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8화 (178/328)

“그렇지가 않습니다, 도련님. 소문에는 살이 붙기 마련이니까요. 처음에는 그저 전하께서 한눈에 반하셨다는 내용이었는데, 날이 갈수록 전하께서 힘없는 시골 아낙을 문도성에 가두어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고 계신다는 내용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더러운 얘기들도 함께 거론되고 있고요.”

차라는 눈을 데구루루 굴려 페기를 훔쳐보았다. 제3자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봐 온 입장에선 변질된 소문조차 아주 근거가 없는 내용은 아니었다.

그러나 페기의 표정에는 달리 변화가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그녀가 예후르를 돌아보며 차분히 말했다.

“어차피 내가 돌아가면 사라질 소문이긴 하지만 일시적인 방책이라도 세워 두어야 해. 그러잖아도 성도에서의 네 민심이 썩 좋질 않다며.”

성도 오스피나의 민심은 예나 지금이나 해바라기처럼 레오폴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도의 시민들은 라발 용병대의 군홧발 아래 짓밟혔던 30년 전의 치욕을 여전히 잊지 못했고, 그 치욕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준 레오폴트를 변함없이 사랑했다.

예후르 역시 레오폴트의 후계자로 여겨지던 때는 그들로부터 호의적인 시선을 받았다. 사막 출신이라는 거부감도 레오폴트가 선택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덮일 정도였다. 그러나 레오폴트와 반목하고, 심지어는 성촉절에서 천사 미할리나의 성상을 베어 버린 뒤로 그를 향한 민심이 흉흉해졌다.

“나에 대한 민심이야 어떻든….”

“그리 대수롭지 않게 말할 일이 아니야. 교황으로 선출되려면 적어도 성도 시민들과 척을 지진 말아야지.”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비록 전하께서 만국의 백성들로부터 뱀을 죽인 영웅으로 칭송받고 계시다 하나, 교황의 자리에서 뜻을 펼치시려면 반드시 성도의 민심이 따라 주어야 합니다.”

페기에 이어 이시도르까지 강경하게 나왔지만, 예후르는 크게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내가 데리고 있는 여자가 페기란 사실을 결코 들켜선 안 된다는 겁니다. 페기는 반드시 우리의 계획에 따라 철저하게 계산된 날짜와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내야 해요. 이미 죽은 사람으로 알려졌기에 설사 얼굴을 들킨다 하여도 곧바로 존재가 폭로되진 않겠지만… 중대한 일이니 확실하게 해 두는 편이 좋겠죠.”

예후르가 손짓으로 막시모를 불렀다.

“내일부터 내가 데리고 있다는 여자에 대해 여러 경로로 소문을 퍼트리도록 해. 외모, 신분, 나이, 모두 제각각 다른 내용으로.”

“알겠습니다.”

이미 터져 나온 말은 막을 길이 없다. 막지 못한다면 거짓 정보를 흘려서 물을 흐려 놓아야 했다.

페기는 소문을 수습할 생각은 안 하고 부풀리기에만 여념 없는 그를 조금 불만스럽게 흘겨보았다. 하지만 예후르는 그마저 묵살하고 다음 문제로 넘어갔다.

“지금은 페기의 존재를 어느 시점, 어느 장소에서 공표할 것인지를 정하는 것이 가장 시급합니다. 레오가 뒷전으로 물러나고 알비야 공작이 교국의 실권을 장악한 현시점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페기의 귀환을 추진하긴 여러모로 어려움이 따를 겁니다. 오히려 저들에게 방해 공작을 펼 시간만 벌어 주겠지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표는 은밀하면서도 신속하게, 또한 만인의 의표를 찌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만 했다.

“염두에 두신 시기가 있습니까?”

“9월 중순에 공의회가 열린다지요.”

예후르의 말에 이시도르가 낮은 탄성을 질렀다.

