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3화 (173/328)

페기는 그의 옷깃을 쥐며 애타게 매달렸다.

“난 보석 같은 거 필요 없어. 온실도 원하지 않아. 어제처럼 자해하기도 싫어, 이제 아픈 건 끔찍하단 말이야. 그런데 더 끔찍한 건 그러다 너까지 다치는 거야.”

더듬더듬 흘러나오는 말에 조금씩 울음이 섞여 들었다. 페기는 속이 타도록 애끓는 심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 널 미워하지 않아. 전부 거짓말이었어. 그런데 이러다 혹시라도 널 미워하게 될까 봐, 그게 겁이 나. 내가 널 미워하고도 살 수 있을까? 어제처럼 또 그렇게 미쳐 버리면 어떡하지? 계속 이렇게 원치 않는 곳에 갇혀 살다가 갑자기 돌아 버려서 목이라도 매면, 그렇게 또 죽어 버리면 대체 나는 뭐가 되는 거야.”

죽음이 두렵다.

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이 현실이 죽음보다 더 끔찍해진다면, 죽음이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된다면, 그토록 두려워 피해 왔던 죽음으로 자진하여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스운 일이었다.

악바리처럼 무덤에서 기어 올라와 다시 죽음을 택한다니. 그보다 더 무의미할 수가 있을까. 천운으로 얻은 새로운 기회를 그토록 쓰레기같이 낭비할 수는 없었다.

“난 돌아갈 거야.”

보랏빛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내가 원래 있던 곳으로,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거야. 가서, 내가 억울하게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되찾을 거야.”

그의 옷깃을 틀어쥔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페기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계속해 말을 이었다.

“싸워서 쟁취할 거야. 원래 내 것이었던 것들을 정당하게 누릴 거야. 널 미워하지도 않을 테고, 네가 바라던 대로 행복하게 살 거야. 내 행복은 거기 있으니까.”

“…….”

“그러니 말해.”

페기가 그의 옷깃을 힘껏 잡아당겼다. 서서히 끌려 내려오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며 으르듯 속삭였다.

“진정 나를 소중히 여긴다면 말해. 날 방해하지 않겠다고. 날, 여기서 내보내 주겠다고.”

고통스럽게 일렁이던 그의 눈이 회피하듯 감기자, 욱한 페기가 그의 멱살을 쥐어 흔들었다.

“말하라고! 나를 사람으로 아낀다면 증명하란 말이야!”

그저 인형으로 어여삐 여긴 것이 아니라면 여기서 증명해야 했다. 뜻을 존중해 주고, 따라 주어야 했다. 더 이상 너의 행복을 위한다는 감언이설로 그녀의 뜻을 짓밟아서는 안 되었다.

그는 깎아지르는 벼랑에 걸친 바윗덩이처럼 간신히 버티어 섰다. 밀려 오는 현기증을 견디며 가느다란 숨을 내뱉고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안 되겠니?”

“…….”

“내 품 안이, 네겐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울까?”

페기는 말없이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강경한 태도에 그의 눈빛이 갈피를 잃고 애처롭게 흔들렸다. 턱 근육이 불거지도록 이를 사리물던 그가 미약하게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손은 한참이나 허공을 헤매었다. 그녀의 허리에 닿으려던 것이 머뭇거리며 거두어지고, 그녀의 얼굴을 감싸려던 손길은 용기를 잃고 허물어졌다. 결국에 그녀의 마른 어깨 부근에서 연거푸 주먹을 쥐던 손이 애꿎은 옷깃만 겨우 틀어쥐었다.

“그래. 네가 원하는 게 그런 것이라면….”

빛을 잃은 금안이 가물거리며 어렵사리 감겼다. 그러면서도 다시는 놓칠 수 없다는 듯 억센 팔로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너는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아. 나는 그 누구도 너를 해할 수 없는 영광된 자리로 인도할게.”

그는 필사적으로 그녀의 품을 파고들었다. 작은 품에 맞추어 자신의 커다란 몸뚱이를 접고 구겼다. 자꾸만 돋아나는 미련을 뿌리 뽑으며 고통에 찬 신음을 잇새로 삭였다.

