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화 (174/328)

페기는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바도비체 후작가의 일원으로 사사로이는 아나클레토 추기경의 조카라 하나, 세도파 바도비체는 진심으로 예후르를 사랑하던 여자였다. 그런 사람이 예후르의 급소를 찌르는 행위에 찬동했을 리 없었다.

“네가 나에게 주었던 레오폴트의 반지.”

그 말에 페기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가셨다.

“…설마.”

“세도파가 나한테서 훔쳐 간 거였어. 그게 나를 위한 길이었다는데… 너를 죽이는 일이 어떻게 나를 위한 길이 되는 건지 모르겠네.”

예후르가 서글프게 읊조렸다. 페기는 어지럼증을 참지 못하고 이마를 짚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진실들이 범람하여 홍수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럼 본시오는 역시….”

“아나클레토의 사주를 받은 자야. 탐보프 정리가 끝나면 마지막으로 붙잡아 죄를 물을 생각이었어. 아마 반지도 그자에게 있겠지.”

페기는 저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이가 갈리는 작자였다. 아직 자신에게 남겨진 몫이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 명이 더 있어.”

페기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예후르는 묘하게 경직된 태도로 웃고 있었다.

“아나클레토에게 내 버릇을 들이라며 헛바람을 불어넣고, 당시 뱀의 흔적을 쫓아 비밀스럽게 움직이던 내 동선을 세도파에게 알린 사람.”

적막이 유독 오래갔다. 페기는 다물린 그의 입술을 보며 애가 탔다.

“그 사람이 누군데.”

“…….”

“예후르. 그게 대체 누구야.”

그의 말대로라면 그자가 바로 원흉이었다. 페기는 속을 끓이며 다시 한번 그를 재촉했다.

“예후르.”

“…나중에. 그건 나중에 알려 줄게.”

“뭐?”

페기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그러나 예후르는 결심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금 들으면 쓸데없이 혼란만 커질 거야. 네가 원래 자리를 되찾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그때 알려 줄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 일이야. 내 복수인데 왜 너만 알고 나는 알면 안 되는데.”

“이건 나의 복수이기도 하니까.”

예후르가 강경하게 대꾸했다.

“나를 빌미로 감히 너를 앗아 간 자들, 나 역시 용서할 수가 없어.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원수를 갚아야지. 그 일념만으로 전쟁까지 일으켰는데, 이제 와서 엎어지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단어 하나하나 씹어 뱉는 그의 기세가 서늘했다. 페기는 아연한 기분을 삼키며 어렵사리 물었다.

“이제 와 엎어진다니… 누군지 알면 내가 복수를 포기할 거란 말이야?”

예후르는 말없이 입술을 닫아걸었다. 페기는 어깨가 흔들리도록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의 침묵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대체 누가… 아니, 예후르. 난 아무래도 모르겠어. 대체 누군데 내가 복수를 포기한단 거야. 내가 어떤 심정으로 무덤에서 기어올라 왔는데. 매일 아침 부서진 손을 보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 마음만 기억해.”

핏줄이 돋도록 치맛자락을 움켜쥔 그녀의 손등을 예후르의 손이 차분하게 덮어 왔다. 그는 씨근덕거리는 그녀와 가만히 시선을 맞추며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의 그 분노만 되새겨. 그러면 이룰 수 있어. 너를 그렇게 만들고, 너를 나락으로 빠트렸던 원흉을 죽여 없앨 수 있어.”

“내가 원래 자리를 되찾고 난 뒤에…?”

“되찾고 난 뒤에.”

예후르가 새기듯 말을 반복했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갈등하던 페기가 못내 어지러운 듯이 얼굴을 푹 숙였다. 그러고는 그의 팔에 매달려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후르는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고꾸라지려는 그녀의 몸을 받아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기다렸다는 듯 페기가 양팔로 그의 목을 감으며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맥없이 그의 가슴팍에 몸을 기댄 페기가 입술을 열어 조용히 읊조렸다.

“나 없는 동안 얼마나 힘들었어.”

가만가만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던 그의 손길이 잠시 멈추었다. 몸을 틀어 고쳐 앉은 예후르가 포근한 품을 열어 그녀를 넉넉하게 감싸 안았다.

“혼날 줄 알았는데.”

곱슬거리는 머리칼 사이에 입술을 파묻고 속삭이는 목소리엔 옅은 웃음기가 묻어났다. 페기는 그의 너른 가슴팍에 뺨을 묻은 채로 멍하니 그의 평온한 심장 박동을 들었다.

“칭찬은 못 하겠어.”

레오폴트와 크게 다투었다고 했다. 미친 사도 소리를 들으며 전쟁을 조장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진의를 모른 채 자진하여 불구덩이로 뛰어들었다.

원래부터 핍박받는 땅이었다는 사실은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만일 그 전쟁이 동부에게 유리한 쪽으로 끝나지 않았더라면 페기는 지금쯤 참담한 기분으로 그를 마주해야 했으리라.

“알아. 칭찬받을 만한 짓은 아니었다는 거.”

예후르는 가만히 눈을 내리떴다.

“그래도 난 최선을 다했어. 너 없는 시간을 버티면서….”

안다.

그래서 섣불리 그를 비난하지 못했다. 나라면 어땠을까,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막히는 일이기에.

복수에 매달리지 말라는 경고는 그야말로 격언에 불과했다. 소중한 사람이 억울하게 죽어 사라졌는데 눈 돌아가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상실은 당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 영원한 상실을 겪은 적 없는 페기 역시, 그래서 예후르의 선택을 함부로 책망할 수 없었다.

마차는 끊임없이 나아갔다.

