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2화 (162/328)

저를 아껴 주고, 사랑해 주는 것이 좋았다. 비록 자신이 바라는 방향은 아니었을지언정, 끝없이 베풀어 주는 애정이 늘 기뻤다. 그렇게 사랑에 눈이 멀어, 그가 내려 주는 애정에 눈이 멀어 그의 이면을 간과해 왔다.

위대한 그는 어쩌면 위대하지 않은 타인을 멸시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발아래를 기는 벌레나 사람이나 그의 눈에는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 증거로 어느 순간 그가 감정적인 교류에 무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놀랍게도 그는 몹시 능숙하게 서투른 자신을 가리고 있었으나, 때때로 무미건조해지는 그의 눈빛에서 사람의 감정에 대한 몰이해가 드러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도 개미들이 느끼는 감정을 모르니까.

그럼에도 그는 사도로 살고자 교회란 인간 사회에 녹아들었다. 심적으로 공감하진 못할지언정, 머리로 이해하고 타인을 관찰하여 놀랍도록 유려한 태도를 꾸며 냈다. 그리하여 만인이 우러러보는 무결한 사도가 되었으나, 사도가 아니고서는 감히 그와 친분을 맺지 못했다.

그는 어디까지나 시혜적인 사람이었으므로.

그와 가까워지려면 그에게 선택을 받아야 했다. 행여 선택받았다 한들, 그는 애정을 받는 자가 아닌 애정을 주는 자였다. 그는 타인의 애정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와 돌이켜 보건대, 그것을 감히 애정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그가 감정적인 무언가를 베푸는 상대는 언제나 같은 사도뿐이었다. 한때 그의 약혼녀였던 세도파 바도비체는 그의 선 안으로 들지 못해 아등바등했었다.

어째서 우리 뿐이었을까.

자신과 같이 천사의 권능을 내려 받았기에 보다 동등한 존재로 여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달리 이유가 없으니 아마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나를 아끼던 것도, 레오폴트와 차라를 아끼던 것도 동질감에서 비롯된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당시의 나는 그것을 애정이라 느꼈지만, 보다 고차원적인 곳에서 사색하는 그는 다르게 여길지도 모르지.

다른 사람들은 그의 이런 이면을 모른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녀인 것이다.

페기는 그에게 다른 사람과 같은 평범한 잣대를 들이밀지 않으며, 동시에 저 자신보다도 그에 대한 믿음이 뚜렷했다. 그는 무너지지 않을 테지. 그는 언제나 옳은 선택을 내리고, 옳은 길을 걸을 테지.

하지만 그 믿음은 이미 송두리째 뿌리 뽑혔다.

페기는 무너지는 그를 보았고, 살아 있는 저와 죽어 있는 저 사이에서 흔들리는 그를 감지했다. 안다고 생각했던 그가 별안간 자욱한 안개처럼 변해 버렸다. 페기는 이제 그를 몰랐고, 그가 낯설었다. 제 민낯을 보고 그가 보일 반응을, 정말 추호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달아나는 길이 더욱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그가 알던 그대로였다면 떠나는 발걸음이라도 가벼웠을 텐데. 사술을 뒤집어쓴 나를 너무나 당연하게도 카니나의 페기라 의심치 않고, 그저 수상한 간자로만 여겼으면 나았을 텐데. 감히 망자를 흉내 내는 꼴이 가소로우나, 사는 것이 지루하니 어디 한번 지켜보자 넘겼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내가 달아나도 넌 슬퍼하지 않았을 거잖아.

대체 내가 뭐라고.

너는 영원히 하늘의 별처럼 빛나야 할 존재인데, 왜 자꾸 땅으로 떨어지려 해. 나 같은 건 잊고 잘 살았어야지. 고작 살기 위해 네게서 달아나는 날, 이렇게 힘들게 하진 말았어야지.

비참하게 죽고, 비참하게 되살아났다.

그러면 다시 한번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죽은 듯이 살아야 했는데, 끓어오르는 복수심에 눈이 멀어 제 발로 사자 우리에 들어갔다. 그때 말리던 안드레아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예후르를 찾아가지만 않았으면 그가 흔들릴 일도, 무너지는 그를 보며 이토록 괴로울 일도 없었을 테니.

달음박질하는 걸음마다 후회가 깊게 새겨졌다. 그가 무너지는 것도, 지금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도 전부 자신의 잘못 같았다. 아니, 제 잘못이 맞았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돌아와선 안 되는 자가 돌아와 모든 것을 망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럴 거면 왜 나를 되살리셨을까.

그냥 그대로 죽어 있었으면 모두가 편안했을 텐데, 왜 나를 되살려 이 고통을 겪게 하시는가.

되살리려거든 차라리 내게 용기를 더 주시지. 뼈에 각인된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 너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용감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지.

덧없는 한탄은 가쁜 숨결에 섞여 안개 속으로 허망하게 흩어졌다. 페기는 입안에서 쇳내가 나도록 달렸다. 빗물이 흐르고 눈물이 지나간 자리마다 검게 칠한 숯가루가 거둬졌다. 얇은 담요 속으로 살 떨리는 한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그때였다.

휘잉!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무언가 귓전을 스치고 지나갔다. 걸음이 우뚝 멎었다. 가쁘게 차오르는 날숨 사이로 절망적인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발치에 꽂힌 화살.

차마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희게 질린 채로 얼어붙었다.

…예후르.

***

예후르는 높은 절벽 위에 서 있었다.

평상시라면 안개에서 자유로울 습지의 유일한 고지대이나, 비 내리는 오늘만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달리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안개가 걷히든, 자욱하든 전부 꿰뚫어 볼 수 있으니까.

