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5화 (165/328)

3부. 하나의 불, 만 개의 불

창마다 두꺼운 커튼이 쳐진 침실은 어두침침했다. 양초 대신 약초를 태우는 쓴 냄새가 떠돌고, 무덤 같은 적막이 방 안을 무겁게 짓눌렀다.

태생적으로 말 못 하는 벙어리 하녀들은 명 받은 대로 창문의 걸쇠나 커튼의 매듭 따위를 확인하고 있었다. 손길은 거침없되, 발길은 조심스러웠다. 행여라도 큰 소리를 내어 저 얇은 천개 너머 잠들어 계실 아리따운 아가씨께서 깨어나시기라도 하는 날엔, 또다시 폭풍이 몰아닥칠 것이었다.

점검을 마친 하녀들이 긴장에 찬 숨을 내쉬며 하나둘 침실을 빠져나갔다. 문 닫히는 쇳소리 뒤로 침실은 변함없이 고요했다. 길게 늘어진 커튼도, 천개에 어른어른 비치는 잠든 인영도 미동 없다. 베갯잇에 흩뿌려진 은빛 머리칼 역시 고요하게 숨죽이고 있었다.

보랏빛 눈이 스르르 뜨였다.

깍지 낀 양손을 가슴팍에 가지런히 올려 둔 채로 눈만 굴려 천장을 샅샅이 훑었다. 활짝 트인 귀는 문밖을 오가는 발소리를 경청하고, 예민하게 날 세운 감각이 사방 주위로 뻗쳤다. 페기는 소리 없이 일어나 앉았다. 아무도 없는 침실을 휘 둘러본 눈이 곧장 문가로 꽂혔다.

보드라운 러그 위로 흰 발이 내려앉았다. 성큼성큼 걷던 그녀는 맨바닥에 이르러선 한 발, 한 발 유의하며 내디뎠다. 소리 없이 방을 가로지른 페기가 살며시 문고리를 잡았다. 문밖에서 요란하게 울리던 하녀들의 구둣발 소리마저 가시자, 고민의 여지 없이 방문을 밀어젖혔다.

약초 태우는 쓴 냄새와 침침한 어둠이 순식간에 물러났다.

복도 대리석 바닥에서 반사되는 빛에 눈앞이 하얗게 물들자, 페기는 비틀거리며 문틀을 살짝 잡았다. 꾹 감겼다가 파들거리며 뜨이는 눈에 맑은 햇살이 들이치는 복도의 깨끗한 광경이 비쳤다. 페기는 기꺼이 빛 속으로 들어갔다.

점심과 저녁 사이, 어중간한 시간대에 문도성은 한가하다. 하녀들이 죄 쉬러 가 복도에는 인기척이 사라지고, 후원으로 이어지는 뒷문을 지키는 기사들은 잠시 눈을 붙였다.

페기는 이 사실을 알고도 지금껏 부러 다른 시간대를 골라 도주를 시도해 왔다. 그러지 않고는 그의 삼엄한 경계심을 누그러트리지 못할 것 같았다. 그의 눈이 아무리 밝다 하나 성의 경비는 사람이 서는 것이니, 쥐 새끼 하나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 리 없었다. 그녀는 달아나야 했다. 얌전히 끌려오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맨발이 조심스레 나아갔다. 진주색 융단이 깔린 계단을 내려가 익숙하게 길을 잡는 내내 뒤를 밟히는 상상을 수도 없이 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숨은 절로 거칠어졌다. 그러나 어제 잡혔던 곳을 지나치고, 엊그제 잡혔던 곳을 무사히 지나가며 비로소 희망이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오늘은 성공할지도 몰라.

페기는 싹튼 희망을 품고 차츰 달리기 시작했다. 머지않았다. 이대로 모퉁이만 돌아 1층 복도만 가로지르면 경계가 허물어진 후문에 닿을 수 있었다.

그런데 모퉁이를 돌기 무섭게, 방문을 열고 나오는 ‘그’를 보았다.