공의회는 교황의 주최로 모든 추기경과 주교, 신학자들을 소집하여 진행되는 공식적인 종교 회의.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행사일 뿐만 아니라, 만국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이는 유일무이한 회담이기도 했다.

“만일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공의회가 열리는 에페소스 별궁에 나타나신다면, 그 자리에 모인 추기경들과 주교들이 바로 증인이 되어 줄 것입니다. 알비야 공작과 퀴테리아 추기경이 아무리 용을 쓴대도 파란을 막진 못하겠지요.”

“그럼 3년 전 선고되었던 화형이 부당하다는 쪽으로 말을 모아야 할까요?”

“도련님의 말씀대로 진행해도 상관없겠죠. 사실 공의회에 어떤 안건을 제출할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든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등장하실 기회만 마련하면 되니까요.”

교회의 교리와 규율에 대해 치열한 공방전이 오가는 공의회에는 자연스레 수많은 안건들이 올라온다. 경우에 따라선 외부인이 증인으로 오르기도 했다.

“차라 도련님의 말씀처럼 3년 전의 화형을 문제 삼아도 괜찮지만, 이왕이면 보다 자극적인 소재가 좋겠습니다.”

이시도르가 턱을 쓰다듬으며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일을 벌이려면 크게 벌이라 했습니다. 이번 공의회의 화두는 반드시 우리가 되어야만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성도 시민들의 이목까지 휘어잡을 수 있게요. 그래야만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등장하시는 날, 최대한 많은 인파가 에페소스 별궁에 모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이시도르는 넌지시 예후르에게 시선을 던졌다. 공의회를 내정해 둘 정도면 어떤 사안을 가지고 나올지도 미리 구상해 두었을 터.

그의 기대에 걸맞게 예후르는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려 두며 차분히 대꾸했다.

“나는 이번 공의회에서 알비야 공작의 신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생각입니다.”

차라가 뜨악하며 입을 벌렸다. 이시도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으며, 페기는 왈칵 눈살을 찌푸렸다.

“3년 전에 내가 겪었던 일을 되풀이하자는 거야?”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

예후르가 손바닥을 뒤집어 허공에 불을 지폈다.

“너는 이제 사도의 권능을 증명할 수 있어. 하지만 알비야 공작은 할 수 없지.”

“그렇게 무작정 확신할 수는….”

“확실해, 페기.”

예후르가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페기는 복잡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불을 피우지 못하여 돌팔매질 당했던 기억은 여전히 끔찍한 악몽으로 남아 있었다. 예후르의 말이 논리적으로 옳다는 것은 알지만 썩 내키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 홀로 전율에 떨던 이시도르가 활짝 만개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완벽합니다! 알비야 공작과 교황의 자리를 두고 다투시는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그분의 신성을 몸소 문제 삼는다니. 당장에 교국의 모든 비둘기들이 소식을 물고 온 대륙으로 뻗어 나갈 겁니다! 원탁의 추기경들부터 길거리 거지까지 모두가 그 이야기만을 물고 늘어질 거예요!”

“…확실히 구경꾼들이 엄청 몰리긴 하겠네.”

차라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말을 얹었다.

“어디 구경꾼뿐이겠습니까! 할 일 없는 타국의 귀족들까지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달려올 겁니다! 어쩌면 차기 교황이 판가름 날지도 모르는 세기의 대결을 놓칠 수야 없을 테니까요!”

“아, 네….”

턱을 괴고 시큰둥하게 대꾸한 차라가 비딱하게 예후르를 돌아보았다.

“그럼 비올라의 신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그 증인으로 페기가 공의회에 나타나는 건가? 한 천사의 사도가 동시에 둘 이상 존재한 전례가 없으니, 증인으로 딱이긴 하겠네. 그런데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야?”

페기는 존재 자체로 알비야 공작 비올라의 사도로서의 가치를 부정한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페기가 올바른 사도라는 결론으론 이어지지 못했다. 둘은 대척적인 존재. 공의회는 당연히 둘 중 누가 올바른 사도인지 가려내려 들 것이다.

