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9화 (169/328)

일은 계획대로 잘 풀렸다. 방심한 그에게 바늘을 찔러 넣었고, 그는 맥없이 쓰러졌다. 이대로 성만 빠져나가면 끝이었다. 가장 중요한 능선을 넘었는데 격하게 두방망이질하는 심장 박동은 잦아들 생각을 안 했다.

도대체 왜 그런 거야.

그녀는 숨이 찰 정도로 빠르게 걸으며, 어찌할 줄 몰라 손등으로 입술만 꾹 짓눌렀다. 난 그저 너에게 틈을 내기 위해 의표를 찔렀을 뿐인데, 너는 왜 그랬어. 왜.

달아오른 얼굴이 좀체 가라앉질 않았다. 심장 박동은 갈수록 진동을 더해 가고, 온몸을 달구는 열기를 주체할 수 없었다. 페기는 숫제 정신을 잃고 쓰러진 그를 원망하고 싶어졌다. 깊숙한 속에서 뜨거운 용암이라도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복도를 걷는 동안 여러 명의 하녀들을 마주쳤다. 몇몇은 무섭도록 굳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설설 피했으며, 몇몇은 용기 내어 침실로 돌아가시란 말을 건넸다. 페기는 성주의 허락을 받았다며 횡설수설했다. 좀처럼 의심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에겐 네 직접 성주께 가 여쭈라며 쏘아붙이기까지 했다.

기실 그녀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빨리 걷고 있다곤 하나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을 연신 헐떡였고, 손발이 떨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로웠다.

머릿속은 곤죽이 된 것처럼 뒤죽박죽이었다.

드디어 풀려났단 생각에 짜릿하다가도, 두고 온 그가 걱정되어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어졌다. 부어오른 입술을 연신 문지르며 촉각을 도려내고 싶다가도, 몸에 선명하게 각인된 기억이 알 수 없는 야릇한 열기를 지폈다. 기쁜지 슬픈지조차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아니야, 이럴 때가 아니야.

그녀는 강박적으로 중얼거리며 어떻게든 이성을 되찾으려 애썼다. 일단은 성을 탈출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고민이라면 그의 수중에서 벗어난 뒤 차분히 해 봐도 늦지 않았다.

페기는 정신없이 복도를 내달렸다. 예민한 귓가에 요란한 제 발소리와 펄떡거리는 심장 고동 소리만이 가득했다. 긴장감으로 꽉 조여든 시야에는 오로지 성문밖에 보이지 않았다. 곧이다. 곧 여길 나갈 수 있다.

단걸음에 도착한 페기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문고리를 잡았다. 잇새로 새어 나오는 숨결이 조금씩 떨려 왔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힘주어 문을 당겼다. 벌어지는 문틈으로 마차를 세워 두고 초조하게 그녀를 기다리는 차라의 모습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차라, 하고 반가운 이름을 부르려던 순간이었다.

핏줄 돋아난 강인한 팔이 부지불식간에 등 뒤에서 뻗쳐 와 문을 쾅 닫았다. 페기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헐떡이는 사내의 습한 숨결이 목덜미로 급하게 쏟아져 내렸다. 등 뒤에서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단단한 가슴팍이 여실히 느껴졌다.

문을 짚은 그의 손이 끼긱, 문의 표면을 긁으며 오므라들었다. 그가 제 쪽으로 천천히 상체를 기울이는 것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어디 한 군데 그와 맞닿은 곳이 없건만, 그에게 온몸을 내어 준 것만 같은 수치심이 붉게 차올랐다.

그는 아주 지척이었다. 은밀한 시선이 드러난 살갗을 집요하게 훑고 있었다. 목덜미를 물린 사슴처럼, 그녀는 문과 그의 견고한 몸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도 못 했다.

팽팽한 긴장감 속, 문득 그가 고개를 숙여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붙여 왔다. 홧홧한 땀방울이 흐르는 목울대를 타고 소름 끼치도록 억눌린 목소리가 기어올랐다.

“도망치려거든, 내 숨통을 끊을 각오로 임했어야지.”

