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1화 (161/328)

그녀는 이미 잃어버리고 만 저 순수를 지켜 주고 싶었다.

“…아주 아름다운 사람이 날 찾을 거야.”

목이 메어 왔다.

“그러면 네가 본 대로 말해 주렴.”

페기는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다잡으며 간신히 웃어 보였다.

“거짓말은 하면 안 돼.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를 아주 잘 간파해 내니까. 진실을 이야기하면 가엾은 널 못 본 체하진 않을 거란다.”

아이는 그저 말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페기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아이와 이마를 맞대었다. 떨리는 입술 사이로 간절한 속엣말이 흘러나왔다.

“…너는 꼭 살아남아.”

순진하게 살다간 자기도 모르는 새 목이 날아가 버리는 세상이었다.

나는 그랬지만, 너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살아남겠답시고 이렇게 추악해지진 않았으면 좋겠어.

조용히 몸을 일으킨 페기가 다시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따라붙는 아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번만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마을을 빠져나오자,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자욱한 안개가 그녀를 반겨 왔다. 페기는 눈을 감고 바람의 방향을 느꼈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향하면 반란군이 진을 친 평원으로 빠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반대다.

눈을 뜬 페기가 바람을 등지고 섰다. 안개 속을 응시하는 눈빛이 결연했다. 긴장된 숨을 짧게 들이켠 그녀가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바람 먹어 휘날리는 담요 자락 뒤로 짙은 안개가 겹겹이 감겨 왔다.

***

열댓 마리의 용들이 안개 속 마을로 진입한 것은 그날 오후의 일이었다.

며칠간 지속된 강행군 끝에 지칠 대로 지친 용들은 거의 나뒹굴다시피 내려앉았다. 부옇게 피어오른 흙먼지 속에서 빈말로도 좋아 보이지 않는 용 기병대 단원들이 기어 나왔다. 그들의 뒤에 하나씩 매달려 온 복면 쓴 예후르의 수하들만이 바람처럼 성터로 달려 들어갔다.

예후르는 무너진 성벽 위에 서 있었다. 용의 불꽃을 맞아 거멓게 타들어 간 땅 너머로 쓰러져 가는 민가들,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진 망막한 안개의 세상이 시야를 꽉 메웠다. 그는 짙은 안개 속 들풀이 듬성듬성한 습지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딱히 눈에 띄는 인적은 없었다.

막시모가 그의 등 뒤로 다가왔다.

“전하. 성내 시신들을 살펴보았는데 세르난도 만포르차가 보이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한 물음에 막시모가 앓는 듯이 침음을 흘렸다.

“아델라이데 아가씨의 시신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지하 감옥에서 큰 화재가 벌어졌던 것 같습니다. 무너진 천장에 깔려 죽은 고위 기사들의 시신도 대거 그곳에서 발견되었고요.”

가정할 수 있는 상황은 둘이었다.

뼈도 안 남게 타 죽었거나, 살아남아 도망쳤거나.

어느 쪽이든 막시모는 단정할 수 없는 사항이었다. 그는 명을 받드는 자지, 명을 내리는 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때, 니체타가 웬 어린애의 손을 잡고 걸어왔다.

“전하. 여기 아이가 하나 있는데요?”

묵묵히 정면만을 응시하던 예후르의 시선이 흘끗 아이에게로 내려왔다. 외지인들이 신기한지 연신 그들을 훔쳐보던 아이가 불현듯 움찔거리며 슬금슬금 막시모의 뒤로 숨었다. 막시모가 황급히 아이의 팔을 잡아당겼다.

“너, 너 이러면 안 돼. 혼나.”

그럼에도 아이가 막시모의 허리춤을 꽉 붙잡고 버티자, 막시모가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예후르의 눈치를 살폈다. 예후르는 아이를 억지로 잡아끄는 막시모의 손길을 제지하며 그의 등 뒤로 돌아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무엇을 보았니?”

막시모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아이가 슬며시 고개를 틀었다. 예후르는 아이와 가만히 시선을 맞추었다. 잠잠한 금안이 차분하게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누구를 보았구나.”

꿀꺽, 침을 삼킨 아이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예후르가 다시 조곤조곤하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었니?”

아이가 꾸물거리며 망토 사이로 양손을 내밀었다. 아이의 손이 차분히 언어를 그려 나갔다.

흰 손.

또다시 아이의 손이 움직였다.

보라색 눈.

마지막으로.

…검은 머리.

예후르는 물끄러미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내리깔린 금안에는 이렇다 할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는 그저 멀뚱히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으나, 막시모만은 목 끝까지 차오른 긴장감을 억누르며 숨 막히는 침묵을 견디고 있었다.

문득, 예후르가 손을 들어 올렸다. 순간 막시모가 다급하게 아이를 끌어안았으나, 예후르의 손은 아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 지나갈 뿐이었다. 막시모는 황망히 그를 바라보았다. 예후르가 무릎을 짚으며 일어났다.

“착한 아이구나.”

그는 조용히 읊조리곤 발길을 돌렸다. 가까스로 당혹감을 삼킨 막시모가 급히 예후르를 뒤쫓았다.

“전하!”

예후르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막시모는 계단에서 껑충 뛰어내려 그를 따라붙었다.

“전하. 지금은 이동할 수 없습니다. 용들을 좀 보십시오. 아무리 채찍질해 봤자 날갯짓도 못 할 겁니다.”

