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5화 (175/328)

“여보게나. 내가 모시는 것은 원탁의 권력뿐일세.”

어울리지 않게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도. 오, 그래, 한때 밤하늘의 별처럼 특별한 존재였지. 지금도 엘피도 공작처럼 더러 특출한 이들이 나타나곤 하지만 그래 봤자 민중의 추앙이나 좀 받을 뿐이지. 중요한 것은 원탁에서 누리는 권력일세. 그것을 휘어잡는 순간, 나 같은 일개 추기경도 사도를 죽일 수 있는 것이고.”

“당신은 하늘의 심판이 두렵지도 않나요?”

“그런 게 두려웠다면 원탁에 앉지도 않았어. 원탁은 말일세, 사람의 선한 마음을 가리고 어두운 욕망을 자극하는 요물이야. 원탁에 오래 앉은 사람 치고 괴물이 아닌 자가 없네. 그 공명정대하다던 글리체리아 추기경이 자매를 위해 어떤 짓까지 했는지 자네는 상상도 못 하겠지.”

별안간 쿨럭이는 잔기침 소리가 터졌다. 잠시 들뜬 김에 부풀었던 그의 기세는 삽시간에 꺼져 버렸다. 맥없이 축 처져선 숫제 한탄하는 목소리가 느릿느릿 이어졌다.

“그래, 나도 결국은 괴물이 되어 버렸네. 성직자 된 몸으로 한낱 육신의 욕망을 탐하고 재물을 긁어모았지. 사도를 죽인 것은 내 수많은 죄목 중의 하나일 뿐이야. 만에 하나 죽은 사도가 살아 돌아와 내 앞에서 피눈물을 흘린다 하여도 나는 달리 해 줄 말이 없군그래. 내가 빈틈을 보여 이렇게 잡혀 온 것처럼, 그 어린 사도도 철없이 빈틈을 보인 탓이 아니겠나.”

“…….”

“다만 일이 이렇게 끝날 줄 알았으면 우리 어여쁜 조카딸을 엘피도 공작에게 보이지 말 걸 그랬어.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조카가 어쩌다 그런 망나니 같은 놈에게 빠져선…. 형님 그렇게 가시고 세도파마저 울고 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영 좋지 않아.”

가만가만 넋두리하는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못 박힌 듯 오래도록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던 페기가 간신히 발을 뒤로 물렸다. 그녀는 자꾸만 손을 뻗는 어둠을 진저리 치며 뒤돌아 걸었다. 요란한 발소리가 마치 깔깔거리는 아나클레토의 비웃음처럼 들렸다.

거칠게 문을 밀고 나온 페기가 쓰러질 것처럼 예후르의 품에 안겼다. 열기 어린 숨을 씨근덕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등불 아래서 보랏빛 눈이 선득하게 빛났다.

“죽일 거지?”

예후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페기는 힘주어 그의 팔을 잡았다. 가지런한 손톱이 그의 옷을 파고들었다.

“지금 죽여.”

“…….”

“가장 처절하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 예후르는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추곤 농가 안으로 들어갔다. 닫힌 문을 등 뒤에 두고 페기는 불어오는 밤바람을 맞았다. 분노로 떨리는 손끝이 좀체 잦아들지 않았다.

예후르는 등불을 들고 저벅저벅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내딛는 발걸음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어둠을 꿰뚫어 보는 그였다. 애당초 등불조차 그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앞을 둥글게 비추어 나가던 불빛에 낡은 침대 모서리가 들어왔다. 예후르는 근처에 나뒹굴던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등불을 침대 옆 탁자에 올려놓자, 말라비틀어진 얼굴에 눈만 퀭하게 튀어나온 아나클레토가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엘피도 공작…?”

아나클레토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듯 연신 그를 아래위로 훑었다.

“맙소사… 정말로 전하시군요.”

“그동안 나를 많이 찾았다고 들었습니다.”