심장이 도로 진창에 처박혔다. 그의 뒷모습만으로도 온몸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그녀는 굳어 버린 몸을 간신히 움직여 한 발, 한 발 뒷걸음질했다. 길을 달리해야 했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이리 허무하게 놓칠 수는….

그때였다.

그와 대화를 나누던 막시모가 고개를 돌리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막시모가 안색을 뒤바꾸며 잇새로 빠르게 속삭였다. 그가 뒤돌아보려 하자, 페기는 지체 없이 등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다음 기회는 없었다. 하다못해 창문이라도 깨고 달아나야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도 못하고 두꺼운 손아귀에 허리가 잡혔다.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몸이 가뿐하게 들렸다. 그는 너무나도 손쉽게 그녀의 몸을 들어 한쪽 어깨에 올린 뒤, 익숙한 모퉁이를 돌아 도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얼어붙어 숨도 제대로 못 쉬던 페기가 발작적으로 목에 핏대를 세웠다.

“내려놔! 이거 놓으라고!”

주먹으로 그의 등을 때리고, 정신없이 발길질을 했다. 그럼에도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때리면 때리는 대로, 소리 지르면 소리 지르는 대로.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발버둥 쳤으나, 그마저 팔 하나로 아무렇지 않게 제압될 뿐이었다.

절망적이다. 끔찍했다. 그는 벽이었다. 어떤 말도 통하지 않고, 미약한 힘으론 뛰어넘을 수도 없는 벽.

페기는 그의 어깨에 거꾸로 매달려선 한없이 흐느꼈다. 성큼성큼 내딛는 그의 걸음마다 눈물방울이 후드득 날렸다. 힘없는 주먹으로 계속해 그의 등을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대체 나한테 왜 이래. 내가 뭘 잘못했다고. 어떻게 너까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수일에 걸쳐 숨죽이고 기다렸던 도주는 제대로 시작도 못 하고 끝났다. 순식간에 돌아온 침실 앞에서 페기는 한스럽게 울었다. 이러지 마. 나한테 이러지 마. 흐느끼는 소리가 애처로웠으나, 침실로 들어가는 그의 마음까지 움직이진 못했다.

문이 닫혔다.

오후의 성은 다시 고요했다.

***

예후르가 죽어 가는 페기를 안고 탐보프 동부의 반란군 진영으로 돌아온 것은 약 두어 달 전의 일이었다.

그는 곧장 군의를 불러 그녀를 살피게 했으나, 불려 온 군의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운 좋게 화살이 심장을 피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상태였다. 며칠 더 숨을 붙여 둘 수는 있어도 살리기는 무리라 하였다.

차라는 절망했고, 안드레아는 미친 듯이 화를 냈다. 노성과 곡소리가 한데 섞여 몰아치는 가운데 예후르는 외딴섬처럼 페기의 머리맡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백룡 코른헤르트가 기운을 차린 즉시, 주변의 만류도 뿌리치고 그녀를 품에 안아 그곳을 떠났다.

목적지는 그의 영지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문도성.

꼭두새벽 난데없이 들이닥친 성주에 놀라 성이 발칵 뒤집힌 사이, 예후르는 시체처럼 늘어진 페기를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 죽어 가는 그녀를 앞에 두고 밤새도록 괴롭게 번민했으나, 그럼에도 답은 하나였다.

기어이 그는 결행했다.

치열하고 치열한 밤이 지나갔다.

수일이 지나도록 잠겨 있던 문은 어느 날 갑자기 열렸다. 뒤늦게 그를 쫓아 문도성에 당도했던 용 기병대와 막시모가 문을 열고 나오는 그의 모습에 부스스 일어섰다. 핏기 가신 그의 얼굴이 해쓱했다. 그저 고목처럼 말없이 버티어 선 그를 멍하니 응시하던 막시모가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카니나의 페기는 살아 있었다.

코 밑으로 흘러나오는 숨결과 손목에서 규칙적으로 약동하는 맥박을 느끼고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인근의 의사란 의사는 죄 불려 와 그녀를 진찰했지만 모두들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건강하십니다.

