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루어 줄게.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네 발치에 쌓아 주고,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워 버릴게. 그냥 무사히만 내 곁에 있어 줘. 내가 영원히 널 지켜 줄게.”
“내가 그런 걸 원하지 않는다면?”
페기가 여전히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예후르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그녀를 응시했다. 살며시 그녀의 손을 쥐고 느릿느릿 손등을 문지르는 동작에 은근한 집념이 묻어났다.
“나는 두 번 다시 널 잃고 싶지 않아.”
그가 시선을 맞추며 차분하게 속삭였다. 다시는 잃고 싶지 않다는 소망의 말에서 다시는 잃지 않겠다는 강한 결심이 느껴졌다. 다시 잃지 않기 위해 무엇이든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일념까지.
비로소 깨달은 페기가 잡힌 손을 비틀어 억지로 빼내었다.
너는 내 의지마저 거스를 각오가 되었구나.
“날 지켜 주겠다고.”
불현듯 속에서 웃음이 치고 올라왔다. 페기는 어깨를 떨며 흐느끼듯이 웃었다.
“그럼 너부터 사라져야지.”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마치 예상치 못한 일격을 당한 듯했다. 페기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우스워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세상에 희극도 이런 희극이 없었다.
“네가 쏜 화살에 맞았을 때, 나는 그때 이미 죽었어. 네가 무슨 수를 써서 날 살려 냈는지는 몰라도 난 그날에 한 번 더 죽었던 거야.”
“페기.”
“상처가 낫고 흉터가 사라진다고 그날의 일이 없었던 것으로 된다니? 그날을 지우고 싶었으면 내 기억부터 도려냈어야지.”
흥얼거리듯이 말을 잇던 페기가 문득 입술을 다물었다. 웃음기 가신 얼굴이 싸늘했다. 그녀는 검지를 들어 단호하게 문을 가리켰다.
“나가.”
예후르는 묵묵히 그녀를 응시했다. 페기가 돌연 사지를 휘두르며 악을 질렀다.
“꼴 보기 싫으니까 나가라고! 나가!”
그녀의 몸부림에 물그릇이 엎어지고 수건이 뒤집혔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예후르가 몸을 일으켰다. 불쑥 높아진 그의 키에 흠칫했던 페기는 순식간에 양 손목이 잡혀 제압되었다. 노여워 부들부들 떠는 그녀의 관자놀이에 예후르가 기어이 입술을 맞추었다.
“내일 다시 올게.”
그는 짧게 읊조리곤 침실을 떠났다. 얕게 헐떡이며 닫히는 문을 응시하던 페기가 갑자기 베개를 세게 집어 던졌다. 날아가 문짝에 부딪힌 베개가 터지며 하얀 깃털들이 무수하게 흩날렸다. 페기는 분을 참지 못하고 서럽게 소리 내어 울었다.
예전의 그는 저러지 않았다고. 그저 나에 대한 의심을 버리지 못해 그런 것이라고. 이유 없이 되살아난 내가 문제라고.
아니다. 아니야. 그는 원래부터 저런 사람이었다. 예전에는 그저 내 뜻과 그의 뜻이 일치했을 뿐, 그때도 내가 그의 뜻에 반하려 들었으면 저리 나왔을 것이다. 그의 틀에 맞추어 날 다듬고 날 억압하고 날 구속하고. 그마저 너에게 내리는 자신의 애정이노라 속삭였을 테지.
그에겐 내 뜻을 존중해 줄 의사가 조금도 없어.
나는 언제 어디서든 기대기 좋은 안식처였을 뿐이야.
서글픈 깨달음이 겹겹이 몰아닥쳤다. 어쩌면 그가 용을 아끼는 마음과 자신을 아끼는 마음이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자각에 숨이 넘어갈 만큼 고통스러웠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사랑과 그의 사랑은 처음부터 방향이 엇나가 있었다는 것. 그것이 그녀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했다.