그는 느긋하게 화살을 다시 시위에 메겼다.

조준점은 꼼짝없이 굳어 버린 여자.

고작 이렇게 쉽게 잡히려고 달아났나 싶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사실 꽤 화가 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화가 났다는 사실에 놀란 상태였다. 저 여자가 그렇게나 자신을 뒤흔드는 존재가 되었다는 깨달음에 불쾌하다가도, 냉정한 그의 이성은 자연스레 화가 난 이유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내게서 달아났기 때문인가. 아니면 페기의 모습과 다르기 때문인가.

전자라면 납득할 만했다. 여자는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절 모시기로 약속했으니까. 반지가 제게 없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틈을 보아 도망쳤으니, 당연히 언짢을 일이었다.

하지만 후자라면 조금 미묘해졌다.

저 여자는 당연히 페기가 아닐 테니까. 페기일 수 없으니까. 만에 하나 저 여자가 페기의 얼굴을 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이상한 일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상상에 소질이 없는 그마저 일어나지도 않은 아연함을 미리 맛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저 여자가 페기의 모습이 아니라고 화가 났다면, 그것은 그만큼 자신이 망가졌다는 뜻이리라.

흐려진 눈에 보고픈 이가 비치고, 자꾸만 보이는 그리운 이의 모습에 정신마저 나가 버린 것이다. 입맛이 썼지만 인정할 만한 이유였다. 그는 빠르게 머릿속을 정리하며 여자의 심장 부근에 멈춰 있던 화살촉을 조금 내렸다.

살려서 데려가야 했다.

안드레아에게 보여 다시는 나를 기만하려 들지 말라 이르고, 차라에게 보내 주어야 했다. 안드레아야 원래부터 이해할 수 없는 녀석이라지만, 차라는 그 영특한 애가 왜 저 여자를 찾는지 모르겠다. 모르지만 원하니 가져다주는 것뿐이다.

그 이상, 여자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여자의 다리를 조준했다. 급소를 비껴 나간 곳으로, 죽진 않아도 죽을 만큼은 괴로운 곳으로.

그러나 활시위를 놓는 순간, 여자가 강하게 땅을 박차 올랐다. 다시 달려 나가는 뒷모습과 애먼 데 박힌 화살을 조금 당혹스럽게 응시하던 예후르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래, 감히 사술을 뒤집어쓰고 망자를 욕보이던 것이 그리 쉽사리 잡힐까.

예후르는 다시 느긋하게 화살을 메겼다. 정신없이 달리는 여자를 맞추기는 쉬웠으나, 문득 이상한 충동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몰이 사냥이라도 해 볼까.

그는 본디 사냥을 즐기지 않았다. 순전히 재미로 짐승을 잡아 죽이는 행위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데없이 솟아난 충동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하면 안 된다는 이유도 딱히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순순히 충동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휘잉!

날아간 화살이 여자의 뺨을 스쳤다. 기겁할 듯 놀란 여자가 방향을 바꾸어 달리자, 이번엔 그쪽으로 미리 화살을 날려 보냈다. 발치로 박히는 화살에 여자가 고꾸라질 듯 땅을 짚었다. 그러나 지치지도 않고 다시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예후르는 그렇게 수없이 화살을 날려 보냈다. 죄 무의미한 짓이건만 어쩐지 멈출 수가 없었다. 몸을 사로잡은 충동 속에서 기이한 희열이 끓어올랐다. 그는 그것의 이름을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휘잉!

언제부턴가 그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 오르고, 형언할 수 없는 감각에 사로잡혔다. 오직 형제들이 죽어 나갈 때만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머리가 이젠 하루걸러 그랬다. 가끔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그랬다.

그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그렇게 살고도 그 방법을 몰랐다. 필요하지 않았기에 굳이 알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필요한데. 이해할 수 없는 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야만 하는데.

그때마다 또 이렇게 다시 화가 치민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내가 처참하게 실패했다는 증거이기에.

실패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으니, 화가 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활시위를 당기는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가고, 조준점이 조금씩 흔들렸다. 그는 또다시 분노하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제대로 털어 내지 못하여 응어리진 감정들이 폭발하려 하고 있었다.

도대체 너는 왜 내 눈앞에 나타나서.

그는 저 여자가 너무나도 싫었다. 어찌할 줄 모르겠는 감정들을 자꾸만 일깨우는 여자가 지긋지긋했다. 호수가 얼마나 깊은지도 모르고 겁도 없이 돌멩이를 던져 대는 철없는 어린애 같았다. 별생각 없이 던진 돌멩이가 일어 내는 파문에 내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저 여자는 알까.

모르니 그러겠지.

모르니 감히 내 앞에서 그 애처럼 보이려는 거겠지.

그는 여자와의 인연을 이만 끊고 싶었다. 눈 닿는 모든 곳에서 여자를 치워 버리고 싶었다. 여자 없이도 그는 지옥에서 살고 있었다. 충분히 괴로운데 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더해야 하나. 하루하루 쌓여 가는 감정의 잔재들이 그를 숨 막히도록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이미 위태로웠다.

그러니 오늘로 털어 버리자.

모든 복수를 완수하기 전까지 그는 함부로 무너질 수도 없었다. 그러니 안 그래도 위태로운 그를 흔드는 여자와는 여기서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더 이상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는 곳으로 끌려 내려가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마지막 화살이 시위에 걸렸다. 그는 맹렬하게 여자를 조준했다. 휘날리는 얇은 담요 사이를 덧그리듯 화살촉이 조용히 여자의 주위를 맴돌았다. 알 수 없는 미련은 여기서 접어야 했다. 그는 지그시 입술을 물며 신물처럼 올라오는 쓰디쓴 감정들을 죄다 씹어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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