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1화 (171/328)

예후르는 말없이 시선만 보냈다. 순간 막시모는 솟구치는 울분을 어쩌지 못하고 목청을 높였다.

“맙소사! 가서 그분께 한번 여쭤보십시오! 그분이 바라시는 게 진정 그런 것인지! 밖으로 내보내 달라는 사람한테 바깥의 일부를 가져와 보여 주는 것이 진정 그 사람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자기만족의 사육입니다! 제발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시란 말입니다!”

막시모가 거친 숨을 씨근거렸다. 충동적으로 내지른 소리지만 이번만은 티끌만큼의 후회도 없었다. 안 그래도 위태위태한 카타리나 공작이 이 어처구니없는 계획을 알게 되는 날엔 진실로 이 성에 파란이 몰아닥칠지도 몰랐다.

사안의 심각성을 아는 것인지 예후르도 버릇없는 수하를 질책하는 대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막시모는 이번 한 번만 참아 본다는 일념으로 끈질기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사람을 사람답게…. 중얼거리던 예후르의 목소리가 점차 또렷해졌다.

“그래서 이러는 거잖아. 사람으로 지켜 주려고.”

그는 아리송한 말만 남기곤 홀연히 사라졌다. 어느새 혼자가 된 막시모는 방금 들었던 그의 말을 곱씹으며 당혹감을 잠재우려 애썼다. 하지만 당최 이해가 안 갔다.

“대관절 무슨 뜻이야….”

답답한 마음에 뒷머리를 마구 흩트린 막시모가 심란한 눈으로 예후르가 나간 복도를 돌아보았다.

제발 잘 풀렸으면 좋겠지만….

불길한 마음에 꿀꺽 삼켜 버린 뒷말은 그의 가슴속에만 남았다. 하지만 끝내 잇지 못한 그 말이 당장 그날부로 실현될 줄은 막시모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페기는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았다. 며칠 전부터 처음 보는 얼굴들이 후원을 뒤엎고 있었다. 아득하게 들려오는 말씨가 먼 남쪽 라발의 억양이었다. 영 이상하여 하녀를 붙잡고 물어보니, 어처구니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전하께서 아가씨를 위해 커다란 온실을 지으실 계획이라고 해요.”

하녀는 마치 그것이 자신의 업적이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성의 사용인들은 모두 페기를 성주께서 한눈에 반해 데려온 어느 시골 처녀인 줄만 아니 달리 이상한 태도도 아니었다.

굳이 그들의 착각을 정정해 줄 생각도 들지 않아 페기는 작게 코웃음 치며 고개를 돌렸다. 등 뒤의 하녀가 흰 눈으로 몰래 절 째려보는 것이 느껴졌다. 짐작건대 오늘 밤에도 그녀는 하녀들 틈바구니에서 배은망덕한 계집이라며 잘근잘근 씹히리라.

이 성에서 유일하게 보기 좋던 후원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꼴이 보기 싫어 페기는 커튼을 치고 침대에서 애벌레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다. 엄명을 받았는지 하녀가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연신 식사를 권했으나 돌아눕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식욕이 사라진 지 벌써 며칠째였다. 어제처럼 발길 닿는 대로 걷기라도 하면 물이라도 마시겠지만, 오늘은 아무런 의욕도 들지 않았다.

페기는 혼곤하게 눈을 깜박였다. 깜박인다고 생각했는데, 눈꺼풀이 눈 위를 지나갈 때마다 커튼을 비추는 볕의 각도가 달라졌다. 점차 사선으로 기울고 붉게 물들었다. 커튼이 붉은 노을에 진탕 빠져 방 안까지 불그스름해질 무렵에야 그녀는 깜빡 잠이 들었었구나, 하고 깨달았다.

페기는 저녁놀이 지는 방 안의 고즈넉한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느릿느릿 눈을 껌벅이고 있으려니, 따스한 손길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페기는 그 성가신 손을 당장이라도 치우고 싶었으나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그냥 내버려 두었다. 제대로 못 자고 못 먹은 지 오래되어 모든 일이 버겁고 귀찮기만 했다.

