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후르는 팔짱을 끼고 잠시 고뇌에 잠겼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모두 마친 변경백은 담담한 낯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오직 차라만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예후르가 무미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휴전은 할 수 없습니다.”
변경백이 낮은 침음을 흘렸다. 차라가 절망적으로 예후르의 팔을 붙잡으려는데, 그보다 먼저 예후르가 깃발을 들고 서 있는 병사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움찔한 병사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달려와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하게 깃대를 건넸다.
변경백이 마른세수를 하며 어렵사리 물었다.
“이유라도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니까요.”
깃대를 넘겨받은 예후르가 갑자기 용이 그려진 자신의 깃발을 북 뜯었다. 지켜보던 병사들이 모두 급하게 숨을 삼켰다. 예후르는 홀로 태연자약하게 빈 깃대를 변경백에게 내밀었다.
“그건 앞으로 동부의 구원자께서 결정하실 사안입니다.”
쥐 죽은 듯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얼결에 깃대를 받아 든 변경백이 멍청하게 되물었다.
“…예?”
“오래 찾았습니다. 다행히 늦지 않게 오셨군요.”
예후르의 입가에 반듯한 미소가 올라왔다.
“그대라면 이 땅을 맡기고 편안하게 떠날 수 있겠습니다.”
날벼락 같은 소리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찰나, 마차의 문이 돌연 거칠게 열렸다. 비명처럼 만류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호위 기사들을 밀치며 튀어나온 세도파가 예후르의 발치에 철퍼덕 엎어졌다.
“전하, 전하, 이러시면 안 돼요. 동부를 넘길 사람이 마땅치 않다면, 그래, 제 동생에게 맡기세요. 나이는 어려도 능력만은 출중한 아이예요. 전하, 그래야만 폐하께서 전하를 다시 보실 수 있어요.”
산발이 되어 흩날리는 금발 사이로 광기 어린 눈빛이 드러났다. 세도파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저를, 탐보프를 배반하신 게 아니잖아요. 아버지를 죽인 게 전하이실 리 없어요. 제가 아는 전하는, 그런 분이 아니세요. 절 사랑하진 않으셔도 늘 저를 예로 대해 주셨잖아요. 곧 결혼하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전하의 말씀이 얼마나 무거운진 제가 가장 잘 알아요. 전하께서 함부로 그런 약속 하실 리가 없잖아요. 네?”
야위어 뼈마디가 불거진 손이 악착같이 그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전하, 도대체 왜 이러세요. 무슨 말씀이라도 해 주세요. 제 말이 맞다고, 제 믿음이 옳았다고 해 주셔야죠. 저는, 이렇게 하염없이 전하만을 기다려 왔는데. 전하를 뵈려고 이 먼 길 달려왔는데….”
허망하게 이지러지는 눈에 물기가 어렸다. 세도파는 흐느낌을 삼키며 그의 바짓단에 뺨을 마구 비볐다.
“제가 무언가 잘못했나요? 말씀해 주세요. 말씀만 해 주시면 바로 고칠게요. 전하, 저희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누구 짓인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저희 숙부, 아나클레토 추기경도 행방이 묘연해졌대요. 저 너무 힘들어요. 왜 자꾸 이런 일들이 제게 벌어지는 건지 모르겠어요. 전하, 알려 주세요. 전하께선 다 아시잖아요. 제발 제게 살아갈 힘을 주세….”
고개를 곧추세우던 세도파가 별안간 바짝 굳었다. 어둡게 내리깔린 예후르의 눈이 묵묵히 그녀를 굽어보고 있었다. 깊은 동굴 속에 숨겨진 보석처럼 아름답다 칭송했던 그 눈에, 아무런 감정도 비치질 않았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목구멍이 절로 벌렁거렸다. 세도파는 본능적으로 그의 다리를 꽉 끌어안았다. 당장이라도 그에게서 내쳐질 것 같은 끔찍한 불안감이 쇄도했다.
