솔란지아의 말에서 손을 뗐다.
이시도르가 남은 말들 중에서 가장자리의 두 개를 가리켰다.
“콘체사 추기경과 람베르토 추기경은 3년 전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돌아가신 뒤에 새로이 원탁에 입성한 분들입니다. 두 분 모두 아나클레토 추기경에게 줄을 대어 출세하였는데, 최근 아나클레토 추기경이 실각한 이후론 솔란지아 추기경에게 붙었지요. 아마 이번에도 솔란지아 추기경과 뜻을 함께할 겁니다.”
예후르는 그 말에 수긍하여 두 개의 말을 왼쪽으로 옮겼다. 남은 말 중에서 차라가 이번엔 레오폴트의 말을 가리켰다.
“레오는 당연히 페기의 편을 들어 주지 않을까?”
차라가 순진하게 물었다. 이시도르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교황 레오폴트가 3년 전에 죽은 딸을 눈물로 그린다는 것은 이미 성도에도 널리 퍼진 이야기였다. 더욱이 스스로 화형을 선고하기도 하였으니, 만일 되살아난 페기를 마주한다면 그 죄책감을 가누지 못하리라.
하지만 예후르와 페기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차라가 서서히 경악했다.
“서, 설마 레오를 못 믿는 거야? 그러지 마. 레오가 페기 너를 얼마나 그리워하는데!”
“…레오는 알겠지. 이번에 거짓으로 판명된 사도는 죽음을 면치 못하리란 것을.”
페기가 담담히 중얼거렸다. 예후르 역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는 레오라면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할 거야. 누구 하나 편들지 못해서 결국 기권하겠지.”
“예후르!”
“레오한텐 페기나 비올라나 똑같은 자식이야. 차라, 너도 보아서 알 텐데.”
예후르의 서늘한 시선이 닿았다. 차라는 잇새로 야트막한 신음을 흘렸다. 레오폴트가 비올라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옆에서 그 꼴을 다 지켜보았던 그가 제일 잘 알았다.
차라의 반발마저 사그라들자, 예후르는 레오폴트의 말을 중앙에 놓았다. 이시도르가 남은 세 개의 말들 중 유일하게 이름이 적히지 않은 말을 들어 올렸다.
실각한 아나클레토의 자리, 지금은 공석으로 남아 있는 발렌트의 대주교였다.
“발렌트의 대주교는 원탁에서도 높은 서열을 점하니, 오래 비워 둘 수는 없을 겁니다. 아마도 이번 공의회에서 정해지겠지요. 알비야 공작 측에서 이미 내정해 둔 사람이 있을 테니, 그들의 뜻을 꺾고 다른 인물을 천거하려면 확실한 이름값과 지지가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이시도르가 슬그머니 좌중의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혹시 염두에 두신 분이 없다면 제가 추천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3년 전 원탁에서 은퇴하신 전(前) 누미디아의 대주교 글리체리아 수도사입니다.”
뜻밖의 이름에 모두가 의외라는 기색을 보였다. 이시도르가 조금 민망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화형에 찬동하신 뒤로 계속 번민하시다가, 원탁 추기경의 직을 내려놓고 시골 교회로 내려가셨지요. 사사롭게는 제 이모님이 되시는 분입니다만, 그분의 공명정대함에 대해서는 교회에 몸담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글리체리아 추기경이라면 물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택이 되겠지요. 하지만 이미 은퇴하신 분이 다시 마음을 바꾸시겠습니까?”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살아 돌아오셨다는 걸 아신다면, 예. 분명 마음을 바꾸실 겁니다.”
이시도르가 단언했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돌아가신 뒤로 무거운 죄책감에 시달리셨던 분입니다. 그 탓에 수십 년을 지켰던 원탁마저 등지셨지요. 만일 당신의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을 기회가 생긴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저희와 뜻을 함께하실 겁니다.”
말을 마친 이시도르가 살며시 페기의 눈치를 보았다. 아무리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다곤 하나, 어찌 되었든 글리체리아는 과거 그녀의 화형에 동조했던 인물이다. 결정권은 오로지 그녀에게 있었다.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고민에 잠겨 있던 페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시도르는 겨우 한숨을 돌렸다. 예후르는 그들의 의견을 받아 공석인 발렌트의 대주교의 말을 오른쪽으로 옮겼다.
그러자 전반적인 형세가 대충 그려졌다. 턱을 괴고 말의 위치를 살펴보던 차라가 문득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그런데 예후르. 지금 비올라 쪽에 다섯, 페기 쪽에 셋이잖아. 그리고 남은 추기경은….”
클레멘스와 누미디아의 대주교인 도미시오.
멍하니 눈을 끔벅거리던 차라가 입을 떡 벌렸다.
“자, 잠깐! 도미시아 추기경은 덤이라 치면, 결국 클레멘스가 우리 쪽으로 와야 한다는 거잖아! 그게 말이 돼?”
그러나 예후르는 가라앉은 눈으로 클레멘스의 말을 지긋이 응시할 뿐이었다. 차라가 어안이 벙벙하여 말을 잇지 못하자, 이시도르가 조심스레 말을 보탰다.
“전하, 클레멘스 추기경은 원탁을 놓은 지 오래입니다. 라발의 대사로서 이런 말씀 드리기 참으로 면구스럽습니다만, 솔직히 저도 그분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조금도 가늠이 되질 않는군요. 게다가 자꾸 은퇴하겠단 의견까지 내비치시니….”
클레멘스가 사의를 표명한 지는 오래되었다. 다만 라발의 황제인 요앙 오귀스트가 계속해 불허를 내리고 있으며, 원탁의 권력 투쟁에 통 관심 없어진 그를 탐보프나 위스누아의 세력들이 좌시하고 있는 탓에 아직껏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었다. 요즘도 잊을 만하면 지병을 핑계한 사임장이 올라오곤 했다.
