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2화 (172/328)

예후르는 그런 페기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간헐적으로 흔들리는 눈빛을 읽고, 잡힌 손목에서 약동하는 맥박을 느꼈다. 그러자 한없이 검게만 보이던 감정도 점차 맑게 갠 하늘처럼 선명해졌다.

“거짓말.”

싫어, 싫어. 홀로 미친 듯이 중얼거리던 페기가 덜컥 입을 다물었다. 그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석상처럼 굳어선 한참을 미동 않던 페기가 불현듯이 말을 토해 냈다.

“네가 싫어.”

예후르는 기꺼이 눈을 감았다. 미소는 점차 짙어져만 갔다. 그는 그녀의 손목 안쪽에 입술을 맞대며 노래하듯 속삭였다.

“계속해.”

“네가 미워.”

손목에 맞붙은 그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웃는 진동이 느껴졌다. 페기는 이를 악물었다.

“네가 끔찍해.”

“…….”

“징그러워 미칠 것 같아.”

그의 입술이 차츰 손목 아래로 내려갔다. 팔 안쪽의 여린 살을 입술로 훑으며 음미했다. 페기는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당겨 물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끝을 모르고 맥박이 치솟으며 문득, 그대로 잡혀 있는 반대쪽 손목이 미친 듯이 신경 쓰였다.

“부디 계속해, 페기.”

팔이 접히는 부분 아래, 도톰한 살결에 입술을 묻은 그가 눈꼬리를 활짝 휘었다. 페기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한 신음을 황급히 삼켰다. 열 오른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빠 오는 숨을 짓누르고 흐려지는 시야를 다잡으며 사력을 다해 가라앉은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네가, 저주스러워.”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려 왔다. 얼어붙은 그녀를 집요하게 들여다보던 그가 얌전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응, 나도.”

가지런히 접힌 그의 눈가에도, 흰 살결에 파묻힌 그의 입가에도 부드러운 웃음기가 묻어났다. 바라던 대로 사랑 고백이라도 들은 것처럼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러자 페기는 돌연 진절머리 나도록 짙은 혐오감에 휩싸였다. 아직껏 그를 놓지 못하는 자신이 싫고, 그걸 제대로 감추지도 못하는 스스로가 역겨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끝까지 저를 틀어쥐고 놓아주지 않으려는 그가 혐오스러웠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이 갈릴 정도로 끔찍했다.

페기는 자유로워진 한 손으로 천천히 침대보를 짚었다. 하얀 침대보가 손가락 사이에서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여전히 제 다른 손목에 입술을 묻고 있는 그를 보며 어두운 욕망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저 잘난 얼굴을 손톱으로 죄 긁어 버리고 싶다. 모든 일이 그의 뜻대로 흘러가도록 놔두고 싶지 않다.

페기는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촛대를 쥐었다. 사납게 채 가는 손길에 아슬아슬하게 촛대에 꽂혀 있던 양초가 맥없이 떨어져 나갔다. 예후르는 그제야 눈을 떴다. 페기는 그와 눈을 마주하며 천천히 촛대의 끄트머리를 목에 갖다 댔다. 양초를 꽂는 날카로운 부분이 여린 살갗을 찔러 왔다.

“바깥이 위험해?”

페기가 어깨를 들썩이며 날카롭게 웃었다.

“여긴 안전한 줄 알아?”

기력이 다 떨어진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바람에 목 부근의 피부가 살짝 찢기며 핏방울이 맺혔지만 페기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 가고 있었다. 늘 잔잔하던 금안에 노여움이 몰아치며 살벌하게 기세를 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금방이라도 그녀를 씹어 삼킬 듯하던 흉흉한 기세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당장이라도 베어 버릴 듯한 눈으로 촛대를 응시하던 그가 흘끗 눈을 들어 페기를 보았다. 우수수 돋아났던 칼날이 다시금 수면 아래로 삼켜졌다. 그가 한숨처럼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위험하니 이리 줘, 페기.”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랐던 희열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페기는 얼어붙은 눈으로 변함없이 여유로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알았다. 그녀가 얼마나 죽음을 두려워하는지. 제 손으론 결코 죽음을 택하지 못하리란 것 역시, 너무나도 잘 알았다.

공허해진 속을 채우는 것은 다시금 분노였다. 페기는 잇새로 숨을 헐떡였다. 차게 식었던 몸이 재차 노여움으로 끓어올랐다. 저 여유를 끝장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텐데. 모든 것이 그의 생각대로 돌아가는 이 비참한 상황을 깨트릴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기꺼이 영혼이라도 팔아넘길 텐데.

식은땀이 배어나도록 촛대를 움켜쥐고 있던 페기가 별안간 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곤 말릴 새도 없이 자신의 허벅지를 힘껏 내리찍었다.

“윽!”

참을 수 없는 격통이 밀려들었다. 날카로운 촛대가 꽂힌 허벅지에서 핏물이 뿜어져 나와 흰 원피스를 붉게 적셨다. 페기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현기증을 견디며 가까스로 고개를 가누었다. 고통으로 뿌예진 시야에 경악으로 부릅뜨인 그의 눈이 들어왔다.

우습게도 그제야 막힌 가슴이 뚫린 것처럼 시원해졌다. 벌벌 떨며 차마 제게는 손도 못 대는 그의 모습에서 미칠 듯한 희열이 몰아닥쳤다. 그토록 막힘없이 떠들던 입으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저를 휘어잡던 힘으로 허둥지둥하는 꼴을 보자니 눈물겹도록 속이 후련했다.

페기는 이를 깨물며 흐느끼듯이 웃었다. 식은땀으로 미끄러지는 촛대를 재차 움켜쥐며 폭소했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는 격정이 끝을 모르고 질주했다. 푹 꺼졌던 기력이 머리 꼭대기까지 솟구쳐 이젠 고통조차 느껴지질 않았다.