“제, 제 잘못이 아니에요.”
“…….”
“수, 숙부님이 그랬어요! 그게 전하를 위한 길이라고. 그렇게라도 안 하면 폐하께서 전하를 지지하지 않으실 거랬어요. 아주 참혹한 시련이 되겠지만 전하께서 더 강해지실 거라고요. 가, 가지치기를 한 나무가 열매를 더 많이 맺잖아요. 그런 거였어요. 다른 게 아니었어요. 전부 전하를 위한 일이었다고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세도파는 아이처럼 울며 매달렸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전하께서 평생 저와 결혼해 주지 않으실 것 같았단 말이에요. 너무 불안했어요. 제겐 전하뿐인데, 전하께선 저 말고도 많으시잖아요. 저 하나쯤 버려도 아무렇지 않으실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랬어요. 제가, 탐보프가 전하께 더 중요한 존재가 되길 바랐어요. 전하께서 믿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길 바랐다고요!”
비명처럼 악을 쓴 세도파가 더없이 간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발, 제가 틀리지 않았다고 해 주세요.”
“…….”
“전하를 선택한 제가, 틀리지 않았다고.”
구애하던 수많은 남자들을 뿌리치고 이 남자를 택했다. 자신을 위해서도, 가문을 위해서도, 나라를 위해서도 최적의 선택이 되리라 자부했다. 단 한 번의 선택에 모든 것을 내걸어 더는 돌아갈 길도, 달아날 길도 남아 있질 않았다.
세도파는 미친 듯이 품을 뒤져 곱게 접은 종이를 꺼냈다. 마지막 남은 동아줄처럼 벌벌 떨며 내밀었다.
“저, 전하의 약혼녀는 저예요.”
“…….”
“약속하셨잖아요. 저와 결혼하시겠다고.”
예후르는 말없이 종이를 받아 펼쳤다. 오래전 세도파와 약혼할 당시 작성했던 서류였다. 세도파와 자신의 서명이 각각 하단에 그려져 있었다.
문득 예후르가 픽, 하고 웃었다.
아나클레토, 바도비체 후작, 빌헬미나 3세.
그들에게 대갚음할 방법을 강구하긴 쉬웠다. 셋 다 욕망하는 바가 뚜렷한 자들이었다.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욕망을 산산조각 내면 끝이었다.
그러나 세도파 바도비체는 조금 달랐다.
그녀가 욕망하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녀에게 가장 처절한 고통을 안겨 주려면 그가 죽어야 했는데, 불행히도 그는 아직 죽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세도파에 대한 복수를 뒤로 미루어야 하는가. 그녀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
오래도록 번민하던 문제가 이토록 쉽게 해결될 줄은 몰랐다.
그는 종이의 양 끝을 잡고 천천히 힘을 주었다. 갈라지는 종이의 틈으로 핏기가 빠져나가는 세도파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지긋하게 그녀와 눈을 마주한 채로 연이어 종이를 찢었다. 조각조각 파탄 나는 약혼의 증좌가 바람결에 덧없이 흩어졌다.
예후르가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한 번만 더 이 여자가 내 눈앞에 나타나면, 그때는 네 목을 벨 것이다.”
그의 뒤를 지키던 막시모가 고개를 조아렸다. 예후르는 자신을 붙잡고 있던 세도파의 손길을 너무나도 가볍게 뿌리치며 발걸음을 돌렸다. 멀어지는 그를 멍하니 지켜만 보던 세도파가 발작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전하! 전하…. 이거 놔! 전하! 안 돼, 전하!”
하녀들의 손에 질질 끌려가면서도 세도파는 끝까지 뻗은 손을 거두지 못했다. 눈물 뒤섞인 절규가 계속해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막시모가 심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하. 누가 탐보프 쪽으로 당시 전하의 동선을 유출했는지 찾으셔야 합니다. 정황상 전하와 함께 움직이던 용 기병대 단원들 중 하나라고 추측됩니다만….”