문을 짚고 있던 손이 사납게 그녀의 손목을 챘다. 반항할 틈도 없이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 든 예후르가 뚜벅뚜벅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는 순간 화들짝 놀라 그의 목을 휘감았던 페기는 본능적으로 발버둥 치려다 그만 비정상적으로 높은 그의 체온을 느끼고 멈칫했다. 허망한 눈이 그의 어깨 너머로 멀어지는 문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손아귀 아래서 그의 비단옷이 흉흉하게 구겨졌다.

예후르는 침실에 들어가서야 페기를 품에서 내려 주었다. 기다렸다는 듯 침대로 뛰어 들어간 페기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엎드려 목 끝까지 치미는 노여움과 자괴감을 씹어 삼켰다. 할 수만 있다면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별다른 언질 없이 침실을 나갔던 예후르는 오래지 않아 물그릇을 들고 돌아왔다. 그는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곤 이불을 걷어 페기를 일으켜 세웠다. 페기는 안간힘을 다해 몸부림을 쳤지만 그래 봤자 그의 팔뚝에 얕은 생채기 몇 줄만 남겼을 뿐이다.

짧은 실랑이 끝에 힘이 쭉 빠진 페기는 그의 손길에 따라 기운 없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녀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은 예후르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을 물에 담갔다. 페기는 그제야 자신이 맨발로 뛰어다녔다는 것을 깨달았다.

발목 근처에서 찰랑이는 물은 적당히 미지근했다. 페기는 신중하게 제 발을 감싸는 예후르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까는 불에 델 것처럼 뜨거웠던 그의 체온도 이제는 어느 정도 잦아들어 있었다. 우습게도 약효는 고작 반 시간도 가질 못했다.

문득 하루가 넘도록 고민하고 긴장했던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고래도 죽일 만한 독약이라기에 일부러 가장 작은 바늘을 골라 약을 묻히고, 또 너무 많이 묻힌 것 같아 지우고 다시 묻히길 수도 없이 반복했었다. 어차피 이리 맥없이 잡혀 들어올 것을, 그땐 왜 그리도 걱정하고 속을 태웠나.

모두가 입을 다문 사위는 고요했다. 가장 한가로운 시기에 접어든 문도성은 여름철 불볕과 아지랑이에 휩싸여 눈부신 한때를 맞이하고 있었다. 정오의 햇살과 반사광이 뒤섞인 찬란한 빛은 커튼이 반쯤 쳐진 3층 침실로도 조금씩 새어 들었다.

발을 그에게 맡긴 채 힘없이 고개를 늘어트렸던 페기는 문득 그에게로 들이치는 빛을 보았다. 까마귀처럼 검은 머리칼이 탐욕스럽게 빛을 집어삼키고, 햇살이 드리워진 콧대는 우뚝하니 윤을 냈다. 그늘진 눈가에서 그의 눈은 짙은 호박색으로 가라앉았으나, 이렇듯 빛이 닿는 곳에선 샛노랗게 물들었다.

완벽한 황금 비율을 자랑하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이었지만, 그 어디에도 인간적인 감정은 엿보이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지켜 주고 감싸 주던 시절에는 그럼에도 그의 무한한 애정을 의심치 않았으나,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페기는 알아야만 했다.

“날 어떻게 할 거야?”

조용한 물음이 적막 속으로 잦아들었다. 예후르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발을 씻기고 있었다. 멍하니 그 손길을 응시하던 페기가 재차 입술을 달싹였다.

“아직도 마음을 정할 시간이 필요해?”

그녀는 지쳐 있었다. 무덤에서 기어 올라오자마자 반년 넘게 이어진 강행군에 육체는 기력을 잃었고,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태도에 끈질긴 정신력마저 바닥난 상태였다.

그러니 이제 그만 결정을 내려 주었으면. 그래야 저도 안심하든, 미친 듯이 반항하든 할 수가 있지 않겠나. 모호한 그의 태도에 더 이상 질질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다.