예후르가 평온하게 말했다. 아나클레토는 멍하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를 여기 가두고 사육하던 놈들은 입에 아교라도 바른 것처럼 꿈쩍도 안 했으니까요. 역시, 날 납치한 건 당신이셨습니다. 내 비리가 갑자기 폭로된 것도 전하께서 꾸미신 일이겠군요.”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으니까요.”

아나클레토가 낮게 웃었다. 그러나 웃음소리는 얼마 가지 못하고 거친 기침 소리로 변모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해진 어깨가 마구 들썩거렸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겨우 기침이 잦아든 아나클레토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 없듯 영원한 권력도 없지요. 내 원탁의 자리와 황제 폐하의 후광만을 믿고 많은 이들에게 무도하였습니다. 수십 년을 쌓아 온 죄악이 언젠가 내 발목을 잡으리라 예상하고 있었지요.”

“후회합니까?”

“후회요?”

무척이나 재미난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아나클레토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이보십시오, 전하. 내게 일평생 후회할 거리가 있다면, 그건 진작에 당신을 도려내지 않은 것입니다. 그 옛날 교황 제네로사 5세가 천한 용병대의 칼날에 죽었던 것처럼, 당신 어릴 적에도 그리 비참한 죽음을 선사할 수 있었단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본인의 능력을 참 과신하십니다.”

“오, 전하. 내가 전하를 처음 뵈었을 때 전하께선 고작 다섯 살이셨습니다. 3년 전 거짓된 사도를 죽였던 것처럼 그 옛날에 제가 악심을 먹었다면 전하께서 이리 장성해 계셨겠습니까?”

“차라리 그러지 그랬습니까. 그럼 3년 전의 비극은 없었을 텐데.”

예후르가 눈을 낮게 내리뜨고 읊조렸다. 아나클레토의 말문이 막힌 사이, 그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이어졌다.

“그대의 형님인 바도비체 후작은 이미 죽었고, 빌헬미나 3세는 그대를 돌볼 여력이 되지 않습니다.”

“…….”

“속죄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등불이 세차게 타올랐다.

난데없이 커지는 불길에 놀란 아나클레토가 화들짝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람 저문 사위였다. 나무판자를 얼기설기 짜 맞춰 놓은 농가의 벽도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오직 기름 먹은 등불만이 흉측하게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아연하게 등불을 응시하던 아나클레토는 문득 비대하게 커지는 불길을 따라 영역을 넓히는 빛을 발견했다. 등불을 중심으로 빛이 둥글게 퍼지고 있었다. 사방 자욱하던 어둠은 어느새 저 멀리로 물러나고, 오직 빛이 점령한 원 안에서 그림자들만 연신 갈대처럼 흔들거렸다.

그 가운데 엘피도 공작이 있었다.

맹렬한 불빛을 맞는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했다. 깊숙하게 자리하여 숫제 밝게 보이는 법이 없던 금안이 샛노랗게 비치고, 우뚝한 코를 따라 뺨에 음영을 그리던 그림자마저 타오르는 불빛의 서슬에 죄 날아가 버렸다. 눈부신 빛 속에서 도리어 양감을 잃어버린 얼굴은 흡사 대성당을 장식하는 고귀한 성화처럼 보였다.

소리 없는 깨달음은 노도처럼 밀려들었다.

아나클레토는 작게 신음했다. 주저 없이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어쩌면 먼 훗날에 닥쳐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순간이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끝내 하늘께서 괴물이 되어 버린 그를 처단하러 오신 것이다.

“오, 사도이시여.”

아나클레토는 닳아빠진 무릎을 철퍼덕 굽혀 앉았다.

“일평생 신앙을 의심하며 살았으나 당신만은 의심치 못했습니다. 처음 보자마자 알았지요. 아, 이분은 다른 사도와는 다르구나. 고작 용병대의 칼날 따위에 스러질 분이 아니구나.”

늘어진 턱살이 경련하듯 흔들렸다. 그는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눈물처럼 훔쳤다.

