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간절하게 뜨이는 눈에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얼굴이 점점 비쳐 왔다. 멍하니 수면을 응시하던 페기가 천천히 손을 들어 제 뺨을 매만졌다.
여리디여린 선으로 그려진 이목구비. 흐트러져 짧게 물결치는 빛바랜 은발과 백지에 물감을 떨어트린 듯 홀로 선명한 보라색 눈.
허옇게 거스러미 일어난 아랫입술이 덜덜 떨렸다.
이럴 순 없어.
죽을 둥 살 둥 반년을 버텼는데, 이제 와 이럴 순 없었다. 돌아오려거든 아무도 제 진짜 얼굴을 모르는 산간벽지여야만 했다. 이렇듯 적진에서, 예후르의 시야가 닿는 곳에서 변할 수는 없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데.
뺨을 매만지던 손끝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손톱을 세워 얼굴을 긁어내리며 그녀는 시퍼렇게 분노했다. 왜 나는 한 번도 생각대로 돌아가는 일이 없어. 왜 항상 이렇게 칼날 위를 걸어야 하는 거야.
사납게 물그릇을 엎어 버린 페기가 양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어떻게든 평정심을 되찾으려 애썼다. 미친 듯이 화가 치밀었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받아들이고, 또다시 살아남는 길을 강구하는 수밖에.
페기는 힘겹게 숨을 고르며 눈을 떴다. 멀지 않은 곳에 엎어진 화로가 있었다. 그곳으로 기어가 수북하게 쌓인 숯가루를 얼굴과 머리에 꼼꼼히 묻히기 시작했다. 원래의 색을 조금이라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숯가루를 거의 쏟아붓는 지경이었다.
그러고는 불안에 떨리는 눈으로 살며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폐허가 된 주변 광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완전히 무너져 내린 천장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 육중한 돌조각에 깔려 죽은 위스누아 기사들의 시체가 보였다.
물끄러미 그들을 응시하던 페기가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허옇게 홉뜬 송장의 눈을 외면하며 그의 망토를 힘껏 끄집어 당겼다. 걸쳐 보니, 바닥에 끌리지도 않고 도톰하니 제법 따뜻했다. 망토에 달린 후드를 내려 쓰던 그녀는 문득 기사의 허리춤에 매달린 단검을 발견했다.
절 알아보고도 거둔 이시도르 피아제 같은 인물을 또 만나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요행이다.
페기는 기사의 단검을 빼서 쥐었다. 손아귀에 잡히는 감각이 익숙지 않다는 생각을 하다가 차게 조소했다. 더 잔인하게 죽인 사람만 벌써 둘이었다. 천계율에 따르면 그녀는 이미 지옥으로 굴러떨어질 악인이었다.
하지만 지옥인지 천국인지 모를 곳에서 이렇듯 기어 올라왔다. 그녀는 단검을 꽉 움켜쥐며 돌계단으로 발을 디뎠다. 똬리 튼 뱀처럼 둥글게 올라가는 저 계단 위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만으로도 숨통이 막혀 왔다.
그러나 계단을 밟아 올라가면서도, 또 완전히 무너져 내린 옛 성을 가로지르면서도 그녀는 누구 하나 맞닥뜨리지 못했다. 널려 있는 시체들은 이미 차게 굳어 있었고, 사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성밖으로 나가던 페기는 그만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온 땅이 시커멓게 타 있었다.
시들어 가는 잡풀로 무성하던 흙밭은 죄 갈아엎어진 듯 검게 그을렸으며, 사방에서 탄내가 진동했다. 페기는 아연한 표정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타다 만 송장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대부분 뼈대만 남아 신원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설마 이 모두 예후르의 짓일까.
페기는 정신을 잃기 직전에 들었던 용의 울음소리를 떠올리며 착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다양하다. 단순히 기습을 막기 위함이었으면 이렇게까지 잔혹할 이유가 없었다. 누구보다 공명정대하던 사람이 저 때문에 타락한 것 같아 묘한 죄책감을 떨칠 수 없었다.
다행히 폐허는 성터에서 끝이 났다. 짙은 안개가 서린 마을은 낡아 빠진 그대로였다. 주민들이 모두 달아나 버린 듯 그 어디에도 인적이 보이지 않았으며, 숨죽인 적막은 성터와 마찬가지였다.
조심스레 마을로 진입하던 페기가 불현듯 허를 찔린 기분으로 신음을 삼켰다.
휑하니 빈 길가에 쥐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들짐승을 잡아다 안드레아가 했던 그대로 사술을 부릴 작정이었다. 자신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어디 어떻게 퍼져 있는지 모르는 마당에 민낯으로 다니기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정말 안전한 곳에 이르기 전까진 가능한 한 신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용이 포악하게 울부짖던 마을은 사람도 짐승도 떠난 지 오래였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폐가 사이를 가로지르며 페기는 강박적으로 후드를 더욱 깊숙하게 눌러썼다. 고작 사술 하나 벗겨졌을 뿐인데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저를 노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어디선가 미약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페기는 퍼뜩 고개를 돌렸다. 길 한구석에 버려진 나무 상자 안에서 계속해 희미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단검을 꽉 쥔 페기가 발소리를 죽여 상자로 다가갔다. 들쥐나 새, 하다못해 개여도 상관없었다. 숨이 붙어 있는 존재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경각에 달한 숨을 거두어 생명의 불을 취할 수만 있다면.
그러나 상자의 뚜껑을 연 그녀는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상자 안에는 비쩍 마른 어린애가 웅크리고 있었다.