아니야, 이젠 그럴 수 없어.
그녀는 정신없이 중얼거리며 눈물 젖은 뺨을 들어 올렸다. 초점 없는 눈이 닫힌 문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그럴 수 없어.”
이튿날부터 문도성의 경비는 한층 더 강화되었다. 페기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정원까지 나갈 수 있도록 허락되었으나, 그 대신 침실을 나갈 때마다 하녀들이 따라붙었다. 기사들이 교대하며 온종일 그녀의 침실 앞을 지켰고, 성안의 모두가 그녀의 동태를 유심하게 살폈다.
그러나 가장 큰 변화는 차라의 입성이 불허되었다는 것이다.
“뭐? 내가? 왜?”
여느 때처럼 정오를 앞두고 문도성에 도착한 차라는 당분간 페기를 만날 수 없다는 일방적인 통보에 몹시 당황했다.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별채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잠시 들렀다 가시지요.”
권유를 빙자한 강요를 무미건조하게 읊은 하녀가 별채 쪽으로 몸을 틀며 깊숙하게 허리를 숙였다. 차라는 머쓱하게 목을 긁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어제 끝끝내 나오지 않았던 페기가 떠올라 가슴 한구석이 선득해졌지만, 과민한 반응이겠거니 애써 넘겼다.
다행히 오늘의 예후르는 약에 취해 있지도, 못 박힌 듯 그림 앞에만 서 있지도 않았다. 그는 손수 냉차를 따라 주며 이것저것 근래의 안부를 물었다. 차라는 선선히 대답하며 마음속 은근하게 죄어 두었던 경계심을 홀랑 풀어 버렸다.
“그런데 페기는 어디 아파?”
“아니.”
“그럼 왜 못 보게 하는 거야?”
예후르는 가만히 웃기만 했다. 순진하게 눈만 껌벅이던 차라는 그제야 뒷덜미를 서늘케 하는 위험을 감지했다.
“차라. 아멘크라체스의 독약은 위험한 물건이야.”
“어, 어?”
“다시는 그런 것에 손대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라는 얼떨결에 고개만 주억거렸다. 예후르는 그 뒤로 의미 없는 몇 마디 더 이어 가더니 곧 막시모의 부름을 받고 떠났다. 멍하니 별채를 나서는 차라의 뒤로 고급 과자와 귀한 서적들이 담긴 선물 상자가 한 아름씩 하인들의 품에 안겨 있었다.
당연히 그 소식은 페기에게도 전해졌다. 다만 차라의 입성이 불허되었다는 것이 감기에 심하게 걸려 당분간 찾아올 수 없다는 내용으로 각색되어 있었다. 결론적으로 차라와 만날 수 없다는 통보에 페기는 숨겨진 내막을 짐작한다는 듯 선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그날부터 페기는 칼집을 가르고 나온 갓 벼린 칼처럼 예민해졌다. 하루는 온종일 침대에 처박혀 지내고, 다른 하루는 강박적으로 성 안팎을 배회하며 보냈다. 시퍼렇게 날 선 신경이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치는지 매 끼니마다 절반도 넘기질 못했으며, 시시때때로 현기증이 일어 자리에 눕곤 했다.
예후르는 그 모두를 성심으로 돌보았다. 신열이 끓을 때면 밤새 그녀의 곁을 지키며 물수건을 갈아 주었고, 먹은 것을 죄 게워 낼 때는 제 손으로 토사물을 받아 내며 그녀를 달래 손수 약을 먹였다. 막시모가 누누이 본인의 건강도 생각하시라며 말렸으나 듣질 않았다. 그야말로 지극정성이었다.
하지만 페기만은 그런 예후르를 싸늘하게 외면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오는 그를 유령처럼 무시하고, 다정하게 다가오는 그의 손길을 진저리 치며 거부했다. 성안의 하녀들은 아가씨께서 참으로 무심하시다며 수군거렸다. 내막을 아는 막시모만이 한숨을 푹푹 내쉴 뿐이었다.