“페기.”

귀를 막지 못하여 대신 눈을 감았다. 이만하면 알아들었을 테니 오늘은 그만 물러가 주길 바랐다. 그녀의 인내심도 이젠 닳을 대로 닳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우리 더 남쪽으로 갈까?”

귓전에서 속삭이듯 가만가만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녀의 뒤에 나란히 누워 있는지, 등 뒤로 그의 따뜻한 숨결과 체온이 낱낱이 느껴졌다.

“겨울이 와도 춥지 않은 곳으로 가자. 너는 바다를 싫어하니 호수가 있는 곳이 낫겠어. 낮이면 물새가 날아들고 밤이면 달빛에 물비늘이 아름답게 일어날 테니, 너도 그곳을 좋아하게 될 거야.”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길이 내려와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여기로 돌아올 즈음엔 온실도 모두 완성되어 있겠지.”

옷깃이 흘러내려 드러난 어깨로 그의 입술이 포근하게 내려앉았다. 페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힘없이 버석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말 들으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어?”

“직접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그래. 지금껏 내가 알던 수사의 예후르가 실은 구제할 길 없는 반편이었다는 걸 깨닫겠지.”

페기가 약하게 몸부림을 쳤다. 등 뒤에 맞붙은 그의 몸이 잠시 멈칫하는 듯하더니, 이내 어린애처럼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럼 날 풀어 줘.”

“안 된다는 거 알잖아.”

허리에 휘감긴 그의 팔이 더욱 힘주어 그녀를 끌어당겼다. 페기는 어느새 표정이 사그라든 얼굴로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노을빛을 노려보았다.

“여기서 나가면 다신 네 얼굴 안 볼 거야.”

그의 몸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사지를 옥죄고 있던 팔뚝에도 핏줄이 바짝 설 만큼 힘이 들어갔다. 페기는 꿈틀거리며 돌아누웠다. 그늘진 그의 얼굴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왜. 내가 정말로 그럴까 봐 무서워?”

빈정거리는 말에도 그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조심스레 뺨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페기는 고집스레 눈빛을 꺾지 않았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가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바깥은 위험해. 여기 있어.”

“너도 위험해.”

“다신 안 그럴게.”

“예뻐해 주고 지켜만 주면 다인 줄 알지, 너는.”

페기는 새파랗게 독이 오른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연신 치밀어 올랐다. 온종일 성 안팎을 쏘다녀도 해소되지 않던 울분이, 계속해 켜켜이 쌓이고만 있던 억울함이 숨 막히도록 차오르고 있었다.

“난 너 보기 좋으라고 있는 예쁜 인형이 아니야.”

“알아.”

“알아? 네가?”

선득하게 반문한 페기가 있는 힘껏 그의 팔을 뿌리치곤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수채 물감처럼 사방으로 번지는 노을빛이 그녀의 눈가를 붉게 물들였다.

“네가 뭘 아는데. 도대체 뭘 알아서 나한테 이래. 아무것도 모르잖아. 관심도 없잖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무슨 마음인지.”

“내가 왜 관심이 없어.”

그녀를 따라 조용히 윗몸을 일으킨 예후르가 흐트러진 그녀의 옷매무새를 여미곤 경련하듯 부들부들 떠는 몸을 달래 주었다. 페기는 이유 없는 현기증에 시달리며 간신히 그를 노려보았다. 예후르의 커다란 손이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그녀의 찬 목덜미를 가만히 덮어 왔다.

“늘 너만 생각해. 오늘의 너는 무엇을 원할지, 내일의 너는 무엇을 바랄지. 바깥이 너무 위험하니 온실을 지으려는 거고, 그럼에도 네가 나가고 싶어 하니 살 곳을 옮기자는 거야. 풀어 달라는 네 바람은 이루어 주진 못하겠지만, 대신 네가 가장 갈망하는 것을 주면 되잖아.”