곧 깨어나실 겁니다.

하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다던 그녀는 좀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예후르는 잠든 그녀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먹지도, 눈을 붙이지도 않는 그의 모습에 수하들이 눈물로 읍하였으나 소용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짙은 안개 속도 꿰뚫는 눈으로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니, 천치도 안 믿을 이야기였다.

하지만 진실이었다. 그 밝던 눈에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황량한 습지에서 화살을 맞고 쓰러지던 페기의 모습만이 계속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세상은 강물처럼 끝없이 흘러가는데, 그만은 홀로 고인 늪 속을 헤매고 있었다. 검은 물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모든 감각이 먹먹해졌다.

그 시기, 그는 고립된 시공 속에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여 덧없는 과거에 매달려 있었고, 이미 멀어진 습지에 망령처럼 붙들려 있었다. 그는 페기의 곁에 있되, 곁에 없었다. 진정 죽은 꼴을 확인한 뒤로 그 애가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본 것이 고작 그곳에서의 몇 초가 전부였다.

바람 맞아 들쳐지던 담요, 흩날리던 은빛 머리칼의 잔상, 겁먹어 뒤돌아보던 얼굴과 단말마의 비명조차 없이 고요하게 허물어지던 너.

분명 살아 있었다.

또다시 죽어 간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예후르?”

어느 순간, 끝없이 침몰하던 의식이 수면 위로 솟구쳐 올랐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정적과 푸른 새벽빛이 아리도록 생경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현실감이 엄습하여 바위처럼 굳어 있던 온몸의 신경을 일깨웠다. 그는 의식적으로 눈을 깜박였다. 눈앞이 밝았다. 네가 깨어났기 때문인가.

야속하리만치 굳게 닫혀 있던 보랏빛 눈이 비로소 말갛게 뜨여 있었다. 힘없이 이지러지는 눈에 제 얼굴이 담기는 모습이 견딜 수 없는 고양감을 주었다. 그는 격렬하게 몰아치는 감격을 모조리 씹어 삼켰다. 이 순간에 박제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오로지 이 순간 속에만 살아 숨 쉬고 싶었다.

그러나 순간은 붙잡을 수 없는 찰나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서서히 보랏빛 눈에 어려 왔다. 그러잖아도 창백하던 뺨이 더욱 희게 질렸다. 그녀는 말라붙은 입술을 달싹였다. 잔뜩 쉬어 알아들을 수 없는 쇳소리는 오직 한순간에 도취하여 부유하던 그를 땅 밑으로 끌어내리기 충분했다.

이지가 깨어나고, 이성이 깨어나고, 사고가 깨어났다.

이윽고 완전해진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씹어 삼켰던 감격이 혼란과 두려움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에게 그녀는 더 이상 사랑하는 누이가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그가 내팽개친 페기는 막시모가 하녀들을 불러 보살피기 시작했다. 다시 불려 온 의사들은 또다시 아무런 이상도 없다는 말만 떠들고 갔다. 기이하게도 상처는 모두 아물어 있었다. 흉터조차 남지 않아 화살에 맞았던 것조차 꿈처럼 느껴졌다.

“전하.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많이 혼란스러워하십니다. 가서 안심이라도 좀 시켜 주십시오.”

예후르는 듣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것을 물었다.

“너의 눈에 저것이 어찌 비치느냐.”

그러자 막시모는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표정을 했다. 예후르는 그에 그치지 않고 일전에 페기와 안면이 있던 니체타까지 침실로 들여보냈다.

얼떨결에 그녀의 얼굴만 보고 돌아온 니체타가 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분 맞으시던데요? 예전에 돌아가셨다던 전하의 누이동생.”

막시모는 대놓고 들으란 듯이 코웃음을 쳤고, 니체타는 여전히 영문을 몰랐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예후르는 하인을 시켜 화가를 불러왔다. 반나절가량 침실에 들어가 그림을 완성한 화가는 두둑한 보수를 받고 떠났다.

예후르는 물끄러미 화폭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좀 인정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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