너는 네가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지.

나 하나쯤은 네 맘대로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지.

허벅지에 꽂혀 있던 촛대를 뽑자, 선혈이 후드득 그녀의 뺨으로 튀었다. 핏물에 젖은 원피스 자락이 온통 붉었다. 보랏빛 눈이 다시금 번뜩였다. 페기가 재차 있는 힘껏 촛대를 내리꽂았다.

그 순간, 석상처럼 굳어 있던 예후르가 갑자기 달려들었다.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었다. 페기는 멍하니 눈앞의 광경을 응시했다. 촛대가 그의 손등에 박혀 있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광경을 넋 놓고 지켜보던 페기가 불현듯 발작하듯이 촛대에서 손을 뗐다.

예후르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촛대가 손등을 관통해 손바닥 아래로 뚫고 나가 있었다. 예리한 날을 타고 진득하게 흘러내리는 핏물을 보며 페기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얼굴에선 핏기가 싹 가셨으나, 도리어 예후르는 담담한 낯으로 손등에서 촛대를 뽑아냈다.

촛대가 바닥을 뒹구는 쇳소리가 요란했다. 그는 다친 손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핏물 젖은 원피스를 들쳐 상처 입은 그녀의 허벅지를 심각하게 들여다보았다. 페기가 허옇게 질린 입술을 달싹였다.

“예, 예후르….”

“중요한 혈관이 다쳤어. 빨리 치료하자.”

“어떡, 어떡해, 예후르.”

페기가 울먹이며 입가를 틀어막았다. 예후르는 신속하게 응급 처치를 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내가 다 치료해 줄게. 많이 아프진 않니? 일단은 누워서….”

“네, 네 손, 어떡해. 예후르, 네 손 어떡해.”

예후르가 멈칫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페기가 정처 없이 떨리는 눈으로 그의 다친 손을 응시하고 있었다. 주체할 수 없이 흔들리는 손끝이 가까스로 그의 다친 손등에 닿았다.

“내,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페기?”

보랏빛 눈이 초점을 잃고 마구 흔들렸다. 호흡이 가빠지고 손끝이 파르라니 질려 갔다.

예후르가 굳은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어떡해, 예후르, 어떡해. 미친 듯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페기가 돌연 종이 인형처럼 흐늘거리며 맥없이 고꾸라졌다. 그녀를 부르짖는 다급한 목소리가 인식 너머로 아득히 멀어져 갔다.

***

“…기력이 다하여….”

“…안정을 취하시면 아마도….”

낯선 이들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섞여 들었다. 시끄러워. 중얼거리며 뒤척이자, 익숙한 손길이 눈가를 덮으며 가만가만 달래 왔다.

페기는 다시금 혼몽한 무의식 속으로 까무룩 잠겨 들었다. 멀어진 감각 대신에 아주 오래전에 묻어 두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선 기억들을 골똘히 마주하던 그녀는 불현듯 돌아온 감각을 느끼며 눈을 깜박였다.

어슴푸레한 새벽녘이었다. 좁다란 커튼 틈새로 들이치는 서광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페기는 무거운 머리를 가누며 느릿하게 윗몸을 일으켰다. 잠결에 아주 이상한 기억을 떠올린 것 같은데 한순간에 증발해 버린 것처럼 까맣게 지워지고 없었다.

창가에 어른거리는 새벽빛에 한참이나 시선을 빼앗겨 있던 페기가 문득 성급한 손길로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 하얀 허벅지에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페기는 가느다란 흉터조차 없는 보드라운 살결을 손끝으로 가만히 훑었다. 꿈이라 치부하기엔 순간의 고통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문이 열렸다.

귀를 엘 듯한 적막을 깨트리며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페기는 문가를 돌아보았다. 침실로 들어오던 예후르가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그녀를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시선이 자연스레 내려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허벅지에 닿았다.

예후르는 곧장 고개를 돌렸다. 돌아서는 구둣발 소리가 그답지 않게 요란했다. 페기는 침대 아래로 내려가 뛸 듯이 걸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깍지 껴서 잡아 올렸다.

손등은 깨끗했다.

엄지로 그의 손등을 문지르고, 손바닥을 뒤집어 봐도 관통상은 보이지 않았다. 페기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안도하며 고개를 들자, 복잡한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예후르가 있었다.

페기가 양손으로 그의 커다란 손을 꽉 붙들었다.

“다신 그러지 마.”

한 글자, 한 글자 내뱉는 목소리가 경고하듯 낮게 울렸다. 페기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뚫어져라 그를 응시했다.

“날 감싸겠다고 끼어들지도 말고, 날 막겠다고 설치지도 마. 아니, 그냥 내 눈앞에서 다치질 마. 한 번만 더 그러면 용서 안 해.”

“…페기. 난 어제로 돌아간대도 똑같이 반복할 거야.”

그가 꽉 잡혀 있던 손을 뒤집어 페기의 두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페기는 이를 까득 깨물며 히스테리컬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정말 내가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어차피 난 다쳐도 금방 낫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럼 나는!”

페기가 악을 쓰며 치렁치렁한 치맛자락을 걷어올렸다.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하게 나은 허벅지를 보이려는데, 예후르가 그녀의 손목을 쥐며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페기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손끝에서 얇은 치맛자락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묻지 않을게.”

“…….”

“무슨 수로 죽어 가던 나를 되살리고, 내 상처를 낫게 했는지 묻지 않을게. 네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을게. 그러니 내 말 좀 들어.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이루어 주겠다며. 그런데 왜 내가 진정 원하는 건 들어주질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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