“전하. 저는 저러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자진이라도 하실까, 그것이 두렵습니다. 제발 그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주십시오.”
참다못한 막시모가 그리 간청할 때면 예후르는 해독할 수 없는 문자를 보듯 빤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 애의 마음을 지키는 것보다 그 애의 목숨을 지키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일 텐데.”
“바깥으로 나간다고 꼭 위험해지신다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가능성은 충분해.”
“저렇게 계속 가둬 두시면 저분의 마음은 십중팔구 죽습니다. 이건 가능성 따위의 문제가 아니에요.”
단언하는 말에 예후르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막시모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확실히 예전과 달라졌다. 어쩌면 이 단순한 감정의 생리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그럼 이곳에서도 페기의 마음이 죽지 않을 방법을 모색해야겠군.”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저 사람이.
막시모는 10년 묵은 피로를 삼킨 사람처럼 고단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저 사람은 갈 길이 멀었다.
“방법이 있겠습니까.”
“포기하면 없겠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생길 거야.”
“그런 희망찬 말은 부디 자제해 주십시오.”
“왜?”
“정말 안 어울리십니다.”
막시모가 팔뚝에 돋은 소름을 쓸어내리며 황망히 중얼거렸다. 예후르는 가만히 턱을 괴었다. 진지하게 그녀의 마음을 달랠 방법을 궁리하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말해 봤자 들어 먹지도 않을 거, 저 잘난 사람이 오랜만에 헛발질하는 광경이나 구경하자 생각하던 막시모는 머리를 긁적이며 힐끗 그를 돌아보았다. 우습게도 누이동생에 한하여 참으로 미련해지는 주군이 못내 신경 쓰였다.
“그러다 미움받으실지도 모릅니다.”
예후르가 턱을 괸 채 피식 웃었다.
“페기는 날 미워하는 만큼 날 좋아해 줄 거야.”
말을 말자. 막시모는 이번에야말로 그에게서 완전히 돌아섰다. 저 콧대 높은 자신감이 허물어지는 꼴을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그의 예상대로 예후르는 족족 헛발질만 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꽃을, 하루는 보석을, 하루는 그림을. 아주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줄 작정인지, 라발이며 탐보프며 사방 각지에서 생산되는 사치품들을 족족 문도성의 3층 침실로 모아 넣었다.
당연히 페기의 반응이 좋을 턱이 없었다.
“버려.”
페기는 방 안 가득 쌓인 꽃과 보석을 더러운 쓰레기라도 되는 양 취급했다. 그는 그저 미소 한 자락을 바랐을 뿐인데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눈총뿐이었다. 예후르는 그제야 돈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튿날부턴 라발의 기술자들을 불러다 후원에 거대한 온실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이번엔 또 무슨 새로운 돈지랄인가 싶어 지켜보니, 하는 말이 아주 가관이었다.
“총 다섯 개를 지을 거야.”
그 말인즉, 라발과 탐보프와 세잔과 리누스 도시 연맹과 바스토뉴의 식생을 하나씩 온실에 옮기겠다는 것이었다.
“전하. 제가 진지하게 한마디 여쭙겠습니다. 실례지만 미치셨습니까?”
막시모는 골 아픈 머리를 부여잡으며 도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는지 막막하게 고뇌했다.
“일단은 그 온실이란 것부터가 말이 안 됩니다. 말씀하신 그런 대형 온실은 아직 기술적으로 불가능해요. 게다가 탐보프나 바스토뉴는 여기보다 추운 지대인데, 그곳의 식생을 어떻게 여기 온실에다 옮겨 담습니까?”
“그러니 그 둘은 겨울에만 심어야지.”
“오, 젠장.”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것도 문제가 안 돼. 내가 연구를 지원해 주기로 했으니까. 몇 년 내로 연구를 끝마치고 착공할 계획이니 알아 두도록.”
“설마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 보여 드리려고 이러시는 건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