비로소 그가 꺾여 들어왔다.

거친 세파에 또다시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 남자가 서글프게 자신을 죽이고 있었다.

페기는 눈물을 참기 위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나를 가두려는 것마저 나를 지키기 위함이었으나, 결국에 나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려는 그가 애달팠다. 나를 위해 나를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조차 감내하려는 그가….

가엾고 가여운 나의 사랑.

그녀는 애타는 심정을 참지 못하고 양팔 벌려 그를 껴안았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그의 버거운 몸집을 받아 내며 숨이 막히도록 그의 품에 안겼다. 그럼에도 안도하지 못하여 필사적으로 저를 당겨 오는 손길에 하릴없는 슬픔이 끓어올랐다.

죽지 않을게.

다시는 너만을 외롭게 남겨 두지 않을게.

페기는 그의 가슴팍에 젖은 눈을 파묻고 맹세했다. 나를 선택한 네가 오늘을 후회하지 않도록. 그리해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던 평온한 나날을 되찾을 수 있도록.

***

“갈 곳이 있어.”

손수 아침 식사를 대령하여 접시 절반을 비우는 꼴을 보고야 만 예후르가 뜬금없이 그런 말을 했다. 들어가지도 않는 음식을 꾸역꾸역 집어넣느라 속이 더부룩해진 페기는 그저 흰 눈으로 그를 흘기기만 했다. 그러자 예후르가 작게 웃으며 그녀의 짧은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날이 더우니 어두워지면 출발하자.”

어느덧 7월의 여름날이었다.

정원에선 분수가 높이 터지고, 정원사들은 푸른 녹음 위로 끊임없이 물줄기를 뿌렸다.

무더위에 지친 페기는 창가에 앉아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눈부신 물방울들을 멍하니 내다보았다. 타고나길 체온이 높은 예후르는 그녀의 미약한 신경질에 밀려 한낮에는 두어 걸음 밖에서 그녀의 주위만 빙빙 맴돌 뿐이었다.

뙤약볕을 뿌리던 태양은 어느덧 하늘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기울어 갔다. 아무 일 없이 평온한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둘은 아름다운 노을을 벗 삼아 후원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기력이 다 회복되지 않은 페기는 여전히 새 모이만큼만 먹어도 충분했지만, 근심 가득한 예후르를 위해 특별히 고기 두어 점을 더 먹었다. 하지만 나름의 노력을 예후르가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조금 서운해졌다.

“왜 그럴까. 예전엔 잘 먹었는데.”

후식으로 나온 복숭아를 끝내 페기가 거부하자, 예후르는 속상한 듯이 중얼거렸다. 시무룩해진 그를 보자 마음이 조금 약해졌지만, 정말로 더 먹었다간 속에서 치받쳐 올라올 것만 같았다.

“네가 먹으면 되잖아.”

“내가?”

“네가 잘 먹으면 보는 나까지 배불러질 테니까.”

당당한 궤변에 예후르는 흐음, 소리를 내며 잠시 고민에 잠겼다. 하녀에게 과도를 받아 직접 복숭아를 써는 모습을 보니 그럴듯한 말이라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페기는 붉게 노을이 지는 후원을 돌아보았다. 온실을 짓겠다며 쓸데없이 난리를 치던 흔적은 다행히 풍성한 녹음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선선한 저녁 바람이 몰려와 그녀의 귓가를 부드럽게 간질였다.

“페기.”

문득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페기는 갑자기 입 안으로 쑥 들어오는 손가락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후르가 눈매를 둥글게 휘며 웃고 있었다. 시원하고 물컹한 무언가가 혓바닥을 밀고 들어오더니, 그녀가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페기는 얼떨결에 입 안에 남은 것을 씹었다. 단맛이 터지며 입 안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복숭아였다.