“내가 가장 원하는 건 여기서 벗어나는 거야.”

“아니지, 페기.”

그가 설핏 웃었다.

“나잖아.”

“…….”

“나를 원하잖아.”

페기는 순간 목이 졸리는 기분으로 곱게 휘어지는 그의 눈을 보았다. 그녀의 다섯 손가락 끝마다 경건하게 입술을 맞추는 그를 보았다. 머리칼이 쭈뼛 솟고, 발가락이 곱아드는 것만 같았다. 할딱할딱 솟구치던 숨조차 콱 틀어막힌 목구멍에서 신음 같은 속삭임만 간신히 새어 나왔다.

“나쁜 새끼….”

늘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만 보았다.

언제 돌아올까, 언제면 돌아올까. 그가 없는 시간을 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채우며 속절없이 기다리기만 했으나, 실은 그때도 알고 있었다.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않으리란 것을. 약혼녀가 있고, 언젠가 결혼을 할 그는 결코 내게로 돌아올 일이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차마 버릴 수 없는 마음을 끌어안고 서글피 울기만 했다. 헤아릴 수 없던 나의 많은 순간순간이 너를 생각하며 전전긍긍하던 시간이었다. 행여 이 마음이 발각되면 어떻게 될까. 너는 나를 혐오할까. 난감해할까. 그저 감정에 서투른 나의 착각일 것이라며 다독여 줄까.

너는 그중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 마음을 알면서도 관망했고, 괴로워하는 날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그땐 이유를 몰랐는데 이제는 알겠다. 나는 그저 편안한 안식처. 곁에 두고 보면 흐뭇한 인형. 적당히 내어 주는 애정만으로도 기꺼이 주위를 맴돌며 떠나지 않으니 얼마나 쉬웠을까. 그런 내가, 얼마나 미련해 보였을까.

눈물로 흐려지는 시야에 그의 얼굴마저 가물가물해졌다. 안아 달래려는 듯한 손길을 죄 뿌리치며 제 손으로 더듬더듬 눈가를 덮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잇새로 새어 나오려는 흐느낌을 씹어 삼켰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넌 정말 나쁜 새끼야. 알아?”

헐떡이며 토해 내는 말에 그의 얼굴이 점차 무표정하게 가라앉았다. 페기는 턱을 가늘게 떨며 원망스럽게 그를 노려보았다.

“이제 와 그렇게 말하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어? 옛날처럼 네 말이면 다 고분고분 따를 줄 알았니? 넌 내가 아직도 그렇게 우스워?”

“페기.”

“왜. 이젠 세도파가 필요 없어? 그럼 너한테 이득을 줄 다른 여자를 찾아야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난 이제 아니야. 널 원하지 않아, 난… 놔! 이거 놓으라고!”

저도 모르게 손톱을 세워 쇄골과 목 부근을 긁어 내리자, 그가 무섭도록 표정을 굳히며 손목을 붙들었다. 페기는 불에 델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안간힘을 다해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가 꿈쩍도 하지 않자 숨이 넘어갈 것처럼 발버둥을 쳤다.

“네가 뭔데 아직도 날 휘두르려 들어! 그런 말은 옛날에나 해 줬어야지! 왜 하필 지금인데, 왜! 난 이제 싫어! 제발 좀 놓으란 말이야!”

“싫다고?”

성마른 목소리가 치고 들어왔다. 악을 지르던 페기가 별안간 몸부림을 멈추었다. 구겨진 그의 얼굴에 완연한 불쾌감이 드러나 있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응시하던 페기가 실 떨어진 인형처럼 기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싫어.”

좋아.

“네가 싫어.”

네가 좋아.

“예후르, 네가 싫어.”

예후르, 네가 좋아.

페기는 넋을 놓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계속해 중얼거렸다. 나는 네가 싫어. 예후르, 죽을 만큼 네가 싫어.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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