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시도 때도 없었다. 눈뜨자마자 침실을 박차고 나가 하녀들과 옥신각신 언쟁을 벌였고, 심지어는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는 시늉까지 했다. 하도 시달린 막시모가 보란 듯이 창문에 창살을 박아 버리자 페기는 한층 더 교묘해진 수로 맞섰다. 솔직히 말해 그녀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차라가 보기에 더 이상한 것은 예후르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성이 뒤집혀 난리가 나는데도 그는 여전히 별채에서 칩거를 풀지 않았다. 누가 봐도 페기가 저 지경이 된 건 본인 때문인데, 성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꼭 딴 나라 얘기인 것처럼 관망만 했다. 얼핏 보면 페기 혼자 요란이고, 그는 유유자적 무관심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페기를 뜻대로 놓아주면 될 것을, 해괴하게도 그마저 아니었다. 그는 제발 아가씨를 만나 직접 해결을 보라는 막시모의 하소연에도 성의 방비를 더욱 튼튼히 하라 이를 뿐이었다. 한 사람은 무작정 피하고, 다른 한 사람은 악에 받쳐 날뛰니 애꿎은 아랫사람들만 고생이었다.
차라는 제발 아가씨 좀 말려 달라는 막시모의 부탁에, 정도껏 자제하라는 말을 페기에게 하자 결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가는 페기의 모습에 간담이 서늘해져 입도 벙긋 못하고 나왔다. 그녀는 심각하게 불안정해 보였다. 진심으로 예후르가 언제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끔찍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차라는 그 길로 예후르가 있는 별채를 찾아들었다. 적어도 예후르라면 말이 통하리라 생각했지만, 그마저 낙관적인 오해에 불과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그의 방에선 온갖 이름 모를 약초들이 태워지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매캐한 연기에 코를 부여잡았던 차라는 방 안으로 몇 발짝 들기 무섭게 정신이 아찔해졌다. 황급히 부축해 주던 막시모가 아니었다면 볼품없이 넘어졌으리라.
“…생각 중이야.”
그리 속삭이는 예후르는 잿빛 연기로 아스라하게 뒤덮인 방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앉아 있었다. 차라는 아연한 눈으로 막시모를 돌아보았다. 저러고 계신 지 벌써 수일째라며 막시모가 맥없이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생각을 꼭 이렇게 해야 돼?”
“너무 오래된 기억은 들추기도 쉽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해야지.”
“무슨 기억을 찾는데?”
그는 말없이 눈을 내리감았다. 끈질기게 대답을 기다리던 차라는 더 있다간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아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나중에 듣자 하니 수면초와 각성초를 함께 태우는 미친 짓을 벌이고 있다 하였다.
차라는 이제 막시모가 그렇듯 맥이 다 빠져 버렸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불안감에 질려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페기를 어르고 달래는 것뿐이었다. 페기는 그 초조한 마음을 이해라도 할 수 있어 다행이지, 예후르는 당최 그 속을 알 수가 없으니 쉽사리 건드릴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차라는 도주하던 페기를 예후르가 발견하여 직접 침실로 끌고 들어갔다는 급보를 듣고 문도성으로 달려왔다. 결국 일이 터지고야 말았구나. 차라는 겉으로 한탄했지만 내심으론 페기가 예후르의 머리를 한 움큼 뽑아 버렸길 바랐다. 그래야 속이라도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예상외로 페기는 멀쩡해 보였다. 어디 한 군데 다친 구석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손톱 밑에 누군가를 할퀸 흔적도 없었다. 심지어는 불안하게 손끝을 떨던 평소와 달리 차분한 기색마저 엿보였다.
그래. 결국 둘이 만나면 해결될 일이었지.
은근하게 싹을 틔우던 희망은 페기의 입술이 열리기 무섭게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예후르를 먼저 처리해야겠어.”
차라는 이만 이 싸움에서 빠지고 싶어졌다.
***
차라는 해끄무레한 낯으로 마차의 창문을 힐끔거렸다. 마부에게 굼벵이 같은 속도로 가 달라 그리 신신당부했건만, 벌써 문도성에 다다라 있었다.
“도련님.”
기다렸다는 듯 막시모가 나와 그를 맞이했다. 며칠 새 못 알아보게 핼쑥해진 얼굴에 반가워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차라는 차마 그를 볼 면목이 없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페기는 좀 어때요?”
“뭐… 평소랑 같으시죠.”
허허 웃는 막시모의 안색이 말이 아니었다. 차라는 쓰게 웃어 보이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그를 따라 성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날갯짓하며 노는 용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페기는 오늘도 넋 놓고 앉아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즐거운 시간 되시라는 한숨 섞인 말과 함께 막시모가 문을 닫자, 방 안에는 잠시 고즈넉한 정적만이 맴돌았다.
괜스레 손끝을 비비며 딴청을 부리던 차라는 슬쩍 고개를 들다가 그만 흠칫했다. 페기가 어느새 초점이 또렷해진 눈으로 그를 직시하고 있었다.
“가져왔어?”
차라는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따라붙는 눈빛이 못 견디게 따가워 사실을 실토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 가져오긴 했는데….”
페기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제야 덜컥 겁이 난 차라가 다다다 말을 이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순 없어? 예후르를 먼저 처리해야 한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논리야. 만나서 제대로 속을 터놓고 대화를 해 보면….”
“만났잖아. 대화는커녕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못 들었고.”
페기는 담담하게 읊조렸다. 그 점에 대해선 차라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페기가 찬웃음을 머금었다.