땅바닥에 늘어진 용들은 혀를 길게 빼문 채 헥헥대고 있었다. 위스누아의 기습이 있으리란 소식을 들은 날부터 용들을 이끌고 짙은 안개 속을 이 잡듯 헤집고 다녔으니, 고작 몇 시간 휴식으로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예후르도 더 이상 용들을 가혹하게 부릴 생각은 아닌지, 백룡 코른헤르트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비늘을 쓸어 줄 뿐이었다. 대신 그는 안장에 묶어 두었던 무기를 챙기기 시작했다. 막시모는 그제야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전하….”

황망히 입술을 달싹거리던 막시모가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차라리 동부 전 지역으로 공문을 보내십시오. 아니면 제가 부하들을 이끌고 천천히 추적해 보겠습니다. 도대체 코앞도 제대로 안 보이는 저 안개 속에서 언제 어디로 떠났는지도 모를 사람을 어떻게 찾겠단 말씀입니까!”

“내 눈은 충분히 밝다.”

“아, 물론 전하께서야 그러시겠지만….”

바쁘게 이어지던 말이 우뚝 멈추었다. 막시모가 아연하게 물었다.

“설마 혼자 가시려는 겁니까?”

예후르는 조용히 무기를 고르고 있었다. 그 고요한 뒷모습이 문득 깎아지르는 절벽 아래처럼 선득했다. 그 아래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원초적인 공포. 막시모는 저도 모르게 숨이 가빠 오는 것을 느꼈다.

느긋하게 화살촉을 매만지던 예후르가 입을 열었다.

“막시모, 어찌 두려워하느냐.”

막시모의 어깨가 크게 움찔했다. 그는 떨리는 목울대를 다잡으며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고개가 절로 겸손하게 내려갔다.

“제가 감히 두려워합니다. 행여 3년 전처럼 전하께서 돌아오지 않으실까 봐.”

성궁에서 카타리나 공작의 시체도 확인하지 않고 동쪽으로 떠났던 그는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난 뒤에야 돌아왔다. 끔찍했던 그의 공백과 더더욱 끔찍했던 그의 귀환을 막시모는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어찌 돌아오지 않을까.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는데.”

“하지만 만약 그 아가씨가 돌아가신 카타리나 공작 전하가 아니라면….”

“그건 페기가 아니다.”

살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지던 말을 도려냈다.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이었다. 마치 그럴 수 없다는 가능성의 문제가 아닌, 그래선 아니 된다는 당위의 문제로 꺾이기라도 한 것처럼.

갈등하던 막시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아가씨를 죽이실 겁니까?”

“설마.”

비식거리는 웃음소리가 짧게 들려왔다.

“차라가 찾지 않느냐. 숨을 붙여서 데려가야지.”

“이미 멀리 달아났을 겁니다. 전하의 눈이 밝다고는 하나, 코른헤르트가 저 모양인데 혼자서 어떻게 잡으시겠다는 건지….”

예후르는 다른 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으나, 가지 못하는 곳에는 갈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날개가 되어 주었던 것이 바로 백룡 코른헤르트였다. 역으로 말하자면, 코른헤르트 없이는 그의 발도 다른 사람들처럼 땅에 매였다.

“내가 갈 수 없다면 그것의 발을 묶어야지.”

예후르가 바람의 역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냥을 나가기 좋은 계절이구나.”

***

“내가 신기한 요술 보여 줄까?”

예후르의 손을 잡고 카니나의 뒷골목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다.

당시 페기는 어미에게 각인된 새끼처럼 예후르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는데,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그녀를 돌보아 주던 어린 예후르가 어느 날 그런 말을 했다.

페기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고, 예후르는 가만히 주먹을 내밀었다. 서서히 펼쳐지는 손안에는 기대했던 달콤한 초콜릿이 아니라 웬 불꽃이 매달려 있었다.

멍하니 불꽃을 응시하던 페기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며 죽어라 그의 팔에 매달렸다. 불은 뜨겁고 뜨거운 것은 아프니, 필시 그도 몹시 아프리란 순진한 계산이었다.

하지만 그 바람에 예후르는 불씨를 놓쳤고, 쉽사리 꺼지지 않는 사도의 불꽃은 산 하나를 송두리째 태우기 시작했다. 불타는 산을 느긋하게 구경하던 예후르와 달리 페기는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때는 그렇게나 불이 무서웠다.

그러자 예후르가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페기를 안아 올렸다.

“울보 누이야. 왜 그리 우니?”

페기는 연신 코만 훌쩍였다. 눈물로 번들거리는 흰 뺨을 닦아 주며 예후르는 타오르는 산을 눈짓했다.

“자세히 보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데. 모두가 깨끗하게 정화되고 있지 않니.”

그러면서 상냥하게 두 눈을 접어 웃었다. 불길의 그림자가 흉악하게 넘실거리는 그의 얼굴에서 둥글게 휘어진 금빛 안광만이 유독 도드라졌다.

어쩌면 그 순간에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다르다는 사실을.

조각 같은 외모, 바닥이 보이지 않는 학식, 넘치는 재능과 뱀을 죽일 만한 사도로서의 무결함.

하지만 진실로 그가 특별한 이유는 고작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유는 도리어 보이지 않는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그녀와 같은 평범한 사람은 전체적인 윤곽조차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

이를테면 전설로만 내려오는 고대의 위대한 존재들처럼.

페기는 언제나 그런 생각을 했다. 요즘 사람들은 흔히들 과장되었다고 치부하는 전설 속 존재들이 혹 예후르를 닮지 않았을지. 괴물이 창궐하고 영웅이 도래하던 오래전의 사람이 때를 잘못 타고났다면, 그것이 혹 예후르가 아닐지.

증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추측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녀는 제법 확신하고 있었다. 세상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영역에 그치지 않으므로. 때로는 직감적으로 깨우치는 것이 진실에 가장 근접하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위대한 사람이 저를 구원해 주었다는 것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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