“누군지 안다.”
“네?”
예후르는 말없이 걸어 나갔다. 다시 되물으려던 막시모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차라는 세도파가 마차로 끌려 들어가는 것도, 변경백이 허둥지둥 탐보프 진영으로 돌아가는 것도 모두 잠자코 지켜보았다. 요슈아가 혀를 내두르며 건들건들 다가왔다.
“야. 네 형님, 너한텐 되게 다정하시더니 세도파 아가씨한텐 아주… 어휴! 다시 생각해도 무섭네.”
요슈아가 과장되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모래 먼지 피어오르는 마차의 뒤꽁무니를 가만히 응시하던 차라가 갑자기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갈라지는 병사들 틈으로 익숙한 뒷등이 보였다.
“예후르!”
멈춰 선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차라는 똑바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빛이 전에 없이 단호했다.
“갈색 머리에 키는 이만한 여자. 어디 있어?”
예후르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차라는 더 이상 겁먹지 않았다. 그는 세도파가 아니었다. 늘 자신에게 다정했던 예후르를 무서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가만히 시선을 보내던 예후르가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지금 데려오마.”
그는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멀어졌다. 머잖아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백룡을 차라는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거대한 용이 하나의 점이 되어 저 하늘 너머로 소실될 때까지.
***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멍하니 눈을 뜬 페기는 돌덩이처럼 무거운 손을 들어 느릿느릿 뺨을 훔쳤다. 손가락에 투명한 물기가 묻어났다. 혀끝에 살짝 손가락을 대 보았지만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옆으로 비스듬히 쓰러져 있던 페기는 몸을 틀어 가까스로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움직일 때마다 온몸의 뼈마디가 쑤셔 왔다. 한참을 끙끙거리다 겨우 눈을 뜨자, 시커먼 돌 천장이 있던 자리에 엷은 잿빛 하늘이 보였다.
또다시 물방울이 떨어졌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추적추적 빗방울 떨구는 하늘은 고요했다. 얇게 저민 먹구름은 잠잠했고, 그 아래로 새 한 마리 오가지 않았다. 페기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기름칠한 지 오래된 경첩처럼 머릿속이 더디게 돌아가고 있었다.
정신을 잃은 지 얼마나 된 걸까.
오전인지 오후인지도 가늠이 안 되는 흐린 하늘을 보며 그녀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쓰러지기 전의 기억을 조금씩 되짚어 나가려 했으나, 꼭 아주 오래된 일인 것처럼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페기는 양손으로 눈가를 덮으며 얕은 신음을 흘렸다. 머리가 못 견디게 지끈거렸다.
그렇게 숨을 고르다가, 힘겹게 윗몸을 추슬러 일으켰다. 그런데 일어나 앉자마자 뒷머리에서부터 찌르르 현기증이 몰려왔다.
그녀는 한 손으론 바닥을, 다른 한 손으론 눈가를 짚으며 어지럼증을 참았다. 신물처럼 올라오는 욕지기를 삼키며 마저 몸을 일으키려는데, 별안간 시선이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온통 이끼 낀 돌바닥을 짚고 있는 오른손.
손가락 마디가 죄다 기이한 방향으로 뒤틀려 있었다.
삐걱거리며 돌아가던 머릿속이 정지하고, 요동치던 속이 공허하게 가라앉았다. 페기는 나락으로 떨어진 심장을 주워 담으며 애써 차분하게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은빛이었다.
“…안 돼.”
고개가 퍼뜩 들렸다. 미친 듯이 사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구석에 처박힌 물그릇을 발견하곤 헐레벌떡 그쪽으로 기어갔다.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아 둥글게 번지는 파문 위로 서서히 사람의 얼굴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페기는 불안하게 뛰는 가슴을 움켜쥐곤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아직은 안 돼요.
제 기도가 들리신다면, 천사님, 지금은 안 돼요.