“아직 나에 대한 판단이 서지 않은 거겠지. 나도 내가 왜 되살아났는지 이유를 모르겠는데 예후르라고 뾰족한 답이 나오겠어? 오래 걸릴지도 몰라.”
“그렇다고 이렇게 작정하고 도망칠 것까지야….”
“그래야 나한테 말이라도 걸겠지!”
차라가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치맛자락을 꽉 부여잡은 페기의 양손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낮게 수그린 고개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해? 언제까지 유령처럼 성안만 배회하고, 예후르한테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해야 하냐고. 예후르의 의심이 풀릴 때까지? 그게 도대체 언젠데. 그게 언제야, 차라.”
그녀는 필사적으로 묻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답을 찾고, 그러다 찾지 못하여 필사적으로 달아날 궁리를 하고 있었다. 페기가 한 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흐느끼듯이 속삭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방도밖에 없어.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면 예후르가 날 인정해 준다니? 아니잖아. 만약 생각이 바뀌어 날 죽이려 들면 어떡해. 적어도 예후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어야 내가 살아날 길이라도 열릴 거 아니야.”
지금이야 지지부진한 답보 상태지만 언젠가는 예후르도 결론을 내리리라. 모두의 눈에 카니나의 페기로 보이는 저 존재는 과연 그들이 아는 그녀가 맞는가. 아니라면 망자의 탈을 뒤집어쓴 저것은 과연 무엇인가.
긍정의 대답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결말이지만, 부정의 대답이라면 페기는 또다시 먼 길을 달아나야 했다. 달아나기라도 하면 다행이지, 이렇게 그의 손아귀에 잡혀 있다간 그마저 불가능할 것이었다.
차라도 그 마음을 모르진 않았다. 어찌 되었건 예후르는 이미 페기를 죽이려 했던 전적이 있었고, 한 차례 죽음을 겪었던 페기가 그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도저히 내키지 않는 페기의 부탁을 수락한 것도 그 참담함에 가슴이 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차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아멘크라체스의 독약에 이것저것 조합한 약이야. 이만한 양이면 커다란 고래도 죽일 수 있다고….”
“뭐?!”
약병을 건네받던 페기가 깜짝 놀라 병을 떨어트릴 뻔했다. 식겁하여 약병을 재차 움켜쥔 차라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흘겨보았다.
“네가 웬만한 약으론 기절도 못 시킬 거랬잖아!”
“그렇긴 하지만….”
페기가 심란한 얼굴로 조심스레 약병을 받았다. 작은 병 안에서 무색의 액체가 찰랑였다. 고작 이만한 양으로 고래도 죽일 수 있다 하니, 절로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페기의 얼굴에서 설핏 갈등하는 기색이 엿보이자, 차라가 다독이듯 말을 이었다.
“나도 영 불안했는데 요슈아… 내 친구가 자진해서 나서길래 딱 한 번 써 봤거든. 바늘에 묻혀서 아주 소량만 사용하니 죽진 않고 하루 이틀 잠들어 있더라. 딱히 부작용이나 뒤끝도 없어.”
“…….”
“그래도 안심이 안 되면 역시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편이….”
“할게.”
살그머니 약병을 가로채려던 차라의 손길을 뿌리치며 페기가 약병을 꽉 쥐었다. 차라가 조금 질린 얼굴로 되물었다.
“진짜 한다고?”
“예후르가 이 성 전체를 주무르고 있어. 예후르가 멀쩡히 깨어 있으면 난 영영 도망칠 수 없을 거야.”
간밤에 그가 찾아왔었다.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던 페기는 영원을 견뎌 나가는 기분으로 그를 마주했다. 차라리 윽박이라도 질러 주었으면. 하지만 그는 한참이나 뜻 모를 눈으로 저를 응시하더니, 영 자신 없는 투로 이리 물을 뿐이었다.
“예리엘?”
그러곤 고개를 흔들며 도망치듯 나가 버렸다.
페기는 꼭두새벽에 갑자기 절 찾아온 그의 변덕도, 난데없이 천사의 이름을 읊은 그의 의도도 알 수 없었다. 그가 쉽사리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으리란 것을 재차 확인받았을 뿐이다.
하지만 페기는 더 이상 그의 인정만을 바라며 무작정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사람이었다. 살고픈 욕망이 있고, 뜻대로 하고픈 욕심이 있었다. 그가 자신을 어찌 여기든, 자신이 성안에 갇혀 하염없이 그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가여운 짐승이 아님을 그도 이제는 알아야 했다.
“…그러니 이렇게라도 해야, 내 진심을 알아듣겠지.”
결심을 굳힌 그녀의 눈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차라로서도 다른 도리가 없었다.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겠노라 한숨처럼 중얼거리자, 페기는 막시모가 소일거리라도 하라 챙겨 준 수틀에서 바늘을 빼내며 차분히 대꾸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
예후르는 창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방 안에 묵혀 있었던 매캐한 연기가 빠져나가고, 바깥의 신선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눈 깜짝할 새 당도한 여름은 창밖의 녹음을 풍성하게 부풀리고, 건조한 볕내를 자욱이 퍼트렸으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계절을 스쳐 보낸 그에겐 달리 특별하게 다가오지 못했다.
예후르는 창가에서 등을 돌려 구석에 세워 둔 캔버스로 다가갔다. 하얀 도화지에는 침대에 앉아 있는 여자의 상반신만 간략하게 담겨 있었다. 그에게도 익히 낯익은 모습이다.
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