발 구석구석을 문지르던 그의 손길이 서서히 멎었다. 그대로 굳어 버렸나 싶더니, 발꿈치 위로 이어지는 힘줄 부근에서 그의 손끝이 경련하듯 조금씩 오므라들었다. 어느샌가 그는 정수리의 가마가 보이도록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떨긴커녕 머리칼 한 올조차 가지런한데, 페기는 왜인지 그가 울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길이 너무 많이 보여.”

오랜 침묵을 뒤로하며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내게는 오직 외길뿐이었는데 이제는 수많은 갈림길이 눈앞에 나타나. 널 죽이고 목을 매달고 싶다가도 그냥 널 껴안고 살고 싶기도 해. 무엇이 옳은 길인지는 알아. 더는 태연하게 그 길을 걸을 수 없을 뿐이야.”

발을 감싸쥔 그의 손이 조금씩 떨려 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결정을 내려야 후회하지 않을까… 밤잠을 설치며 고민해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으니 결국은 고장 나 버린 내게로 화살이 향하지. 하지만 과거로 돌아간들 나는 똑같은 선택을 반복하리라는 것을 알아. 아는데도…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

나지막한 목소리가 깊은 노여움으로 끓어올랐다. 고통을 껴안고 웅크린 그의 몸이 마치 달려들기 직전의 맹수처럼 보였다.

“나는 한 번도 이런 것을 바란 적이 없어. 나는 그저 안주하기만을 바랐어. 그걸 망친 게 나야. 내가 모든 것을 망쳐 버렸어. 이제 모든 것이 불분명해, 이만 포기하고 싶어. 나도 한 번쯤은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그렇게 살고 싶어.”

잇새로 힘겹게 속삭이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결국은 너야.”

서글픔이 깊숙하게 스며든 얼굴에 실낱같은 안도가 떠올랐다. 그는 경건하게 그녀의 발을 들어 보드라운 수건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곤 발등에 맺힌 물기를 닦아 주기 시작했다.

“너만 보면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번뇌가 사라지고, 네 앞에만 서면 갈림길이 외길로 변해. 모르겠어. 나의 길은 모두 너를 향하나 봐. 수없이 갈라져서 나를 괴롭게 하던 그 모든 갈림길이, 결국은 네게로 통하는 거야.”

담담히 읊조리는 목소리엔 오랜 번민의 흔적이 녹아 있었다. 끝없이 방황하다 힘겹게 목적지에 달한 방랑자의 애환이 담겨 있었다. 속을 저미는 고통 끝에 간신히 손에 넣었을 고요한 평화로움이 못내 그녀를 눈물짓게 만들었다.

“너는 그것으로 만족해?”

페기가 흔들리는 목소리를 겨우 다잡곤 물었다. 예후르는 희미한 미소를 띠며 수건을 내려놓았다.

“이젠 아무래도 좋아.”

“…….”

“페기. 널 믿고 싶어.”

그가 숭배하듯 그녀의 발등에 입술을 맞추었다. 페기는 낮게 엎드린 그의 등을 보며 온몸으로 전율했다. 폭죽처럼 화려하게 터지는 희열 속에 기쁨의 눈물이 차올랐다. 끝없이 엇나가고 외면당하던 마음이 비로소 보답받은 것만 같아 감격을 가눌 길이 없었다.

페기는 지그시 당겨 물었던 입술을 놓았다. 오래도록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말이 역류하듯 끓어올랐다.

“예후르, 나도 너를….”

“그러니 여기 있어.”

변함없이 다정한 목소리가 불쑥 말을 끊으며 들어왔다. 페기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바깥의 사람들은 살아 돌아온 너를 어떻게 대할까, 많이 생각해 봤어. 널 숭배하고 따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널 지탄하고 다시 해하려 드는 이들도 있겠지. 바깥은 너무 위험해. 너도 겪었으니 잘 알잖아.”

그야 지난 반년, 전쟁터를 전전하며 뼈저리게 깨달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논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페기는 아연한 기분을 삼키며 간신히 되물었다.

“위험하니 이곳에… 있으라고? 언제까지?”

“영원히.”

예후르는 눈꼬리가 접히도록 환하게 웃었다. 페기는 망연자실하게 영원,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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