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6화 (176/328)

벌떡 몸을 일으킨 아나클레토가 개처럼 그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어서 불을 일으켜 주십시오. 저기, 저기에 사악한 마귀가 있지 않습니까! 빨리!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마귀를 죽여 없애란 말이야!”

비명처럼 내지르는 외침에도 예후르는 그저 가만히 턱을 괴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얼핏 무료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에 그의 바짓단을 부여잡은 아나클레토의 손이 짧게 경련했다. 설마설마했던 의심이 불길하게 덮쳐 왔다. 간신히 움켜쥔 마지막 희망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예후르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아이야.”

“…….”

“네 눈에는 내가 아직도 사도로 보이느냐?”

덥석, 발목이 잡혔다. 뼛속까지 파고든 한기와 등 뒤로 엄습하는 짐승의 그르렁 소리에 전신이 얼어붙었다. 아나클레토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머나먼 기억 속 엄숙한 종소리가 들려오며 발렌트 대성당의 한쪽 벽을 메우던 지옥도가 스멀스멀 뇌리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빛이 닿지 않는 먼 지하.

혹한이 몰아치는 암흑 속에는 광명의 천사 미할리나가 지피고 다른 일곱 천사들이 입김을 불어 퍼트린 성화가 타오른다 하였다. 날개 없는 마귀들은 하염없이 불길 속을 떠돌아야 하나, 죽음을 선사 받지 못한 그들의 영혼은 영속된 고통을 면치 못하리니.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래고래 비명을 내지르는 추악한 마귀가 점차 자신의 모습으로 변해 갔다. 살이 늘어진 늙은 몸뚱이가 냉엄한 불길에 휩싸인다. 하늘을 거스른 죄로 땅속 지하에 갇혀 영원토록 지옥 불에 뒹굴어야 하는 마귀의 형벌이 어쩌면 나에게도….

안 돼.

본능적인 깨달음과 동시에 발끝부터 잘근잘근 씹어 먹히는 고통이 생생하게 엄습했다. 생살이 씹히고 질긴 근육이 잇새로 찢겼다. 뼈마디가 와작와작 조각나는 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귓전으로 돌진했다. 전신의 통각이 너도나도 아우성을 질러 댔다.

“끄아아아악!”

아나클레토가 사지를 뒤틀며 몸부림을 쳤다. 그 바람에 탁자가 기우뚱하며 등불이 땅을 굴렀다. 깨진 유리 사이로 불길이 치솟았다. 아나클레토의 눈은 이미 반쯤 넘어가고 있었다. 허옇게 거품 문 입가에선 이제 비명조차 드문드문했다.

기름 먹은 불길이 순식간에 화르륵 번져 나갔다. 마귀는 그림자 속에 하반신을 담근 채로 늙은 성직자의 몸을 씹어 삼켰고, 아나클레토는 실낱같은 목숨을 부지한 채 짧은 경련을 이어 갔다. 서서히 절명하는 눈에 말 못 할 공포만이 가득했다. 짓밟히는 고통을 이제 그는 알까.

뱀은 눈을 감고 그 모두를 즐겼다.

환상적이었다.

시커먼 밤하늘 아래 불티가 날렸다.

눈 깜짝할 새 농가를 집어삼킨 화마는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불길이 금방이라도 하늘에 닿을 듯 까마득했다. 열기를 피해 먼 곳으로 물러난 페기는 불안한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갑자기 농가의 지붕 한쪽이 우지끈 무너져 내렸다. 기함한 페기가 달려 나가려 하자, 마부를 자청하여 따라왔던 막시모가 그녀를 뜯어말렸다. 페기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그의 손길을 뿌리치려 했다. 비명이 터져 나올 듯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때, 무너지는 농가에서 검은 인영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팔을 붙들던 막시모의 아귀에서 힘이 풀린 찰나에 페기는 온 힘을 다해 농가로 달려갔다. 순식간에 홧홧해지는 공기 속에서 눈물겹도록 익숙한 형태가 아른거렸다.

“…예후르.”

페기는 울음을 삼키며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불타 이지러지는 농가를 뒤로한 그는 시커먼 역광을 두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예후르였다. 그럼에도 틀림없이 예후르인데, 기이하게도 전혀 다른 존재를 맞닥뜨린 것 같은 생경한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페기는 소리 없이 흐느꼈다. 좀처럼 가시지 않는 위화감이 속절없이 그녀를 무너트렸다. 문득 눈앞의 존재가 두렵고 막막해졌다. 그를 앞에 두고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이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그가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질하려던 페기가 안간힘을 다해 다리를 멈추었다. 한 발, 한 발 그가 다가올 때마다 육감이 공포에 찬 비명을 질렀지만 꿋꿋이 제자리에 버티어 섰다. 부릅뜬 눈으로 가까워지는 역광만을 보았다. 불길이 그리는 그의 섬세한 윤곽만을 응시했다.

마침내 그가 목전에 다다랐다.

페기는 눈물 어린 얼굴을 가만히 들어 올렸다. 흩날리는 불티 사이로 흐릿하게나마 그의 얼굴이 보였다. 저를 향해 내려오는 고요한 시선을 읽을 수 없었다. 그 몰이해가 너무도 무서워 페기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그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그를 믿고 싶다. 시끄럽게 울리는 경종을 외면하면서까지 그를 잡고 싶다.

“예후르.”

그녀가 애달프게 속삭였다.