도로가 깔리지 않은 시골길은 울퉁불퉁하여 금방이라도 몸이 튀어 나갈 듯했다. 그러나 페기는 예후르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서 꾸벅꾸벅 선잠에 들었고, 예후르는 가만가만 그녀를 어르며 고요한 침묵을 버텨 나갔다. 어느덧 검게 물든 밤하늘에서 별이 총총 반짝였다.

그리 아득한 시간이 흘러 저 멀리로 시골 농가의 등불이 보이기 시작했다. 밤의 장막을 꿰뚫고 전해 오는 불빛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예후르가 페기의 몸을 약하게 흔들었다. 작게 신음하며 잠투정을 하던 페기가 스르르 눈을 떴다.

예후르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페기. 우린 지금 아나클레토에게 가고 있어.”

페기가 잠에 취하여 혼몽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나클레토 추기경?”

“응. 그자의 악행을 고발하여 지금은 추기경도 뭣도 아닌 상태야. 고향으로 달아나던 것을 붙잡아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두어 두었지.”

그의 눈이 야트막한 호선을 그렸다. 페기는 어둠이 아스라하게 내린 그의 얼굴을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곱게 죽여선 안 되잖아. 빌헬미나와 바도비체 후작과 세도파 바도비체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주어야지.”

달콤한 말씨에 홀린 페기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클레토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데?”

그의 입술이 그림처럼 휘어졌다.

“심판.”

마차는 곧 농가 앞에 멈추어 섰다. 드문드문 나무 몇 그루만 세워진 황량한 들판이었다. 농가에 매달린 등불이 그려 내는 반원 형태의 불빛 너머에서 우수수 밤바람이 불어왔다. 마차에서 내린 페기는 안개처럼 자욱한 어둠 속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페기.”

예후르가 농가 앞에서 손짓했다. 페기는 어쩐지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밤이슬 머금은 풀잎이 발목 부근의 살갗을 스칠 때마다 기묘한 소름이 돋았다.

“아나클레토는 이 안에 있어. 먼저 들어가 보겠니?”

페기는 낡은 나무 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바람결에 등불이 흔들릴 때마다 끼익, 끼익 하는 쇳소리가 났다.

“…날 보면 뭐라고 할까.”

“글쎄.”

예후르가 차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자가 하는 말은 모두 헛소리야. 귀담아듣지 마.”

페기는 자신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농가의 문이 서서히 열렸다. 페기는 예후르가 건네준 등불을 들고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문이 닫히자 귓전을 어지럽히던 바람 소리마저 가셨다. 완전한 적막 속에서 어디선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렸다. 페기는 가만히 숨을 들이마셨다. 습하고 퀴퀴한 냄새가 공기 중에 가득 배어났다.

“…이봐, 자네.”

불빛이 닿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되는지 좀 알려 줄 수 있겠나?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군.”

말하는 중간중간 잔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페기는 잠시 뜸을 들였다.

“…자정이 지났으니 7월 28일이에요.”

“벌써 7월이라니. 세월 참 빠르군.”

소리 높인 웃음소리가 갈라지며 쿨럭이는 기침이 연방 터졌다. 격한 기침 소리가 허름한 농가 안을 몰아치는 와중에도 페기는 미동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 그런데 자네는 특이하군. 지금껏 내 묻는 말에 대답해 준 놈이 하나도 없었는데 말이야. 신참인가?”

낄낄거리는 소리가 묻어났다. 페기는 묵묵부답으로 어둠 속을 응시하기만 했다.

“거기 그렇게 가만히 서 있지만 말고 가까이 와 보게. 내 눈이 하도 침침해져서 자네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군.”

“…왜 끌려왔다고 생각하시나요?”

“뭐?”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라는 듯 침묵에 의아한 기색이 드러났다. 곧 아나클레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왜 그런 것을 묻지?”

“…….”

“그래… 이유가 뭐 중요하겠나. 어차피 죽을 날 받아 두고 사는 처지에. 내가 왜 끌려왔냐고? 그거야 간단하지. 내가 틈을 보였기 때문이 아니겠나.”

페기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틈이라고요?”

“그래, 틈. 치명적일 수 있는 약점을 더욱 철저하게 감추지 않은 잘못으로 이렇게 끌려와 있지. 그나저나 엘피도 공작은 아주 나를 말려 죽일 심산인가 보군. 날 잡자마자 목을 베어 버릴 줄 알았는데 이렇게나 오래 버려둘 줄이야.”

어둠 속에서 퉤, 하고 침을 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왕 대답해 준 김에 엘피도 공작에게 가서 내 말을 좀 전해 주게나. 죽이든 살리든, 어서 결정을 내리시라고.”

“그분께서 진정 이러시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글쎄. 화가 아주 많이 난 모양이지? 난 그래도 공작이 이보단 똑똑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고작해야 성화를 잃어버린 계집 하나 죽은 것으로 이렇게 물고 늘어질 줄 누가 짐작했겠나.”

“…고작해야 성화를 잃어버린 계집이요.”

페기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뒤로 아나클레토가 무어라 주절거리는 것 같았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아나클레토의 말을 동강 내며 불쑥 물었다.

“만약 당신이 죽였던 그 사도가 진정한 사도였다면… 즉, 누명을 쓰고 죽은 거라면 어떨 것 같아요?”

“누명? 진정한 사도?”

어리둥절하게 되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간의 침묵 뒤로 갑자기 왁자한 폭소가 울려 퍼졌다.

“자네,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신참이 분명하군그래! 진정한 사도니 누명이니, 무에 중요하단 말인가? 어차피 죽어 사라진 계집일 뿐인데!”

“당신은 사도를 모신다는 성직자잖아요.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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