이미 입 안에 들어온 것을 뱉을 수도 없어 페기는 원망스레 그를 흘겨보았다. 그저 흔흔하게 웃기만 하던 예후르가 그녀의 입에 복숭아 조각을 넣어 주었던 엄지와 검지를 쪽 빨았다. 페기는 문득 혓바닥을 적시는 과즙이 견딜 수 없이 달게만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안 하는데, 부끄러운 생각을 들킨 것만 같아 그의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페기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체하며 시선을 돌렸다. 귓가에 와 닿는 노을빛이 뜨거웠다. 여름은 여름이구나.

어두워지면 출발하자던 그의 말대로 땅거미가 내리기 무섭게 성문 앞으로 마차가 당도했다. 페기는 도톰한 외투를 걸치고 마차에 올랐다. 창밖이 온통 어둡기 때문일까. 아주 오래간만에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인데도 생각만큼 감흥이 일진 않았다.

짙은 남빛으로 물드는 여름 밤하늘을 물끄러미 내다보던 페기가 고개를 돌려 예후르를 보았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굳이 평범한 마차를 고른 것이나 호위 기사들을 따로 대동하지 않을 것을 보면 지금 향하는 목적지가 꽤나 비밀스러운 모양이었다. 페기는 오늘 하루 간간이 생각날 때마다 고민을 해 보았지만 딱히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예후르는 깍지 낀 양손을 무릎 위에 둔 채 얼마간 말이 없었다.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그 시작점을 고르는 기색이었다.

“전에 나한테 물은 적 있지? 왜 전쟁을 일으켰냐고.”

가만히 눈을 깜박이던 페기는 조금 뒤늦게야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아델라이데 피아제의 가면을 쓰고 그의 곁을 지켰던 먼 북방의 전쟁터에서였다.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데 이토록 기억에서 멀어졌던 것이 멋쩍어 페기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난 복수를 하고 싶었어.”

“복수?”

“너의 복수.”

페기는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입술은 여전히 유려한 선으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의 입술이 열렸다. 차분히 흘러나오는 말은 이해할 수도, 이해하기도 싫은 내용뿐이었다. 온종일 평온하게 풀려 있던 몸이 다시금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목이 멘 페기가 건조한 목을 긁으며 억지로 헛기침을 했다.

“아나클레토 추기경이 날 죽이려 들었다고.”

“응.”

“바도비체 후작은 그 소식을 빌헬미나 3세에게 전했고, 빌헬미나 3세가 그것을 허락… 왜? 대체 왜?”

페기의 얼굴이 온통 혼란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탐보프와 아무런 연이 없었다. 그저 내전에 틀어박혀 피아노만 연주하고 살던 어린 사도에게 탐보프가 악심을 먹을 이유도 달리 없었다.

막힘없이 이어지던 예후르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끊겼다. 그는 주저하며 대답을 망설였다. 그 모습에 페기는 더더욱 영문을 몰랐다.

“예후르. 탐보프에서 왜 날 죽이려 했던 거야?”

“…내 버릇을 들이려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페기의 말문이 막혔다. 눈썹을 매만지던 예후르가 건조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내가 아끼던 너를 죽여서 내 기를 꺾겠다고, 그런 의도로 널 죽인 거래.”

뚫어져라 그를 응시하던 페기가 불현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날카롭게 허공을 찢던 웃음소리마저 가시자, 덜컹거리며 마차 굴러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손끝으로 입술을 매만지고 목을 문지르며 부산을 떨던 페기가 갑자기 휙 고개를 돌려 예후르를 보았다.

“그게 고까워서 전쟁을 일으킨 거야?”

“…그런 것도 있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빌헬미나 3세 때문이었어. 난 너의 죽음에 관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원치 않는 파멸을 주고 싶었거든.”

이를테면 빌헬미나 3세에겐 평생을 바쳐 쌓아 올렸던 제국의 붕괴를, 바도비체 후작에겐 끔찍한 후환을 남기고 가는 죽음을.

“그리고 세도파 바도비체에겐 가장 비참한 형태의 파혼을 선사했지.”

“…세도파? 그 사람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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