“키스해 줘.”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강한 힘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아올렸다. 한 손으로 그녀의 등을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감싸며 기꺼이 입술을 맞추었다. 아슬아슬하게 발끝으로 선 그녀는 눈물을 삼키며 그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반파되었던 농가의 천장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굉음을 울리며 붕괴하는 건물 위로 불길은 끝없이 타올랐다. 부옇게 솟구치는 연기 사이로 불티가 무수하게 흩날렸다. 별이 저물고도 밤은 깊어 갔고, 폐허는 잿더미로 내려앉았다.

***

조각달이 걸린 밤이었다.

앙겔리카 성궁의 복도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복도를 비추는 촛불은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처량하게 몸을 뒤틀었고, 오늘 밤 경비를 맡은 근위대원은 자꾸만 감기는 눈을 부릅뜨며 잠을 내쫓기 바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지막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긴 창대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던 근위대원이 흠칫하며 복도 너머를 돌아보았다. 부정할 수 없는 발소리에 근위대원이 황급히 목청을 높였다.

“거기 누구십니까?”

잠시 멈칫하는 듯하던 발걸음이 다시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근위대원이 긴장된 숨을 들이켜며 창대를 꽉 움켜쥐었다. 혹시라도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거든 당장에 창으로 찔러 버릴 생각이었으나, 불빛 닿는 곳으로 들어오는 구두코가 유난히 희었다.

근위대원이 황망히 중얼거렸다.

“도련님…?”

저를 향하는 날카로운 창살을 보고 흠칫한 차라가 슬슬 창을 피해 둥글게 돌아왔다. 그제야 자신의 불경을 깨닫고 다급히 창을 내린 근위대원이 당혹한 기색을 누르며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도련님께서 이 야심한 시각에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차라가 공연히 그의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그냥 산책 겸….”

“내전에서 여기까지 산책을 나오셨다고요…?”

근위대원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차라의 침실이 위치한 내전의 심부에서 여기까진 제법 거리가 있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십시오. 호위는 아무도 따라붙지 않은 겁니까?”

근위대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휑하니 빈 차라의 등 뒤를 훑어보았다. 내일 당장 사도의 경호를 맡은 동료들을 족칠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눈앞으로 불쑥 물병이 내밀어졌다.

“도, 도련님?”

“마셔요.”

“네?”

“마시라고요.”

얼떨결에 물병을 받아 든 근위대원이 멀뚱히 차라만 쳐다보았다. 갑갑해진 차라가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자, 사도가 내리는 하사품이에요. 여기 축복. 이제 마시면 돼요.”

축복이랍시고 물병을 쓱쓱 매만진 차라가 근위대원을 재촉했다. 대관절 야심한 시각에 이 난리인 사도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신심 깊은 근위대원은 순순히 그의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미지근한 물이 꿀꺽꿀꺽 근위대원의 목울대로 넘어갔다.

슬금슬금 그의 기색을 살피던 차라가 넌지시 물었다.

“어때요?”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기분이나 느낌이나… 어디 이상하지 않아요?”

“글쎄요. 딱히 그런 건….”

여상하게 말을 잇던 근위대원이 갑자기 휘청했다. 억 소리도 못 내고 쓰러지는 근위대원을 보며 차라는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엄지를 치켜들고 방방 뛰고 있을 요슈아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차라는 찬 바닥에 엎어진 근위대원에게 망토를 덮어 주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잠긴 문을 열었다. 철컥, 잠금장치가 풀리며 문이 열렸다. 조심스레 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가자, 오래된 책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그를 반겼다.

이곳은 교황만이 드나들 수 있는 비밀 서재.

지난 몇 달 연락이 두절되었던 것으로도 모자라 예후르의 영지에서 내려오지 않던 그를 며칠 전 고드릭이 직접 찾아왔었다.

“성하께서 눈물로 도련님을 그리고 계십니다. 제발 성하를 좀 살려 주십시오.”

간곡하게 비는 고드릭이 눈에 밟혀 차라는 결국 성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페기의 위태로운 모습이 뇌리를 떠돌았으나, 결국에 성궁으로 돌아온 것 역시 절반은 그녀 때문이었다.

페기는 어떻게 살아난 걸까.

기실 차라는 페기가 되살아난 이유 따위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으리란 것을 잘 알았다. 만일 페기가 자신의 부활을 공표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맞닥트릴 문제이기도 했다. 부활한 그녀를 두고 기적이라며 칭송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사특한 술수가 분명하다며 깎아내릴 이들도 있을 터.

3년 전, 페기가 돌팔매질 당할 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던 차라는 이번만큼은 반드시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어떻게든 부활의 실마리를 찾아내어 못된 소리 지껄이는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전의를 다진 차라가 등불을 들고 의욕적으로 책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교회의 중심이라는 성궁, 그중에서도 교황만이 드나들 수 있는 이 비밀 서재라면 필시 중대한 단서를 품고 있으리라.

높이 난 창문으로 미약한 달빛이 새어 들었다.

차라는 까마득한 책장을 하나하나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눈에 띄는 책들을 꺼내 읽기도 하고,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문자를 보며 좌절하기도 했다. 한번 집중하면 다른 건 안중에도 없는 차라는 속절없이 책의 세상으로 빠져들었다.

책을 넘기던 손길이 멈칫한 것은 그때였다.

어느새 뻑뻑해진 눈꺼풀을 깜빡이던 차라가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책에 코를 박았다. 생전 처음 보는 시구였다. 그는 오래된 사어를 손가락을 짚어 가며 더듬더듬 해석해 보았다.

빛이여.

그대는 나의 진리, 나의 이상.

멀리 가지 마시오.

그대는 하나뿐인 나의 등불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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