차라가 열심히 이시도르를 거들었다.
“예후르, 너 옛날에 클레멘스랑 싸우던 거 다 잊은 거야? 너보고 이민족이니 뭐니, 레오한테 널 추방해서 본을 보이란 말까지 했던 사람이잖아! 어떻게 그런 사람이랑 손잡을 생각을 할 수 있어?”
“…그렇게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야. 지껄이는 말들이 하도 기가 막혀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현존하는 추기경들 중 가장 성직자다운 사람이니까. 사사로이 뇌물을 받지 않고 힘없는 백성을 탄압하지 않으며, 동시에 성직자로서 가장 중요한 순결의 의무를 지키고 있는 사람. 클레멘스가 유일해.”
솔란지아는 한때 결혼을 약속했던 사내와 깊은 정을 나누었으며, 그 독실한 보나벤투라마저 물밑에서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다른 추기경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클레멘스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겠다고…?”
차라가 아연하게 물었다. 예후르는 아랫입술을 매만지며 고심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형세가 이렇게 짜인 마당에 클레멘스를 포기하고 원탁의 과반을 차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침묵하던 페기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클레멘스는 안 돼.”
예후르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페기가 똑바로 그를 직시해 왔다.
“3년 전, 네가 뱀을 잡으러 갔을 때 레오를 독살하려 했던 의혹이 있는 사람이야. 그 죄를 내게 덮어씌우려 했고, 오랫동안 내 하녀로 일했던 알틴을 사주한 정황도 있어.”
오래되어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일이건만, 다시 떠올리니 새삼스럽도록 그때의 노여움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페기는 아직 매듭짓지 못한 분노를 곱씹으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클레멘스는 안 돼. 그 사람과 한배를 타느니, 차라리 알비야 공작에게 유리한 결정을 받아들이겠어. 그래 봤자 나는 불을 피울 수 있고, 그녀는 피우지 못한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니까.”
차라도 작은 목소리로 옳소, 하고 페기의 말을 지지하고 나섰다. 지난 십수 년 동안 레오폴트와 예후르와 싸워 놓고 이제 와 편을 들어 준다 한들, 클레멘스에게 아무런 신뢰도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클레멘스의 지원이 필요해.”
“싫다고 했어, 예후르.”
페기의 강경한 대답에 예후르가 가만히 시선을 보내왔다. 그의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네 화형에 유일하게 동조하지 않았던 추기경이야.”
페기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연히 기억했다. 저를 화형에 처하라며 광기가 들끓던 대성당을 홀로 유유하게 빠져나가던 뒷모습.
그렇기에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자는 믿을 수 없으므로.
“그럼 클레멘스의 속내를 파악하면 되겠네.”
예후르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페기가 기함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예후르.”
“네가 뭐라 해도 난 클레멘스의 의중을 떠볼 거야. 더 이상 너를 조금이라도 위험하게 만들 순 없으니까.”
이번에 거짓된 사도로 판명 난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으리라. 예후르는 그녀의 목숨이 달린 일에 조금의 위험도 감수할 생각이 없었다.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여 비올라에게 유리한 결론이 내려지는 일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만 했다.
“페기. 내게 두 번 다시 널 잃게 하지 마.”
나지막하게 읊조린 예후르가 미련 없이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페기는 가까스로 망연자실한 기분을 삼켜 냈다.
***
훗훗한 여름 바람이 언덕을 스치고 지나갔다.
부산한 바람결에 잠시 몸을 일으켰던 들풀이 다시 숨죽이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선 눈부신 볕이 내리쬐었다. 쾌청한 여름날, 언덕 위에 심긴 느티나무 아래에는 어울리지 않게 거친 옷을 주워 입은 사내가 신세 좋게 늘어져 있었다.
오늘은 또 저기 계시는구나.
그를 찾아 온 들판을 휘젓고 다녔던 양치기 소년이 입을 비쭉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알록달록한 나비를 쫓아 제자리서 달음박질하던 양치기 개가 저 멀리 앞서가는 주인을 발견하곤 숨 가쁘게 언덕을 달려 올라갔다. 순식간에 주인을 초월한 개가 언덕에 늘어져 있던 사내의 품으로 돌진했다.
“아이고, 이 녀석!”
단걸음에 언덕을 올라온 양치기 소년이 커다란 개에 깔려 바동거리는 사내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코코, 이리 와.”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며 사내의 얼굴을 혀로 핥아 내리던 개가 귀를 쫑긋하더니 이내 주인의 곁으로 달려갔다. 소년은 대강 성의 없이 개를 쓰다듬어 주곤, 개털에 파묻혀 아직도 발라당 누워 있는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왜 맨날 이런 데서 놀기만 해요?”
“놀다니. 너의 소중한 양들이 혹여 늑대에게 잡아먹히진 않는지 감시하고 있지 않느냐.”
“그거야 양치기인 제 일이고요. 할아버지는 양치기가 아니잖아요.”
“이참에 양치기나 되어 볼까 하는데.”
“양치기는 아무나 되나.”
비딱하게 중얼거린 소년이 찌그러진 사내의 밀짚모자를 툭툭 매만져 주었다. 하여간에 손이 많이 가는 할아버지였다.
“됐으니까 더 이상 방해하지 말고 가세요. 할아버지 때문에 코코도 신경 팔려서 제대로 일을 못 하잖아요.”
“개들이 원체 나를 잘 따르긴 하지.”
사내가 양팔을 벌리자, 기다렸다는 듯 양치기 개가 꼬리를 흔들며 또다시 사내의 품으로 안겨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