“공의회는 모든 성직자들이 한곳에 모여 의견을 개진하는 자리. 성직자들의 전반적인 여론을 취합할 순 있어도 중대사를 결정할 권한은 없어. 결국에 중요한 판단은 원탁에서 이루어지지.”

예후르가 등 뒤의 막시모를 손짓했다. 기다렸다는 듯 막시모가 작은 상자를 들고 왔다. 상자 안에는 열한 개의 말이 들어 있었다.

“이건….”

차라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 하나를 꺼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알비야 공작 비올라를 제외한 현존하는 열한 명의 원탁 추기경들의 이름이 각각 하나씩 붙어 있었다.

“이번 사안 역시 그 중대함을 고려하면 반드시 원탁으로 이관될 거야. 일반 성직자들과 성도의 시민들은 공정한 방식으로 올바른 사도를 가려내라 요구할 테지만, 알다시피 작금의 원탁은 알비야 공작이 꽉 틀어쥐고 있어. 성화로 자신의 권능을 증명할 수 없는 알비야 공작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에게 유리한 결론을 도출하려 하겠지.”

“…….”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원탁에서 과반을 확보해야만 해.”

탁자 위로 수긍하는 눈빛들이 오갔다.

곧 열한 개의 말이 일렬로 놓였다.

예후르는 먼저 자기 자신과 안드레아의 말을 오른쪽에 두었다. 그러자 차라가 조금 자신 없는 투로 물었다.

“안드레아는 지금까지 원탁회의에 참여한 적이 없지 않아…?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안드레아의 위치는 매일 보고받고 있어. 그리고 페기의 일이라면 천하의 안드레아여도 발 벗고 나설 거야.”

다음은 알비야 공작의 세력인 퀴테리아 추기경과 보나벤투라 추기경이었다. 그 두 개의 말을 왼쪽에 두자, 차라가 코를 씰룩거리며 투덜거렸다.

“저 보나벤투라 추기경은 아주 퀴테리아 추기경한테 푹 빠졌어. 옛날엔 오직 사도만을 섬기겠다던 사람이, 흥.”

“어디 보나벤투라 추기경뿐이겠습니까. 요사이 젊은 성직자들 사이에선 퀴테리아 추기경의 급진적인 개혁 정책이 아주 인기입니다.”

이시도르가 쓰게 웃으며 하는 말에 차라는 콧방귀만 뀌었다. 퀴테리아 휘하의 스스로를 청백파라 명명한 일당들은 극단적인 원리주의를 앞세워 깡패처럼 성궁을 휘젓고 다녔다.

다음으로 예후르는 솔란지아 추기경을 비올라의 편인 왼쪽에 두었다. 이시도르가 깜짝 놀라 만류했다.

“전하. 탐보프 측은 알비야 공작과 퀴테리아 추기경에게 번번이 대립각을 세워 왔습니다.”

“이번은 다를 겁니다. 내가 페기의 편에 설 테니.”

잠시 의아해하던 이시도르가 이내 탄식을 흘렸다. 예후르는 탐보프의 화약고라 불리던 동부를 들쑤셔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아무리 탐보프 측이 알비야 공작을 위시한 위스누아 세력을 같잖게 본다 하여도, 예후르에 대한 앙심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솔란지아 추기경은 공공연히 빌헬미나의 꼭두각시라고 불리는 사람이죠.”

예후르가 미미한 미소를 머금고 솔란지아의 말을 지그시 눌렀다.

“빌헬미나 3세는 필시 나를 증오하고 있을 테니, 솔란지아 추기경이 나와 같은 편에 서 줄 일은 없을 겁니다. 더욱이 이번 일로 알비야 공작이 무너진다면 교황의 권좌가 내게로 떨어질 텐데, 빌헬미나의 그 빌어먹을 성정에 내가 교황이 되는 꼴을 순순히 지켜볼 리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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