“하지만 늦으셨습니다. 더 빨리 오셨어야죠. 당신께서 방관하시는 동안에 저는 수많은 어린 양들의 고혈을 빨아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한때 지극한 성심을 지녔던 성직자가 이런 듣도 보도 못한 괴물이 되어 버렸단 말입니다! 어찌하여 지금껏 이 괴물을 좌시하셨습니까, 어째서요!”

가래침이 들끓는 목소리가 격정적으로 울려 퍼졌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괴로워하던 아나클레토가 곧 모든 것을 내려 둔 사람처럼 처량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탓한들 무엇 하겠습니까. 자, 오십시오. 당신께서 내리시는 심판, 겸허히 받겠습니다. 부디 이 죄 많은 영혼을 태워 없애십시오.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괴물로 타락하였으니, 더 이상 이 괴물의 삶에 아무런 여한도 없습니다.”

반듯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감은 아나클레토는 진심으로 속죄하는 수도자처럼 보였다. 창백한 뺨에 얼핏 경건한 빛이 감돌기까지 했다.

그러자 예후르가 조금 놀란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눈을 떠야지요.”

“예?”

얼결에 눈을 뜬 아나클레토가 무척이나 당혹하여 반문했다. 예후르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기색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괴물을 벌하러 온 것도, 죄 많은 영혼을 태우러 온 것도 아닙니다. 눈을 떠서 똑바로 보세요. 내가 무엇으로 보입니까?”

아나클레토는 멍청하게 눈만 끔벅였다. 좀처럼 기세가 줄어들지 않는 등불은 흡사 하늘에 뜬 태양처럼 밝았다. 하얗게 날아가 버린 시야에 오직 사도의 웃는 얼굴만이 선명하게 비칠 뿐이었다.

…아니, 아니었다.

그는 별안간 제 발치에서 꿈틀거리는 그림자를 발견하곤 소스라치며 놀랐다.

“뭐, 뭐야!”

침대에 발라당 엎어진 아나클레토가 기겁하여 침대의 모서리로 기어갔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검은 그림자가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이게 다 뭐야! 전하!”

아나클레토가 기함하여 예후르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순간 섬뜩한 자각이 아나클레토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서, 설마 당신….”

“…….”

“아, 아니지? 아니라고 말을 해! 당신이 그럴 리가 없잖아! 다, 당신일 리가…!”

말을 이을 새도 없이 등 뒤에서 한기가 솟구쳤다.

아나클레토는 짧은 비명을 토하며 화들짝 뒤를 돌아보았다. 그림자 속에 똬리 튼 어둠이 빛을 찢으며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었다. 속절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나클레토는 불현듯 그림자 속에서 흉측한 발톱이 튀어나오자 금방이라도 졸도할 것처럼 목 졸린 소리를 냈다.

“괴, 괴물! 괴물이야! 밖에 아무도 없느냐! 여기 괴물이 있어! 괴물이…!”

정신없이 고함을 내지르던 입이 돌연 멈추었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이 역병처럼 번져 나갔다. 아나클레토는 창백하게 질린 눈으로 그림자 속에서 기어 나오는 형체를 응시했다.

불빛을 죄 삼켜 버리는 시커먼 가죽과 척추를 따라 오돌토돌 가시처럼 돋아난 쐐기.

양팔로 바닥을 짚으며 그림자 속에서 서서히 머리를 일으키는 괴물의 상판이 비로소 낯익었다.

아나클레토는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럴 수 없다, 그럴 리 없다, 필사적으로 부정했던 이름이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마귀.

깨닫는 순간, 겸허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려던 각오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나클레토는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꿈틀꿈틀 제 쪽으로 기어 오는 마귀를 피해 몸을 물리다 그만,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악!”

볼품없이 바닥을 구른 아나클레토가 숨이 막히도록 찔러 오는 고통을 참으려 이를 악물었다. 식은땀 뻘뻘 흘리며 겨우 눈을 뜨는데, 바로 코앞에 윤이 나는 구두코가 보였다. 그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예후르가 흘끗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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