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덥수룩한 머리 사이로 눈은 거의 감겨 있고, 갈증이 깊은지 입술은 창백하게 말라붙었다. 혼곤한 와중에 숨만 색색 내쉬고 있었다.
페기는 묘하게 초점이 엇나간 눈으로 생각했다.
이 애는 안 될까.
안 될 리가.
생명의 불을 품고 있는 것은 수탉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이 애를 좀 봐, 거의 죽어 가고 있잖아. 아니, 이미 죽음의 문턱에 발을 들였는지도 몰라. 더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고통받지 않게 해 줄 테니, 너의 불만 내가 삼키면 안 될까. 나를 좀 살려 줄 수는 없겠니?
그녀는 양손으로 움켜쥔 단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아는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제정신일 수가 없잖아. 이미 사람을 둘이나 죽여 놓고, 이제 와 흔들리는 것이 더 우스운 일 아닐까.
검을 움켜쥔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보랏빛 눈 한가득 광기가 끓어올랐다. 그냥 딱 한 번만 눈감으면 돼. 그러면 확실하게 죽지 않을 수 있어.
머릿속에서 울리는 간교한 속삭임에 굴복하려는 찰나, 아이의 눈이 꿈틀거리며 뜨였다.
가만히 마주쳐 오는 말간 눈빛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잠에서 덜 깬 듯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아이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천천히 손을 뻗어 왔다.
우습게도 그 모습에서 깊이 묻어 놓았던 까마득한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카니나.
태양이 작열하는 환락의 도시, 그 뒷골목 쓰레기 더미 속에 파묻혀 살던 어느 날.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장엄한 소리에 겁먹은 그녀는 들쥐 새끼처럼 쓰레기통으로 숨어들었고, 한낮의 더운 열기 속에 천천히 죽어 가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태어나 아무도 모르게 죽어 가는 다른 뒷골목 어린애들처럼 그렇게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질 줄 알았으나.
부지불식간에 머리 위 뚜껑이 열리며 눈부신 빛이 새어 들었다.
그 빛과 함께 내려온 손이 그녀를 밑바닥에서 끌어올렸다. 구원해 주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대체 뭔가.
어린 내게는 예후르가 내려와 삶을 주었는데, 왜 이 아이에게는 내가 온 것인가.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손을 뻗어. 내가, 나는, 나 하나 살자고 널 죽이려 했는데.
단검을 움켜쥔 손이 파들파들 떨려 왔다. 자괴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쓰레기 더미를 전전하던 어린 날보다 지금의 자신이 더 역겨웠다. 예후르는 어쩌자고 이런 걸 구하였나. 그에게 구원받아 하는 짓이 고작 힘없는 어린애에게 칼을 들이미는 것인가.
짧은 흐느낌을 터트린 페기가 단검을 내던지고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
이 온기를 내가 감히 앗으려 했다.
그녀를 팔아넘기려 했던 포주나 세르난도 만포르차와는 상황이 달랐다. 이 아이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었다. 그럼에도 지난 두 차례의 살인을 훈장 삼아 무고한 어린애까지 해치려 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 눈이 멀어 한순간이나마 사람이기를 포기했던 자신이 너무나도 추악했다.
페기는 품속 아이의 존재를 확인하듯 연신 아이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살며시 몸을 뒤로 물리자, 또렷하게 보이는 아이의 맑은 눈에 더더욱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페기는 검댕이 묻은 아이의 뺨을 엄지로 살살 문지르며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어디… 아픈 곳은 없니?”
아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녀의 시선이 아이를 감싸고 있는 얇고 더러운 담요에 가 닿았다.
페기는 황급히 망토를 벗어 아이에게 둘러 주었다. 해진 담요가 그녀의 몫이 되었지만, 포근한 망토에 감싸인 아이의 모습을 보자 묘한 만족감이 들었다. 페기는 얇은 담요를 머리끝부터 꼼꼼히 둘러썼다.
“그럼….”
무릎을 펴고 일어난 페기가 말을 주저했다. 죽이려고 한 마당에 인사는 사치였다. 그녀는 애써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며 단검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등 뒤에서 타닥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아이가 졸졸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페기가 난감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른은 안 계시니?”
아이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페기는 쪼그려 앉아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미안해. 난 널 데려갈 수 없어. 너무 위험한 길이야.”
조곤조곤 속삭이는 말에 아이는 그저 빤한 시선만 보내왔다. 머뭇거리던 페기가 끝내 입술을 닫아걸곤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이번에는 따라오는 소리가 없었다. 길을 걷는 페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치열한 망설임 끝에 발걸음이 다시 아이에게로 돌아갔다.
성큼성큼 다가온 페기가 아이의 손에 억지로 단검을 쥐여 주었다.
“혹시라도 위험해지면 사용하렴. 망설이면 안 돼. 너 하나 살겠다는 것만 생각해.”
아이는 얌전히 눈만 깜빡였다. 그 순한 눈망울에 페기는 속이 갑갑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보니 단검을 쥔 모양새도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누가 나타나 검을 요구해도 순순히 내어 줄 것만 같았다.
“그냥… 어디 가지 말고 여기 붙어 있어. 곧 사람들이 다시 몰려올 거야. 그때처럼 용이 왔다고 숨어 버리면 안 돼. 모두가 너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여기 있으렴. 알았지?”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페기는 갈등하듯 입 안의 여린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확실하게 해 두고 싶었다. 잠깐이나마 이 애를 죽이려 했던 죄책감이라 해도 좋고, 애먼 데서 부리는 만용이라 해도 좋았다. 그녀는 이 애가 살아남길 바랐다. 어린 날 저를 구원해 주었던 예후르처럼, 저 역시 이 어린애만은 무사히 살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